그런데 이 시커먼 숯 칠은 또 다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빨간 칠도 아니고, 파란 칠도 아니고, 하필이면 시커먼 칠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들이 흑인 소울 음악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데뷔 음반을 통해 가창력과 곡 해석력 등 노래 실력은 검증받았고, 음반도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경쟁자 빅마마만큼은 아니었어도 꽤 판매되었다. '노래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는 첫 번째 목표는 소기의 성과를 올린 것이다. 두 번째 승부수는 좀 더 음악적으로 가져가고 있다. 좀 더 제대로 된 소울 음악으로 본격적인 '음악적 숯 칠'을 해보이겠다는 것이다. 음반 이름도
음반은 정성스럽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열일곱 곡이나 담았지만 억지스러운 트랙 메우기는 없다. 곡 수가 너무 많은 탓에 산만하기도 하지만, 곳곳에서 노력의 흔적이 묻어난다. 허투루 실은 곡들이 별로 없이 고르게 양질이다. 탄탄한 소울 발라드들이 우선 눈에 띈다. '나락', '두 눈을 감고', '달빛 아래서' 등이 그렇다. 심상치 않은 리듬이 넘쳐나는 'Fever', 'Mr. Hurricane' 등 그들만의 댄스곡들도 함께한다.
특히 실력파 뮤지션들의 노래 선물 공세는 'Ready for soul'이라는 이들의 두 번째 호언이 식언이 아님을 증명한다. 샘리의 전자 기타가 따뜻한 소울의 느낌을 진하게 풍겨오는 '맘 아픈 척 하지마', 바비 킴이 구사하는 힙합 리듬과 재밌는 멜로디에 버블 시스터즈의 소울 창법이 흥겹게 조화된 '바람을 가르며' 등이 그 근거들이다.
특히 김반장이 선사한 'Can't denied love'(denied는 deny의 의도적 미스스펠인가?)의 펑키 리듬, 퍼커션의 여흥, 그리고 공명감 넘치는 신시사이저 사운드는 버블 시스터즈의 탄력적인 보컬과 어우러져 가장 음악적으로 돋보이는 곡이다. 좋은 가수와 실력 있는 뮤지션의 보기 좋은 결합이다. 이런 실험들에서 버블 시스터즈의 음악적 가능성은 배가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뮤지션의 곡들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해도 결국은 타이틀곡이다. 그래서 버블 시스터즈가 내세운 타이틀 곡 '사랑먼지'는 아쉬움을 많이 남긴다. 이들도 황성제 작곡의 '사랑 먼지'가 'Ready for soul'이라는 음악적 성숙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곡은 미디움 템포 알앤비 발라드 일변도의 우리 가요계와 적당히 타협하고 있는 팝 발라드이기 때문이다.
사실 소울 음악의 흔적이 쉬 드러나지 않는 곡 '사랑 먼지'를 타이틀로 앞세워야하는 사정도 안타깝기는 하다. 1집을 낸 후 기획사의 부도로 두 멤버가 탈퇴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멤버 교체까지 단행하며 30개월 만에 복귀한 사연을 접하면 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대중적 인기가 시급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락'과 같은 곡을 제쳐둔 것을 보면 지나치게 몸을 사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곡은 미국의 알앤비/소울 뮤지션 맥스웰(Maxwell)의 'Fortunate' 선율의 일부를 인용한 세련된 멜로디에 검은 색 매력을 한껏 머금은 멤버들의 하모니, 그리고 유려한 코러스가 소울의 향취를 물씬 풍기면서 충분한 대중성도 갖추고 있는 곡이기 때문이다.
외모 면에 있어서는 용감하게 현실을 비꼬았던 이들도 노래의 '히트'라는, 어쩌면 가수의 궁극적 목표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요 순위 상위에 랭크되는 기쁨만큼이나 팬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는 속도도 빠를 수 있다. 타이틀곡의 첫인상이 버블 시스터즈의 생명 전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들이 음악적 성숙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만나지 못하고 행여 '사랑 먼지'라는 곡으로 순응한 현실 속에 묻혀 버릴까봐 걱정이다.
-수록곡-
1. Intro (작사/곡 : 홍유진)
2. 나락 (루이 / 이현욱)
3. 눈물이 나요 (NANDA 서승희 / 전상환)
4. 맘 아픈 척 하지마 (Sam Lee / Sam Lee)
5. 사랑 먼지 (김태윤 / 황성제)
6. 바람을 가르며 (NANDA / Bobby Kim)
7. 그때 그대로 (이준석, NANDA / 이준석)
8. 두 눈을 감고 (NANDA, 방유진 / 서재하)
9. 여행을 떠나 (NANDA / 김석찬)
10. 달빛 아래서 (NANDA / SAM LEE)
11. Can't denied love (김반장 / 김반장)
12. 사랑은 (NANDA / 이준석)
13. Don't let go (외국곡, 원곡 En-Vougue)
14. Fever (방유진 / NANDA)
15. Mr. Hurricane (NANDA /김희원)
16. 아버지 (NANDA / 오승은)
17. Every Ghetto Every City (정인 / 이궐)
프로듀서 : NANDA (서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