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사에서 불멸의 아이콘으로 자리한 '존 레논' 역시 고통의 비상을 감내한 영혼이다. 무구한 창백함이 서린 인상, 여림과 쇠약의 기운을 뿜으며 고결한 멜로디로 남은 존 레논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30년을 넘겼다. 그가 살아있다면 70세가 되는 해, 그 끝자락에서 각별한 영화 한편을 만났다.
존 레논이 음악에 처음 눈뜨는 시기를 주목한 영화 <존 레논 비긴즈-노웨어 보이 Nowhere Boy>는 '리버풀의 반항아' 존 레논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반항아의 한 시절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반항아는 왜 반항하는가'를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탐색은 완성된 뮤지션 존 레논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발원점으로 인도한다. 양친의 부재로 깊은 생채기가 난 소년 존이 이모 미미의 집을 배경으로 겪는 시절의 성장통을 따라 가다 보면 존 레논의 전 일생을 스크린에 투영하게 된다.
밀물과 썰물처럼 떠나가는 것과 찾아오는 것을 받아들이며 순서를 정하지 못한 채 혼란 속에 서 있던 청년 존은 포마드 기름으로 옆머리를 빗어 넘기고 집을 나서자마자 이모 미미의 규율을 깨부순다. 자신을 둘러싼 충격들을 완화시키는 그만의 방법이었을까, 심한 근시를 앓으면서도 안경을 벗어버리고 세상을 보는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 없는' 무법자적 일탈이다.
이 영화의 큰 줄기는 존 레논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를 보기 전에 육중한 무게감으로 스크린을 지배하는 것은 여성들이다. 방황하는 한 청년을 압도하는 갈등의 통로에 거부할 수 없는 두 여성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 관객은 '엄마와 이모'라는 주인공의 관점에서 더 나아가 '자매'라는 시선으로 바라볼 때 영화는 또 한번 극적이다.
줄리아는 지구상의 엄마라는 존재가 가진 모성애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 순간 놔버린 자식이 일생의 우울증을 지배하고, 재회하는 순간부턴 모든 행위와 감정을 아들에게 쏟아 부으면서 자신은 무(無)가 되고 자식의 분신이 되길 원한다. 들뜬 걸음으로 다가와 볼을 부벼 대고, 키가 한자나 더 자란 아들의 옆에 누워 축음기의 음악을 흥얼거리는 엄마, 리버풀의 구전 가요 '매기 매이(Maggie May)'를 부르며 밴조를 가르쳐주는 엄마의 자유분방함은 무법자인 존도 당황할 정도다.
미미는 그 반대편에 우뚝 서 있다. 그녀 역시 존을 끔찍이 사랑한다. 줄리아의 방식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경박함이라면 미미의 방식은 목을 죄는 느낌이다. 사회적 틀에 갇혀 응결된 상태의 그 애정은 표독스럽고 차디차다. 점잔 빼는 당시 시민사회 중산층의 의식을 철저히 고수하면서 존을 올바른 청년으로 키우려는 그녀의 책임 의식은 동생인 줄리아의 열기에 강력하게 맞선다.
영화에서 존이 두 사람을 한꺼번에 밀치고 나가버린 후 자매를 비추는 카메라의 눈은 극명하다. 줄리아가 상실감을 온 몸으로 느끼며 주저앉을 때 그들을 가로막은 벽 너머에서 미미는 입을 가리고 오래 쌓인 독을 토해내듯 몰래 운다. 이 두 여성의 세상에 대한 인식과 표현방식은 그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 하던 존의 정서에 지울 수 없는 혼란으로 남아 평생 그의 행태를 결정짓는다. 살아 생전 자신의 음악과 대중 앞에서 몰아(沒我)의 상태로 나아가면서 떠돌다 잠적하곤 했던 존 레논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그가 위인이면서도 기인으로 비춰지는 근원은 먼 곳에 있지 않다.
폴이 존을 만났을 땐 이미 유방암을 앓던 엄마를 잃은 후였고 그 자리에 자신만의 음악세계가 자리한 시기였다. 월튼 빌리지 축제의 야외무대 아래에서 무시당한 폴은 존에게 에디 코크런(Eddie Cochran)의 '트웬티 플라잇 록(Twenty Flight Rock)'을 들려준다. 존이 엄마의 밴조코드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흔들리는 정체성 때문에 음악을 도피처로 삼았던 존에게 폴은 기타코드를 가르치며, 음반사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곡을 직접 써야 한다고 맥랑한 충고까지 던진다. 존은 두 살 어리지만 낙천적이며 끈기 있게 따라붙는 폴에게 기타를 배우면서 밴드의 음악을 제대로 알아가기 시작한다. 비틀즈가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 '레논&맥카트니'는 싱어송라이터 콤비였다는 것을 영화는 입증한다.
마더 콤플렉스에서 야기된 정체성의 혼란으로 존이 일찍이 앓은 병은 페니 레인 교차로에선 버스 위로 날고 두 발은 스트로베리 필드를 밟게 되는 트라우마였다. 완벽한 비틀즈가 되어서도 멤버들과 한결같이 융화되기에는 너무 황량한 필드가 그의 내면에 자리한 것이다. '노웨어 보이'가 지나다니는 길에 깔려있는 복선만으로도 비틀즈의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존 레논일 수밖에 없고, 비틀즈가 해체를 예약한 밴드였단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는 존의 정서를 테마로 당대에 꽃핀 음악들을 불러낸다. 존 레논이 처음 만든 곡 '헬로 리틀 걸(Hello Little Girl)'도 현재진행형으로 들을 수 있다. 특히 스튜디오에서 그들의 밴드가 '인 스파잇 오브 올 더 데인저(In Spite Of All The Danger)'를 연주하는 후반부의 장면은 비틀즈의 탄생 서막을 예고하는 순간이면서, 자신들의 인생을 똘똘 뭉쳐 개척하는 '밴드'의 가치가 엿보이는 아름답고 숭고한 장면이기도 하다.
함부르크의 언더그라운드로 떠나는 청년 존 레논의 진짜 스토리는 이모의 집을 떠나며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 시작된다. 영화 <노웨어 보이>는 한 불완전한 청춘의 예측불허 인생을 헤아리는 시작점, 프롤로그다. 세기를 뛰어넘어 고결하게 남은 자아의 첫 발을 쫓는 이 영화에서 어떤 무리의 이름 같은 건 수면 아래 있다. 비틀즈란 찬란한 이름조차도.
영화의 여운을 가지고 돌아가 그의 노래 '마더(Mother)'를 끝까지 들어보라. 화가 나면 친한 사람들을 전부 거칠게 밀어내고 부모에게도 안녕이라고 수 차례 되뇌던 그였지만, 노래의 마지막에서,
Mama don't go
Daddy come home
노래와 함께 평생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한 불온한 영혼은 이제 우리에게 애잔한 그리움으로 남았다. 다코타 하우스 앞에서 쓰러진 그의 육신은 영영 떠나갔지만 세기를 뛰어넘어 우리 곁을 맴돌고 있는 노웨어 보이, 오늘도 전 세계에 가득 살고 있는 생, 존 레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