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미인'뿐인가. '아름다운 강산', '빗속의 여인', 펄 시스터즈에게 써준 '님아',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 박인수의 '봄비', 이정화의 '꽃잎', 김정미의 '봄' 등 신중현이 쓴 상당수 곡들이 천재적 역량의 산물들이다. 한국과 서구 감성의 드라마틱한 결합은 물론 탁월한 곡 진행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대중과 전문가들의 감탄을 부른다. 이건용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비범한 화성의 음악'이란 찬사를 보낸 바 있다.
언제 들어도 둔중하게 울리는 이름 신중현은 실은 2006년 은퇴를 선언했다. 젊은 가수들 중심으로 돌아가 나이든 뮤지션들을 푸대접하는 음악계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미련 없이 음악을 관두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그는 말했다. “할 게 없는데 붙어있어서 뭘 하나? 아예 은퇴를 공표하고 떠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나이 든 사람이 버티고 있는 모습도 보기 안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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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은 지난해 12월10일부터 신년 1월15일까지 서울 대학로 가든 시어터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은퇴 후의 공식 활동인데도 딴 뮤지션 같으면 따라다녔을 '번복'이란 비판으로부터 그는 예외의 특전을 누린다. 고희를 넘긴 나이고 스스로 은퇴를 공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중현이 '현재진행형' 뮤지션으로 대접받고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한마디로 '한국 록음악의 대부' 혹은 '대한민국 록의 구세주'라는 역사적 위상을 지키고 있는 절대 거장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내 록음악에 관한 한 모든 흐름이 그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록밴드인 '애드포'를 결성한 것이나 삼천만의 가요로 통했던 상기한 '미인'을 비롯해 '아름다운 강산', '빗속의 여인', '커피 한잔'과 같은 명곡을 만들어냈다는 사실만으로 역사의 화환을 받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그는 전성기에 김추자, 펄 시스터즈, 장현('미련', '나는 너를', '마른 잎'), 박인수, 이정화, 김정미 등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장식한 무수한 실력파 톱 가수들을 키워냈다. 가수, 연주자, 작곡자를 넘어 탁월한 프로듀서였다는 점이 그를 국내 록음악 아니 음악전체 역사의 산증인이자 위인으로 숭앙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국내 대중음악의 총 설계자'가 다름 아닌 신중현이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기타 전문회사 펜더(Fender)로부터 아시아 뮤지션으로는 처음으로, 세계에서는 여섯 번째로 기타를 헌정 받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펜더, 정확히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는 가장 로킹(rocking)한 일렉트릭 연주를 들려준 천재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등장하면서 널리 보급되었으며 록의 발전에 가장 결정적인 악기로 평가받는다. 대학로 가든 시어터 공연도 작년 7월부터 전국을 순회하며 펼친 '펜더 기타 헌정 기념공연'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한 자리인 것이다. 그는 “남은 인생동안 펜더 기타에 맞는 음악을 만들고 싶고 기타의 진가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는 의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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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기억하는 정권탄압의 시작은 1972년, 유신정권이 출범하기 바로 직전이다. 그에게 청와대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통치를 내용으로 한 노래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신중현은 “왜 하필 나에게 그런 주문을 하느냐”고 반문하고는 정중하게 요청을 거절했다. 이 때문에 괘씸죄에 걸린 그는 공연마다 단속을 당했고 끝내는 대마초 수괴로 지목되고만 것이다.
1980년대 들어 활동을 재개했지만 그의 시대는 어느덧 훌쩍 지나갔고 재기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한번 떠난 대중들의 관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적 인기는 갔어도 역사적 위상은 갈수록 상승했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미인'과 '님은 먼 곳에' 등 그가 쓴 곡들이 봄여름가을겨울, 조관우, 장사익 등 후대 뮤지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면서 대대적인 신중현 재조명 열풍이 불었다.
신중현선생은 과연 지금의 음악계를 어떻게 볼까. 문제점을 지적하는 모습은 한마디로 '무서운 선생님'이다. “노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지속되어야 강대국이 되는 거죠. 문화를 귀하게 여기고 보존하려는 자세가 없으면 강대국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과 매체가 의무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밥그릇 챙기려는 자세, 자기만 살겠다는 사고로는 곤란해요. 이제 남은 게 거의 없는 것 같아요. 하루치기들만 존재하고 있어요. 좋은 음악은 매장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문화라는 소중한 재산을 다 없애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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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 더. “아무리 외국음악을 해도 한국인이라는 자각이 필요해요. 한국인이 선천적으로 보유한 정서, 고유의 얼, 가락, 장단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한국음악을 하기 위한 '근본'이에요. 근본을 바탕으로 하고 나서 공감할 수 있는 외국의 것을 받아들여야지요. 이 점에서 요즘 젊은 친구들은 너무 외국의 것을 무차별로 수입해 방향감각을 완전 상실했어요. 한국문화를 메인에 놓아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는 음악 하기, 록 하기 어려운 이 땅에 '한국적인 록'을 심으려고 했다. “록을 외국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으로 바꿔 놓으려고 했죠. 우리 것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섰어요. 굳이 한국적인 록이라는 명칭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엽전들'시절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룹이름도 엽전이란 말을 쓴 거구요. 당시 서구 록도 국가별로 분리되어가는 경향이었어요. 미국 록, 영국 록, 이태리 록, 독일 록 등 자기네 나라 정서를 구현하는 쪽으로 갔지요. 한국 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미인'이 그렇지만 한국적인 가락을 살리는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신중현과 세 나그네' 음악은 그것을 실험적으로 더 구체화한 것이었죠.”
유행 따르기에 급급하고, 록은 여전히 변방에 머물고 있는 이 땅에 신중현과 같은 걸출한 아티스트가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는 성심성의로 그를 모셔야 한다. '한국 대중음악 구하기'라는 과업은 신중현에 대한 경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