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이 20년을 기념하며 남긴 자축 메시지는 “데뷔 20년, 남은 것은 빚 20억과 팬들”이었다. 충격이었다. 음반 시장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가수가 버라이어티의 루키로 떠오른 시점이라서 더 리얼하게 들렸다. 워낙 강한 파장의 언사(言史)로 유명한 신해철이기에 별로 대수로울 것 없는 듯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뼈아픈 말이기도 하다.
'마왕', '독설가' 그리고 넥스트의 리더인 신해철을 만났다. 7월30일, '라이벌' 서태지가 싱글을 발표한 다음날이었다. 운이 좋게도 이날 그는 유난히도 말에 탄력이 붙어 있었다. 고속도로 달리듯 거침없고 언어는 화려했다. 모두 받아 적느라 힘이 부칠 정도였지만 듣는 내내 즐거웠으며 감탄을 불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일이 둘째 아들이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온 첫날이었다고 한다. 그가 말한 뉘앙스를 모두 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이 이번 인터뷰에서 아쉽다면 아쉬운 일. 20년을 축하한다고 하자 그는 웃으면서 '축하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뭣하고, 사실이라고 말하기도 싫은데. (웃음)
그래도 부럽다. 이 판에 20년을 할 수 있다는 거.
20억 이자 계산 한 번 해보실래요? 부러운지, 아닌지...
음악계에 대한 섭섭함을 내비친 건가.
서운함은 없어요. 애시 당초 그걸 바랐던 적이 없었으니까. 단지 음악을 해서 돈이 자연스레 날 따라와 줄 때는 즐겼죠.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할까를 고민했고. 어디다 썼냐면 절반은 음악을 하는 데에 쏟아 부었고, 절반은 술 먹고 노는 데에 썼죠. 그런데 둘 다 잘 쓴 것 같아. (웃음)
우리가 듣기엔 신해철 같은 슈퍼스타가 20억 빚을 졌다는 것은 페이소스가 깔린 말 아닌가? 비탄조로 들렸다.
그게 이영자랑 김창렬이 진행하는 TVN '택시'에서 내가 한 말인데. 기자한테 얘기한 건 아니고. 거기서 택시를 타고 대화하면서 “20년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묻기에 “빛 한 20억 하고 팬 좀 남았지 뭐” 이렇게 얘기한 건데, 기자들이 긁어다 쓴 거예요. 정식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죽을 때까지 그런 말을 언급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반농담조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니야?” 그렇게 반문하면 거짓말한 건 아니거든요. 난 돈을 버는 재주는 없어요. 음악으로 부를 축적한 적도 없고. 대신에 예술가로서 돈을 다루는 재능은 있다고 봐요. 뭐냐면 거리를 둘 줄 아는 것. 돈이 들어오고 벌려도 휩쓸리지 않고, 돈이 안 들어오고 빚을 져도 낙담하지 않고. 거리를 둬야 음악을 계속할 수 있지, 버는 대로 희희낙락하고, 빚 좀 지면 찌그러들고.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20년이 아니라 2년도 음악 못해요.
예술가를 하려면 사실상 현실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좀 미련해야 되죠?
미련하고, 주위에서 잘 챙겨줘야 해요. 그런데 난 그런 복도 별로 없었어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내가 돈을 쌓아 놓고 돈을 총알 삼아서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더라면 대단히 게을렀을 거예요. 20장이 넘는 앨범을 만들지도 못했을 거고...
20주년 기념 콘서트 무대는 기분 좋아 보였다. (지난 7월18일, 19일 이틀간 서울 광장동 멜론악스에서 열렸다)
공연이야 항상 기분 좋죠. 객석 반응도 상당히 좋았어요. (감격하지 않았냐고 묻자) 1, 2년 전부터 감격하게 하는 연령층 구성으로 관객들이 들어 와요. 나이가 위로 아래로 계속 넓어져요.
넥스트가 새로 결성된 영향일까?
그냥 세월 영향인 것 같아요. 아래로 넓어지는 영향은 분명 라디오(고스트스테이션) 탓이에요. 라디오를 들으면서 '이 사람이 가수였어?'하는 거죠. 초딩이나 중딩들이 팬들이 모여 있는 사이트에 가서 '마왕이 옛날에 이랬어~' 같은 교육도 받고, 오래된 팬들이 새로 들어온 신입들한테 '마왕의 노래를 들으려면 말이다..' 이러면서 리스트 추려주고. (웃음) 그게 팬 사이트 구실을 해요. 근데 위로 넓어지는 건 왠지 모르겠어요. 왜냐면 내 골수팬들이 나이를 드는 속도보다 더 위의 사람들이 오니까.
그건 독설의 힘 아닐까. 이미 신해철이란 이름은 뮤직 이름은 물론 소셜(Social) 이름이니까. 도대체 이 인간이 음악은 어떻게 하나 보려고.
작년부터는 중년층 여성분들도 오시더라고. 사실상 '이모' 부대라고 보기에도 나이가 더 많아.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밴드들 가족이나 초대권으로 왔다고 보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아요. 이 분들이 참 재밌는 게, 공연 후반 30분을 노려요. 마지막 30분 되니까 일어나는 거야. 자기들은 힘이 달리잖아. (웃음) 그래서 레퍼토리를 그 분들을 위해서 앞으로 좀 당기고 있다니까요. 30대에는 남자 숫자가 더 많고, 10대, 20대에는 남녀가 동수인데, 이상하게 50대가 넘어가면 다 여자야. 나보다 나이가 너무 많다니까. 웃음. 난 지금도 공연장에서 붙잡고 앙케트를 돌려보고 싶어요. '왜 오셨나요'는. (웃음)
20년이면 공연과 더불어 음반이 따라주는 게 하나의 예의 아닌가? 더구나 앨범 미학을 아는 사람들인데...
곧 나와요. 아직 20주년 안 지났어요. (웃음) 올해에 나와요. 먼저 EP 형식으로 가을 전에 한 번 선을 보일 것 같고, 풀 앨범은 연말로 잡고 있어요.
음악 스타일에 대해서 힌트를 준다면? 이번에도 '언오소독스(Unorthodox)'?
내가 오소독스(정통)로 한다고 해봐야 나중에 결과물을 보면 오소독스가 아니죠. 엄밀히 말해서 한국에서는 10대 이전 로우 틴(Low Teen)에서부터 40대에 이를 때까지 하나만 파지 않는 한 주변국 뮤지션으로서 오소독스를 이룬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에요. 나는 지금 '압력'하고 싸우는 중이에요. 초짜들이 글을 잘 쓰다가 어느 정도 알고 나면 점점 펜이 무거워지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지금 되게 무거워진 거예요.
처음에는 음악을 한다고 정해놓고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듣는 거를 너무 좋아해서. 그 때가 내가 평론가였지 뭐. 정말 음악은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들을 때가 있었죠. 그러다 보니까 기타를 직접 쳐보고 싶다는 과도한 욕심이 나요. 그래서 쳤더니 이번엔 밴드를 하고 싶어져. 그래서 그것도 했더니 이번엔 판을 내고 싶고. 냈더니 편곡에 대해서 알아야겠고. 해봤더니 레코딩 엔지니어링이 해결이 안 되면 평생 하고 싶은 걸 못할 것 같더라고.
더욱이 내가 유학 갈 때쯤이면 우리나라 레코딩 기술이 지금보다 훨씬 뒤떨어진 시점이었어요. 만약 내가 영화감독이라고 치면 나중에 색 보정이나 구도의 문제가 생기는 건 문제가 없는데, 나중에 화면이 포커스 자체가 안 맞아 있거나 그런 상황이 나타나니까.... “다음 앨범에서는 이걸 해결 한다”, “분하지만 참고 넘어가자”, 그렇게 계속 가다가 1997년에 폭발을 한 거죠. 안 되겠다 내가 가서 배워오자.
나중엔 신디사이저를 직접 손으로 제조하는 수준까지 갔죠. 엔지니어링은 레코딩에서 믹스까지 다 할 수 있고. '자 이제 만들기만 하면 돼!'. 이제 표현 기법을 몰라서, 외국 음반을 들으면서 '어 이건 어떻게 만든 거지?' 하는 건 없게 된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되니까 갑자기 음표 하나 그리는 게 무서워지는 거야.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지금 상황은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냐면, 시퀀서가 날 만족을 못 시켜요. 초1급의 연주자들을 모아서 팀워크를 진짜로 만들어 놓고 집중적으로 연습을 해서, 완전히 전통적인 방식에 근거한 정면 공격 말고는 하기도 싫고, 만족도 안 되는 거예요. 열라 오래 걸리는 거지.
이번 앨범도 속도가 안 나요. (김)세황이 같은 경우는 “예전 넥스트처럼 컴퓨터로 내가 스케치하고, 멤버들이 받쳐줘서 성공한 전례가 있는데, 왜 그걸 죽어라고 기피를 하느냐”고 주장하고, 나 같은 경우는 “이번 앨범은 부스를 전부 분리해서 원 샷에 녹음하지 않으면 못 하겠다.”고 하죠. 한 방에 녹음하면서 사운드의 명료도도 달성하려면, 부스가 분리된 상태지만 유리로 멤버들이 전부 보이는 그런 스튜디오가 필요한데 그런 스튜디오는 없죠.
서태지 신보는 들어봤나.
몇 초 정도만.
등장만으로도 음악계를 흔드는 서태지 신드롬이 부럽지 않은지.
숨소리만 들어도 판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 아티스트가 한 나라에 한 10, 20명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우리나라 팬들은 너무 지조가 없어요.
태지가 나보다 더 영리하고요, 인내심도 더 강해요. 사실 내가 그 친구에 대해서 개인적인 얘기를 던지는 건 좀 조심스러워요. 사람들은 서태지의 신비주의나 은폐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비판도 하지만, 나는 그 심정 이해하거든요. 구체적으로 예를 하나 든다면, 나 같은 경우는 물건으로 비유하면 갈퀴에요. 잔뜩 긁어 담은 것 안에서 쓸모없는 것들이 같이 왔더라도 건지는 타입이고. 태지는 송곳이에요. 한군데 딱 타겟을 노리고 거기를 집중해서 노리는 거지. 자기가 가장 유리하고 잘할 수 있는 곳에서만 싸움을 벌여요. 나 같은 경우는 내가 불리해도 공부가 된다고 생각하면 하는데, 태지는 그런 싸움을 벌이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영리하죠. 솔직히 장수로 치면 그게 옳은 싸움을 하는 거죠.
우리 음악계, 그 중에서도 평론가들한테 독설가답게 한 번 지른다면.
요새는 평론하는 사람들이 없잖아? 평단은 전멸했지. 평론이라고 글을 쓰는데, 이건 뭐 평론도 아니고. '이런 글을 뭐 하려고 쓸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신경 꺼버렸어요. 어째 요즘 평론가라고 명함 들이미는 애들이, 예전에 PC 통신 시절에 거기에 글 쓰는 애들보다 못 쓰는 거야. 그때 PC 통신 애들한테 화도 나고 그랬는데, 지금 세월이 되고 보니까 그 정도면 양반이었어.
나이 들어 평론가 할 마음은 있는지.
음악 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소개를 받으면서 무대에 올라가고 싶지, 누군가를 소개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요. 평론가가 될 자질도 없고, 글 쓰는 것에 대한 무서움도 알고. 그게 얼마나 무서웠으면 내가 글을 직접 못 쓰고, 대담집이라고 해서 인터뷰집이나 내겠냐고. 내가 제일 독종이라고 생각하는 게 실은 글쟁이야. 난 그거 할 자신 없어요. 외국 같은 경우는 '평론가'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의 아티스트들의 음악에 대한 편견들을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동료 가수라는 이유로 아무도 얘기를 못해.
만약 메탈이냐, 90년대 이후 모던 록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메탈이냐 모던 록이냐 두 가지 밖에 없다면 나는 당연히 메탈을 택해요. 나는 어차피 어느 하나를 오소독스(Orthodox)하게 파본적은 없어요. 지금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록의 아이콘'처럼 얘기할 때 사실 무지 민망해요. 나는 댄스뮤직 가수 출신이거든. 그 정체성을 내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봐요. 나는 무한궤도로 데뷔를 했으니까 '밴드'보다는 '그룹사운드' 출신이죠. (웃음) 라스트 그룹사운드야. 무한궤도는 '밴드'라기보다는 '라스트 제너레이션 오브 그룹사운드'에요.
솔로 1,2집 했을 때 그 때 내 평생 기반을 만들어서 넥스트를 만들도록 했으니까 고맙긴 한데, 나 방송 나가서 춤도 추고 발라드도 하고, 그러다가 밴드 만든 거라서... 난 족보가 참 복잡해요. 방송국 가서 에스지 워너비나 동방신기가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러면 그것도 선배고, 홍대에서 술 먹다가 노브레인이나 크라잉 너트 만나도 '선배님!' 하고. 나는 족보를 따져보면 개 혼혈이야. 무한궤도 이전까지 따지고 가면, 내가 파고다 헤비메탈 마지막 세대예요. 부활 오프닝 밴드로 따라다니면서 연주할 때가 파고다 중심으로 일어날 때니까. 곰곰이 앉아서 '내 족보는 뭐야?' 해보면, 이건 개 짬뽕.
그렇다면 지난번 재즈 색깔의 앨범을 내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겠다.
전혀. 완전히 손을 안 댔다 싶어서 불모지로 남은 곳은 재즈 밖에 없더라고. '재즈 카페'는 제목만 재즈 카페였고.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까 어이구 한 번 들어가 보자 했는데, 반응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애시 당초 신해철이 재즈 앨범 낸다고 했을 때 재즈에 대한 오소독스한 완성도를 기대한 사람이 있었다면 나랑 얘기를 한 번 해봐야 돼. (웃음).
솔직히 개인적인 음반이란 느낌이 짙었다.
거의 개인용 노래방을 만들어 놓고 혼자 즐긴 거죠 뭐. (웃음)
지금 유지하는 창법은 편한가.
옛날에는 무조건 고음 질러주고 힘으로 제압하고 이래줬어야 하는 시절이었잖아요. 안 되는 고음 막 그냥 질러대고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절망에 관하여', 'Here I stand for you', '라젠카' 이거 다 그렇게 해서 나온 노래에요. 근데 그게 얼마나 고통인데. 나는 테너가 아니에요. 나는 바리톤이거든. 그러니까 그건 이를테면 튜바가지고 피콜로 솔로 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에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보이스칼라가 세 개에요. 처음에 속삭이는 톤은 알란 파슨스(Alan Parsons)를 모델로 해서 따라해 본거고, 하이 톤으로 올라가면 옐로보이스가 되요. 내려오면서는 레드 보이스가 되는 거고. 근데 나는 그 옐로보이스가 맘에 안 들었어요. 근데 일본에 차게 앤 아스카(Chage & Aska) 걔네도 옐로보이스거든. 그런데 괜찮더라고. 그래서 그 때 내 방식대로 해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거지.
고음도 고음이지만 신해철씨는 나레이션도 많이 넣고, 저음을 구사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건.
그건 DJ 했을 때 하던 습관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아니지만 음역만큼은 최고일 걸. 나는 아래도 되니까. 위 아래로 나보다 넓은 사람 없을 거야. (웃음)
신해철의 음악을 듣다 보면 본능적으로 장대한 스케일 쪽인 것 같은데.
작은 것은 큰 것을 만들어 놓고 사이에 배치하는 용도로는 만드는데, 작은 것 자체를 추구하진 않으니까. 일단 벌리고 보는 거죠. 그리고 벌려야 신해철이고 이제. 어렸을 때 밴드부에서 클라리넷 불 때도, 실내악이나 독주회보다는 워낙 심포니를 좋아했어요. 그 다음에 이제 헤비메탈로 빠졌다가, 그러다가 성시완이니 전영혁씨가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 오케스트라 심포니의 스케일과 록의 맹렬한 비트를 동시에 갖춘 음악이 이미 있더라구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생각했던 게, 그룹 르네상스(Renaissance) 음악을 들으면서, '여기다가 쌍기타를 갔다가 박으면 멋질 텐데 왜 안 할까' 그 당시에 프로그레시브 메탈은 있지 않았으니까.
넥스트 때 만든 것들 중에서, 가장 원초적으로 끌리는 앨범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넥스트 앨범 중에서 지금까지 제일 만족한 건 <라젠카>에요.
어렸을 적 소망의 실현?
바로 그거죠. 어쨌든 라인업 가지고도 허구한 날 흔들리던 밴드가 그 때는 고정이 되어 있었고. 세황이도 플레이로 만족을 시켜줬고, 보컬도 내가 그나마 그 때가 좀 늘 때에요. 표현 못할 것을 할 수 있을 때고. 그렇지만 앨범에 있어서 이런저런 요소들을 다 봤을 때 평균치가 제일 높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예요. <홈> 같은 경우는 다른 거는 쪽팔리지 않은데 포스트 프로덕션 점수가 낙제점이 나와 버리니까. 어느 한 과목이 낙제를 받아버리면 그 앨범을 마음속에 두고 있을 수가 없어요.
<비트겐슈타인> 나왔을 때는 실망했다. 마치 서커스 음악 같았다.
서커스 음악처럼 만들고 싶었으니까. 그 앨범은 선후가 뒤바뀐 앨범이었어요. 그 당시에 내가 배웠던 걸 다 사용해보고 싶었던 음반이었어요. '선(先)기술, 후(後)음악'! 지금에 와선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르겠는데, 드럼을 시퀀스로 프로그래밍했는데 일반 감상자는 물론이고 전문가도 속일 정도의 시뮬레이션이 가능한가, 그런 걸 실험해본 거예요. 또 제가 전면에서 지휘하는 일을 그 앨범서부터 그만뒀어요. 비트겐슈타인 나머지 두 멤버들한테 곡을 쓰고, 테마를 만들고, 나는 정리만 하는 입장이었던 거죠, 넥스트 5집도 그래요.
자기 지분을 의도적으로 줄였다는 말인가.
굉장히 오랜 시간 두고서 걔네들이 나한테 압박을 안 받게. 스케치를 해와도 칭찬. 뭘 해도 칭찬...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해철은 최소한 평균 이상의 멜로디는 써주는 사람인데, 왜 비트겐슈타인 이후엔 특유의 멜로디가 부족할까. 지금 말하는 건 꼭 협의의 멜로디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고. 일부러 죽인 건가.
나한테 그 때 더 중요했던 건 밴드와 생활하는 거예요. 그게 내 인생에서 내가 제일 갈증을 느끼고 있던 거였어요. 같은 멤버들하고 노상 시간 나면 말 안 해도 그냥 모이고, 할 짓들이 없고, 영화 같이 보러 다니고, 여자 친구 다 같이 없고. 막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걸 너무 동경했어요. 근데 그 갈증이 넥스트 때부터 시작되어서 모노크롬 때는 그 갈등이 더 비정해진 거죠. 백스테이지에서 히히덕대면서 놀고, 그걸 나를 너무 굶긴 거야. 특히 넥스트가 그랬어요.
비틀스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마지막 자기 생일 때, 어떻게든지 멤버를 단합시켜보려고 했는데, 아무도 안 왔잖아요. 그리고 자살하잖아요. <라젠카> 할 때 모든 시설이 갖춰진 침실과, 완벽한 밴드 하우스를 갖춰 놓고, 그러면서 앨범 만들고 싶었는데, 끝까지 밴드 하우스는 텅텅 비어 있었고, 결국은 내가 주도적으로 지휘를 했어요.
지금까지 음악하면서 밴드로서 제일 행복했을 때가 <개한민국>이었어요. 그 멤버들하고 너무 즐겁게 잘 지냈고, '이게 밴드 하는 거고 이게 사람 사는 거다' 하고 살았어요. 넥스트 전성기 때에 비해서는 풍족하지도 않았지만, 우린 늘 모였고 늘 같이 나쁜 짓도 하고, 놀아도 같이 놀고, 다섯 명이서 너무 재밌게 살았어요. 한 집에서 살다시피 했고. 내가 원하는 삶은 그거였거든요. 내가 강력하게 리더십 발휘해서 음악 하기보다는, 다섯 명 모두가 '야 이거 정말 내 앨범이야' 이렇게 생각해주길 바랬어요.
20년을 기념해 찾아온 만큼, 가장 궁금했던 것은 신해철에게 직접 듣는 '나의 20년'이었다. 그는 내심 무언가를 딱 잘라 선택하고 고정시키는 것이 맘에 안 드는 것 같았지만, 막상 내놓는 대답들은 하나같이 구체적이고, 솔직했다. 이 날, 신해철은 자신의 음악 인생에 얽힌 수많은 '비화'들을 쏟아냈다. 때마침, 인터뷰에 술이 곁들여지기 시작했다.
나한테는 다 중요한 모멘트에요. 일단은 대학가요제 나간 것 자체가 그랬죠. 왜냐면 당시에 내가 몸담던 파고다 메탈 씬에서는 대학가요제가 비토의 대상이었으니까.
그 때부터 언오소독스를 즐겼네. (웃음)
방법이 없었어요. 파고다 메탈 씬에서도 우리는 왕따였어요. 투 키보드를 내걸고 있었거든. 내가 계속 멤버를 들이고, 구성을 짜는 것들이, 리드 기타를 뒤로 빼고 키보드를 앞으로 배치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다른 밴드들이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연주할 때 우리는 유라이어 힙(Uriah Heep)이나 최소한 딥 퍼플(Deep Purple)은 되어야 연주하는 거였고.
두 번째는 모멘트는?
사실 대학가요제 나간 것보다 먼저일 수도 있는데, 기타 잡았을 때였죠. 처음에 기타를 잡았을 때 느꼈던 감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키도 작고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그냥 학삐리. 학교에서 성적은 상위권이지만 그걸로 인생이 보장이 되겠어? 그렇다고 집에 빽이 있어 뭐가 있어. 그런 평범한 애한테 쥐어진 기타. 그건 '성기의 확장'이더라고. (좌중 폭소)
이 기타를 든 순간, 나는 서양 놈 백인 놈들보다 더 큰 걸 휘둘러대는 마초로 변신하는 거고, 헤비메탈 굉음이 울리는 순간, 우리 집이 잘 살다가 쫄딱 망해서 어렵게 살았는데, 옆집 사람들 소리까지는 괜찮은데 윗집 사람들 화장실 휴지 푸는 소리까지 들려요. 내 공간이 없었지. 그런데 헤드폰을 끼고 내 공간 주변을 차단하면 그게 내 공간이에요. 헤비메탈이 폭발하면 중삐리 남자 놈의 자아가 끝없이 확장하는 거야. '덤벼라 덤벼! 내가 짱이야!'
그 다음 모멘트는 솔로로 전향한 것. 물론 나의 첫 번째 희망은 밴드를 만드는 거였는데, 사람이 없었어요. 무한궤도는 이제 해체하기로 된 거고.
'무한궤도'가 계속될 수 없던 속사정이 있었나?
무한궤도는 그 때 (대학) 3학년에서 4학년으로 넘어갔거든. 우리 또래에 나랑 밴드를 정말 해보고 싶었던 애들이 다 나랑 합칠 수가 없더라고. 무한궤도를 처음 만들 때부터 애들하고 약속이 뭐였냐면 4학년이 넘어가거나 그 때까지 우리가 성과를 못 얻으면, 대학가요제에서 상을 못타면 무조건 끝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상을 타니까 앨범을 하나 내야하지 않을까 하더라고.
나는 가수되고 싶은 적도 없고, 보컬 연습이라곤 해본적도 없고. 가수라곤 상상도 안 해봤다니까요. 근데 솔로 앨범을 딱 내게 되면서 '당장 눈앞에서 안 된다고 애처럼 보채지 말고, 돌아가자, 돌아가더라도 가면 된다.' 항상 그 사고방식은 내 평생을 따라다녀요. 내가 후회한 게 뭐냐면 나 '너무 일찍 데뷔했다.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고 곧 밑천이 뽀록이 날 텐데' 앨범 하나로 해산이 되니까 차라리 잘 됐다 싶었어. 이제 내가 뭘 하겠냐 이 말이죠.
그래서 솔로를 냈는데, 이것도 웃겨. 솔로 앨범을 하면 나는 소속사에서 작곡가들을 무더기로 데려다가 놓고 프로듀서가 옆에 붙고 그러는 줄 알았어요. 근데 그냥 내버려두는 거야. 아무런 소식이 없어. 그래서 짜증이 나서 하는 수없이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무한궤도 때도 쓰긴 했지만, 밴드의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 곡을 만든다고 생각했지, 내가 싱어송라이터가 되어서 전곡을 만드는 건 벅차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된 거지. 그리고 솔로 앨범이 첫 장 나오고 나서 성공하니까, 나한테 힘이 좀 더 실리죠.
그러면 첫 번째 앨범에는 다른 작곡자가 쓴 곡도 들어있고 한데, 두 번째 앨범은 다 내 이름으로 하겠다. 그 당시에는 송홍섭 같은 편곡자가 붙어야 성공하는 때 아니에요. 나 도움 안 받겠다. 시퀀서 한 대로 내가 다 만들 거니까 사장님 나타나지 마세요. 그래서 만든 게 솔로 2집 <재즈 카페>죠. 그런데 그 때 성공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안 돌아가면 난 영원히 못 돌아간다!
'작은 거인' 김수철씨가 앨범 냈던 거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히트곡내면서 꺼벙이 모드로 변하더라고. 그 형은 분명히 젊음의 행진 나와서 이빨 뜯고 그러 줄 알았는데, 꺼벙이 모드로 변해서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러더라고. 돌아온 형들이 없어 보니까. (웃음)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분명 내가 이 맛에 더 취해 있을 거고. 사실 달콤하더라고요. 그건 부인할 수 없어요. 인기에도 취했고. 많이는 못 벌었지만 그래도 그건 나한테 컸어요. 일단 악기를 내 맘대로 살 수가 있어. 그러고 난 다음에 바로 넥스트로 샜지.
넥스트 1집 < Home >은 그야말로 '총기'가 있는 앨범이었다고 본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면서 오피스텔에 내 침대 말고는 다 악기고, 눈 뜨면 악기, 눈 뜨면 악기, 거기서 라면 끓여 먹고, 눈 뜨면 악기, 음악 말곤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었어요.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고. 사실 넥스트 1집은 드럼도 전자 악기고 베이스도 없는 변칙 밴드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솔로 앨범하고 밴드 앨범 하고의 중간 형태였죠. 그런데 < Home >까지 성공하고 나니까 아예 내가 풀 밴드를 만들어서 멤버들을 꾸려나가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유재학 사장님이 밴드 살림 꾸리기 힘들다고 말렸고, 그래서 최소한인 3인조로 한 거예요.
< The Being >도 사실은 솔로에 가까운 앨범이에요. 베이스 내가 다 쳤고.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웃음) 그 당시에 드럼 치는 애가 몸이 아팠어요. 그런데 걔를 떼어 내고 하기가 그렇더라고. 그래서 베이스 해라 이렇게 했는데, 워낙 초보인데 베이스를 칠 수가 있나. 그래서 베이스 내가 치고. '이중인격자' 같은 경우도 기타 내가 친 거거든요? 반 세션을 동원해서 만든 내 솔로 앨범이나 마찬가지에요. 근데 그게 가장 넥스트적이라고 말하니까 난 웃기지.
그 다음 모멘트는?
넥스트 해산인 것 같아요.
왜 해산한 거죠? 세황씨가 너무 커서 그랬던 건가.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어요. 더 큰 건, 우리나라 시장이 너무 좁아서 질식할 것 같았어요. 아니 그래도 '남조선 일급 록 밴드'인데 일 년 중에서 공연이 300일이 잡히고 막 이래야할 거 아니에요. 공연이요, 2주일이면 전국투어가 끝나요. 나머지 11개월 반 동안 뭘 하라고. 넥스트가 텔레비전을 나가요 오락 프로를 나가요, 우리가 뭘 해요. 진짜 짜증나는 거야. 그래서 나이트에서 술 처먹고 졸라 시간 죽이고.
결정적으로 깨진 이유는, 그 당시에 넥스트한테 일본 진출 제의가 무지하게 들어 와서 현실화를 눈앞에 두고 있었어요. 그 때 우리가 일본 < Burn > 같은 잡지에서 별들을 서양 밴드하고 대등하게 받고, 넥스트 앨범이 일본 오타쿠들 모이는 가게에서 가게 주인이 일본말로 프린트해놓은 설명서를 안에다 첨부해서 팔았어요. 그래서 당시에 일본에서 2, 3만장이 나갔어요. 그래서 요것들을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일본에서. 일본에서 요구한 건, 일본에 스테이해라. 1년에 한 번에 왔다갔다 하는 건 안 되니까, 한국 시장은 이미 잡혀있는 시장 아니냐. 일본에 와서 말뚝 박아라. 그 때 제일 날 자극한 얘기가, 전국투어가 1년 내로 종료가 안 되는 나라라는 거예요. 현 단위까지 다 돌아서.
근데 멤버들이 싫다는 거지. 개인적인 이유로. 그래서 그 당시 선택은 멤버들 반을 교체해서 넥스트를 새로 짤 것이냐, 넥스트를 허공에 띄워 버리고 멤버들을 명예롭게 은퇴를 시켜줄 것이냐. 팀워크도 최악이었고. 그런데 셋이서 팀 만들대? 그 중에 두 명은 아직도 나랑 밴드를 하고. 나머지 한 명하고도 인간적으로 친하게는 지내지만, 내가 지금도 뭐라고 하는데, “니들하고 졸라 싸워서 팀을 아작냈는데, 같이 팀을 하고 앉았고...”
그래서 유학을 갔죠. 그런데 유럽 시장을 공략하는 건 참 힘에 부치더라고요. 유럽 시장에서 내가 원하는 음악이 슬슬 유행을 탈 것을 기대하고 올라오려면 10년이 걸리겠더라고.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환상이 확장되는 순간 같은 것. 일본도 유럽 시장에 진출하긴 힘들었어요. 근데 일본은 망가(일본만화)가 들어가니까, 그 다음에 일본 음악도 들어가대 결국은? 그러니까 이게 신해철 개인으로 성공을 해서 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 다음에 <모노크롬>이 내 최초로 상업적인 실패를 한 음반이 되는 거죠. 형, 졸라 웃긴 게 뭔지 알아요? 그 음반이 처절하게 참패해서, 박살이 났는데, 그게 몇 장이냐면 17만 장이야. 지금과 비교 해봐요. (웃음)
형식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20주년을 돌이키면서 자신의 베스트10 노래를 꼽는다면.
없는데. (웃음)
왜 갑자기 태도가 겸손으로 돌아서나.
겸손이 아니라 다 너무 뛰어나서. (웃음) 열곡은 못 꼽겠고, 몇 개만 생각의 방향을 정리를 해서 뽑아보자면. 보컬 쪽에서 내 베스트였다고 생각하는 건 <정글 스토리> OST 앨범에 있는 '절망에 관하여'. 부를 때 그림을 그리는 느낌이죠. 그게 내 가창의 베스트였던 것 같고. 사운드 메이킹에서 내가 생각했을 때 베스트는 보컬은 안 들어가 있지만 월드컵 때 나왔던 'Into the arena'.
'재즈 카페'는 내 음악 인생의 터닝 포인트 구실을 했어요. 그 앨범이 나올 때는 여전히 발라드가 휩쓸던 시대 아니에요. 회사에서 '내 마음 깊은 곳에 너'를 타이틀로 한다고 했는데, 난 싫다고 '재즈 카페'로 간다고. 그 때는 프로모션 매니저까지 지휘할 권력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 마음 깊은 곳에 너를' 밀었는데 잘 안됐죠. 그런데 '재즈 카페'로 미니까 갑자기 판이 빠지기 시작하더라고.
가사로 베스트는 뭔가.
내가 맘에 드는 건 '아버지와 나'죠. 팬들이 좋아하는 거는 '나에게 쓰는 편지'가 아닐까 싶고. 그런데 내 만족도나 팬 만족도를 종합적으로합 고려하하면, 가장 오랜 세월 남는 건 'The Ocean'이더라고요. ('민물장어의 꿈'은 어떠냐고 하자) 내가 무슨 맘을 먹고 그걸 썼는지 몰라. (웃음) 지금 보면 참 궁상맞고. 그런데 콘서트에서 그거 부르면 팬들이 그렇게 울어요. (정글 스토리에 있던 '70년대에 바침'은 어떠냐고 묻자) 그것도 좀 구려. 그런데 나도 몰랐는데 그게 이번 촛불집회 할 때도 불렸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히트곡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제일 정이 가는 노래는 '그대에게'인 것 같아요. 원래 사랑하지 않았어도 어떻게 살다보니 정이 드는 거 있잖아요. '그대에게'가 그런 곡이에요. 평생 살면서 그렇게 작전까지 짜서 만든 노래는 없었을걸. 대학가요제를 겨냥해서 진짜 머리를 많이 굴렸지. 한 번은 '그대에게'를 공연장에서 안 부르려고 했던 적이 있어요. 우려먹기 그만하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래서 한번은 앙코르에서 '그대에게'를 안 부르고 공연을 끝냈어요. 근데 그랬더니 관객들이 또 앙코르를 하더라고. 심지어 쓰리 앵콜을 했어요. 그러다 지쳐서 '아.. 나도 집에는 가야겠다' 해서 '그대에게'를 불렀지. 그랬더니 그렇게 앙코르 하던 사람들이 다 집에 가더라고.
공연장에서 제일 반응이 좋은 노래는?
'안녕'이에요. 그것도 옛날 버전이 아니라 펑크 록 버전으로 만든 거요. 근데 그게 멜로디가 무식하게 단순하잖아요. 완전 동요야 동요. 그런데 그거 부르면 외국인도 반응이 온다니까.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한테까지 먹히는 곡은 '그대에게', '안녕', '이중인격자', 'The Hero'에요.
음악생활 20년 동안 선배든 후배든 자신한테 쇼크를 준 사람은 누가 있어요?
김수철 정말 좋아했어요. '송골매'도 좋아했는데 그건 쇼크라기보다는 그냥 즐겼던 거 같아요. 겸손인지는 모르겠는데 철수형 말로는 잘하는 음악이 아니라 잘 나가는 음악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로 음악이 좋았어요. '작은 거인'이나 '산울림'이 팬들이 개 거품 물고 쓰러지게 하는 밴드였다면 송골매는 밴드하고 싶은 동기를 만들어준 밴드죠. 송골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타 메고 밴드 만들고 그랬는데요. 가사 적으로는 산울림한테 진짜 영향 많이 받았어요. 하덕규 형(시인과 촌장)한테도 많이 영향을 받았고.
정말 산울림은 대단한 가사였다.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언어였다. '꼭 그렇진 않았지만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어...' 이런 패턴은 전에 없었으니까.
'작은 거인', '마그마'가 그렇게 연주를 잘했어도 산울림은 못 당해낸다니까요. '청자(아리랑)'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같은 건 죽여~ 죽여~. '청자'를 TV에서 연주하는데, 이 사이키델릭을 7분을 해대요. 그 때는 흑백 화면에 화면 일그러지는 효과도 줬다니까 TV에서. 웃음. (김)창완이형이 그 말도 안 되는 불협화음을 기타로 내려 갈기는데, 그게 진짜 펑크지.
4인방 있잖아요. 백두산, H2O, 시나위, 부활. 다 영향을 받았죠. 그 중에서 부활의 김태원 형은 직접적인 스승이에요. 뮤지션이 뭔지 알려준 형이니까요. '애티튜드(태도)'를 가르쳐 줬어요. 그래서 나 솔로 성공하고 가요 프로그램 1위 했을 때도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선배들이란 사람들이 내가 대기실에 있으면 이랬어요. “너 울어야 돼. 그래야 담에 또 받는다. 그래야 대중들이 좋아해” 근데 난 완전히 반대로 나갔어요. 트로피 한 손으로 받고, 그거 막 아무렇지 않게 빙빙 돌리고. 어쩌면 그런 건방이 날 20년 동안 살린 건지도 몰라요.
인터뷰는 밤12시가 넘은 늦은 시각인데도 계속 이어졌다. 약 2시간 반 동안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워낙 말을 많이 한 터라 피곤할 텐데도, 술을 한 잔 하자는 말에 그는 '밑에 새벽2시까지 하는 곳이 있다'며 흔쾌히 응했다. '이게 우리 동네 술 마시는 법'이라며 특유의 소맥 폭탄 제조법을 선보인 그는 인터뷰에 동석한 초면의 20대 필자들과도 껄껄 웃으며 거칠고 화끈한 입담을 주고받았다. 여기서도 그는 '즐겁고', '세게' 놀았다. 20년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사석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인터뷰: 임진모 이대화 김두완 박효재
사진: 김혁수
정리: 임진모 이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