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岩井 俊二) 감독의 영화 < 릴리 슈슈의 모든 것(リリィ シュシュのすべて) >에서 릴리 슈슈의 목소리를 맡으며 데뷔한 지 햇수로 8년. 그녀만의 독보적인 가성이 내포한 예민한 감수성은 대중들뿐만 아니라 많은 아티스트들의 시선마저 빼앗아갔다. 그러던 중 전환점이 필요했던 본인의 의사에 따라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코넬리우스(Conelius = 오야마다 케이고(小山田 圭吾))에게 공동 프로듀싱을 의뢰함으로서 이번 프로젝트가 성사되었다.
계획이 거창할수록 목표로 했던 것들은 조금씩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코넬리우스를 끌어들인 혜안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뮤지션으로서의 많은 경험을 토대로 과도한 욕심대신 해낼 수 있는 범위를 예상해 새로운 세계로의 여정을 짜임새 있게 구성해놓았다. 분명 가수에 의해 곡이 주도되고 있지만, 러닝타임이 끝난 뒤 의식이 쫓는 것은 육성의 족적보다는 보다 큰 스케일의 일렉트로니카 비트가 만들어낸 환각의 세계다.
첫 곡인 'ただのともだち(단지 친구)'부터 형체도 없이 분절되어버린 그녀의 흔적이 이곳저곳 비트와 섞여 떠다니기 시작한다. 주 멜로디가 분명히 흐르는 와중에도 조각난 음절이 터치감 강한 피아노와 어우러져 몽환적 분위기를 생성해낸다.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몸이 들썩이는 체험이 가능한, 일전에 느끼지 못했던 역설적인 자극이다.
이러한 '분열-혼합'의 양상은 제목부터가 반어적인 '歌いましょう(노래합시다)'에서 극대화된다. 종잡을 수 없는 전자음이 목소리 조각과 함께 온갖 법칙을 무시한 채 그저 떠돌기만 할 뿐이다. 멜로디, 정돈된 리듬, 가사를 통한 감동 등 평소에 음악을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은 어느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단지 편견의 전복으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목격만이 가능하다.
일부러 이 여우(女優)가 펼치는 연기의 호흡을 끊어버리는 'Mirror nerotic'은 어떤 식의 보컬운용을 꾀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트랙이다. 넘실대는 베이스 위에 살포시 놓여 있는 사류의 존재감은 그저 그 자리에 놓일만한 일개 악기 대신이다. 전체를 지배한다거나 이끌어간다거나 하는 부담감은 없다. 그저 하나의 부속품으로 철저하게 이용당할 뿐이다. 몇 개의 파트를 녹음해 가벼운 선율과 함께 뒤섞어놓은 '奴隷(노예)' 역시 앰비언트 뮤직의 요소로 충실하게 변신해 미묘한 하모니를 연출한다.
이만한 완성도가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각 요소를 잘 조합해 준 협력자의 공도 크지만, 사류 본인의 역량도 무시할 수 없다. 한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든 다양한 음색을 구사함으로서 많은 조합의 수를 꾀할 수 있게 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사용하느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러한 면에서 그녀의 생각은 적중했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간파했기에 계획과 전략의 승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 우리가 믿고 있던 것들을 순식간에 뒤집어버리는 작품이다. 듣다보면 어느새 사운드의 파편에 잠식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좋다 나쁘다가 아닌 여태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감각의 발현이다.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걸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알려주는 걸작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질서 속에 혼돈이 있듯 헝클어놓은 세계의 혼돈 속에 질서가 있다고 가르쳐준 어릴 적 만화속의 초시공전사는 이렇게 내 앞에 재림했다.
- 수록곡 -
1. ただのともだち(단지 친구)

2. Muse'ic
3. Sailing days
4. 心(마음)
5. 歌いましょう(노래합시다)

6. 奴隷(노예)

7. レインブーツで踊りましょう(레인부츠를 신고 춤추자)
8. s(o)un(d)beams
9. Mirror neurotic
10. Hostile to me
11. 続きを(계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