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02
조아름(curtzzo@naver.com)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 작가
20년이면 인간이 태어나 19번의 탄생일을 축하받고, 마지막 한 번째엔 성인의 세계에 들어온 것을 환영받는 나이가 되는 시간이다. 20년이면 우리에겐 없는 존재였던 퍼스널 컴퓨터가 이젠 필수품이 되어버리게 만든 꿈의 현실화를 이루어낸 시간이다.
신해철, 이 흔하지 않은 이름이 대중에게 선을 보인지가 20년이 되었다. 그의 솔로 앨범으로 코찔찔이 시절을 보낸 내가 자라 그의 데뷔 20주년 기념공연 기사를 쓰게 된 것을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전혀 알 수 없는 기분으로도 괜한 설렘에 이 기사를 맡은 이유는, 풀 것도 쓸 것도 많은 그의 세월에 대해 내 손으로 정리를 해보고 싶다는 단순한 관객적 욕심이 작용한 탓이 아닐까 한다.
세월이 무색하지는 않다. 클레오파트라도, 마다나(나는 마돈나라는 호칭이 어색하다)도 우리의 눈을 무안하게 만든 건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과 함께 늙어간다손 치더라도 그답지 않게 점점 배가 나오는 모습에 안타까움 보다는 궁금증이 먼저 일었다. 이 사람, 왜 아직 록을 하는 것일까?
크리스마스를 한달 앞둔 11월의 주말, 올림픽 홀 앞에는 찬바람을 맞으며 옹기종기 붙어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기다리는 이는 오빠이자 삼촌이고 형님이자 마왕인 신해철이었다.
20주년과 함께 걸어둔 제목은 '일렉트릭 서커스'. 제목을 보는 순간 W.A.S.P 의 Inside the electric circus 가 떠올랐지만 그는 열혈 록 매니아가 아니었던가. 그 정도 인용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게 예상한 덕에 왜 '서커스'인지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 그는 엔터테이너였다는 점을 잊고 만 것이다. 이유는 뒤에서 나온다. 이제 공연장으로 함께 들어가 보실까?
소녀 한명이 서있다. 조약돌로 땅에 선을 긋고, 그 선을 밟지 않으려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아이들에게 컴퓨터라는 만능 장난감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는 그러고 놀았다) '날아라 병아리'가 깔리며 와이어에 매달린 흰색의 무엇이 날갯짓을 하며 소녀에게 다가간다. 아, 그 노래 속 병아리인가. 둘은 이내 손을 맞닿았다가 금세 떨어지며 알 수 없는 행동만을 반복하다 노래의 결말대로 병아리는 땅속으로 사라지고 소녀도 무대 뒤의 스크린 속으로 사라졌다.
이 그럴듯한 오프닝은 와이어 액션을 선보인 병아리역의 남자 연기자 덕에 흥미로운 듯 했으나, 곧 지루해졌다. 특별한 에피소드 없이 줄에 매달려 공중회전만 하는 병아리에게 3분이 넘게 시선을 두기에 이 공연은 보여줄 것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의도는 충분히 알렸겠지만 1절만 했다면 더 담백한 맛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적속에서 드디어 나타난 주인공은 눈은 까맣게 얼굴은 하얗게 칠한, 작달만한 키를 그대로 드러낸 귀여운 삐에로 복장을 한 그였다. 사람들에게 특유의 걸쭉한 입담으로 인사를 시작하고 이어 그의 히트곡들이 쭉 불려졌다. 그중에는 욕으로 시작하고 욕으로 마무리한 곡도 있었는데 욕과 신해철, 궁합이 그만이다.
욕을 하는 사람은 많다. 욕을 먹고도 맞받아쳐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예 식당 브랜드가 되어버린 곳곳의 '욕쟁이 할머니' 그리고 연예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신해철일 것이다. 욕을 찰지게 하는 이들의 비결을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을듯하다. 그는 욕을 사랑한다. 그리고 욕을 자주 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욕이란 그저 감탄사일 뿐이다. 사람관계를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매개체이며 친분의 표시인 것일 뿐 정작 분노가 치밀었을 땐 극도의 예의바른 차분함을 보여주는 그다. 그는 말한다, 욕을 듣는 쾌감을. 욕을 하는 쾌감도 있지만 듣는 쾌감도 분명 존재한다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공연 중간중간마다 그에게서 욕을 듣는 관객들은 웃기 바빴다. 설령 어이없어서 코웃음 치는 것이었을지언정 말이다.
공연 내내 여느 인기가수들처럼 훨훨 날아다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그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히트곡들을 부르면서도 행복했던 날들을 떠올린다는 의미보다는 그땐 불가능했던 편곡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현재의 시스템에 오히려 기뻐하는 듯 보였으니 말이다. 특히 '도시인'에서 보여준 90년대 가요 톱 텐의 2000년대식 재연은 그가 댄스가수였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우치게 해주었다. (그를 진정한 댄스가수로 세상에 알렸던 '안녕'을 부를 때 내심 기대한 '짝발 짚고 한쪽으로 흔들기 댄스'가 끝내 나오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도시인'은 그가 결성한 락밴드 넥스트의 데뷔곡임에도 그는 이 곡을 댄스가수였던 그 시절로 돌아가 실력발휘를 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넥스트와 신해철의 경계는 없는 듯 했다. 그리곤 은퇴 따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관중에게 다짐하며 그는 사라졌다.
그가 서커스를 선택한 이유는 무얼까. 동심에서 봤을 때 가장 화려해 보이는 것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무대일 것이다. W.A.S.P의 패러디가 아닌, 현란한 조명과 화려한 무대의상, 갖가지 묘기를 보이며 환호를 지르는 관객을 주도하는 진짜 서커스는 어린 신해철이 동경하던 무대 위의 살아있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애니메이션 파프리카의 첫 장면에서 보여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 주인공의 등장처럼 말이다. 그는 어릴 적 소망대로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손에 들고 있는 메시지를 놓지 않는 광대가 되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며 드러난 불새 깃발과 군인복장을 한 무리들의 몸짓에 넋을 잃고 있을 때 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붉은 머리의 제독, Crom이 등장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인 Crom은 독재자의 대명사인 크롬웰에서 따왔다.) 전 & 현 넥스트의 멤버들로 구성된 2부의 시작이었다. 객석을 가로지르는 리프트 위의 그의 모습에선 록으로 이 땅을 지배하고픈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왜 Crom을 자신의 다른 이름으로 가져왔는지는 이제 말할 필요 없을 듯하다.
압도하는 연주와 군무 속에서 이어진 Lazenca, save us. 이것이 과연 만화영화 주제곡이었단 말인가. 국내에 이런 류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 신해철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국내의 숱한 실력파 뮤지션들에겐 대신 사과드린다) 그가 태어난 곳이 '반지의 제왕'과 같은 블록버스터가 숱하게 제작되는 나라가 아니기에 '대박 영화음악가' 신해철을 만날 순 없지만 다행히 그의 판타지적 음악재능은 온라인 게임쪽에 손을 뻗쳐 한몫하고 있지 않는가?
달리고 또 달리는 2부의 공연도 서서히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에 열광하고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존경하는 평범한 메탈 광이지만 토리 에이모스(Tori Amos)의 감성에 울고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의 숨어있는 발라드를 국내에 알리기도 한 그는 로맨티스트였다. 여성들의 호응을 꽤 얻었던 'Here, I stand for you' 를 부를때 그의 로맨틱한 면모는 충분히 발휘되었다고 본다. 수많은 로커들이 그러했듯이, 그에게 있어서도 사랑은 버릴 수 없는 주제인가보다.
넥스트를 세상에 드러낸 노래가 '날아라 병아리'였다면, 지금의 신해철을 가장 많이 알린 노래는 단연 '그대에게' 이다. 이 곡은 대학가, 경기장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언제나 불려지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20살의 신해철이 부모님의 눈을 피해 밤에 이불을 덮고 멜로디언으로 만든 노래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니.. 그는 정말 타고난 스나이퍼다. 팬들은 안다. 그대에게를 부르는 순간, 이별을 준비해야 함을 말이다. 그렇기에 이 곡을 연주할때면 더더욱 열기를 뿜어내며 어우러져 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곡가 신해철을 바라보는 나로썬 안타까움이 인다. 이렇게나 훌륭한 스나이퍼가 음악에만 신경을 썼다면, 스테디셀러가 10곡은 더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앞선 욕심에 말이다. 비슷한 욕심을 부리는 대중들에게 들려주려는 듯, 그는 무대를 마무리하며 이야기했다. 음악을 시작했을 그때만 해도 음악만을 하며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하지만 음악을 하기위해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피하지 않고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당당하게 말도 꺼내고, 글도 쓰고, 음악도 하는 그런 모습들을 그저 '저 사람도 저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 지켜봐달라며 말을 맺은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단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커다란 욕심을 당당하게 내어놓았다.
앞서 던졌던 '아직도 그가 록을 하는 이유'에 대한 의문은 풀렸다. 아직이 아니라 여전히였다. 무대를 사랑하고 관객을 사랑하고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신해철. 하지만 이 땅에서 록 음악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전쟁의 시작인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는 평화주의자다. 빈둥거리기를 좋아하고 사람과 술과 어울림을 즐기며 만화책과 AV를 거리낌 없이 곁에 두고 풀어놓는 이 사람. 그에게 있어 음악이란 만화책이며 술이며 AV며 즐겨 쓰는 욕이다. 감지도 않은 헝클어진 머리와 듬성듬성한 수염이 결코 지저분하게 보이지 않는 그. 이 시대의 아이돌이자 동시에 록 스타로 불리길 누구보다도 갈망하는 그.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무한궤도라는 밴드에서 솔로 신해철의 데뷔로, 그리고 록 밴드 넥스트로, 모노크롬으로, 비트겐슈타인으로, 다시 넥스트로. 그는 '밴드를 하기 위해 댄스음악을 했고 낯간지러운 발라드를 부르며 오빠부대를 이끌었다.'고 말한다. 세상에 알려지고 인기를 얻게 된 후 원하지 않는 음악을 만들지 않아도 된 것이 가장 행복했다는 그의 꿈은 현재 그가 살아가는 세상속인지도 모르겠다.
27살 이후로 나이를 세지 않아 거기서 멈추었다며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다' 고 노래하는 청년 신해철에게 이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당신은 강하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