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중음악을 듣다 보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멜로디가 교묘하게 섞여 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샘플링 때문이죠. 1990년대부터 시작된 흑인음악의 절대 강세는 국내 음악 판도에도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힙합 문화의 한 갈래인 샘플링 기법이 우리 가요에도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왕년에 한 가닥 했다고 외치는 기성세대들도 젊은 노래들을 거부감이나 부담감 없이 흥얼거릴 수 있게 만들었죠.
이번 하나씩 하나씩에서는 번안 곡이 아닌 팝송을 샘플링해서 탄생한 우리 노래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샘플링이 힙합 문화의 하위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힙합 곡들을 먼저 소개해드리고 다음 하편에서는 랩을 제외한 곡들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99년, 데뷔앨범을 공개한 드렁큰 타이거는 도발적인 제목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와 직선적인 구애가 '난 널 원해'로 부상했는데요.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는 스팅(Sting)의 노래 중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Shape of my heart'를 샘플링 했고 '난 널 원해'는 많은 사람들이 뉴욕 출신의 랩 듀오 캠프 로(Camp Lo)의 'Black connection'을 기초로 한 것으로 알고 있죠. 하지만 드렁큰 타이거의 리더 JK 타이거는 캠프 로가 아니라 1970년대에 'You are everything'이나 'Because I love you girl', 'You make me feel brand new' 같은 노래들로 국내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린 소울 그룹 스타일리스틱스(Stylistics)의 'Love is the answer'에서 주요 멜로디를 따왔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Love is the answer'의 오리지널은 스타일리스틱스가 아니고 동시대에 활동했던 백인 싱어 송라이터 토드 룬그렌(Todd Rundgren)입니다.
토드 룬그렌이 1970년대 초에 발표한 팝록 스타일의 'Love is the answer'는 스타일리스틱스가 초기 디스코 풍으로 리메이크했고 이것을 샘플링 한 것이 캠프 로의 'Black connection'과 '난 널 원해'입니다. 조금 복잡하죠? 간단히 얘기하면 '난 널 원해'에서 샘플링 한 원곡은 토드 룬그렌의 'Love is the answer'라는 거죠.
2000년에 1집을 공개하면서 한국 힙합의 무림고수에서 실력파 아티스트로 등극한 CB 매스의 노래 중에서도 1970년대의 흥겨운 디스코 넘버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데뷔앨범 수록곡인 '진짜'는 흑인 여성 가수 셰릴 린(Cheryl Lynn)의 1979년도 히트 싱글 'Got to be real'에서 도입부를 따왔고 2집의 '휘파람'에서는 흑인 보컬 그룹 스피너스(Spinners)가 1972년에 탑 텐에 랭크시킨 'I'll be around'의 전주로 시작하죠. 'Got to be real'은 셰릴 린이 토토(Toto)의 멤버 데이비드 페이치(David Paich), 1980년대 최고의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와 함께 작곡한 디스코 넘버구요. 세련되고 우아한 'I'll be around'는 대표적인 필라델피아 사운드, 즉 초기 디스코 곡입니다.
최근 화제의 중심 인물이었던 MC 몽이 멤버였던 피플 크루가 2002년에 발표한 '새마을 운동'에서도 우리 귀에 익숙한 베이스 라인이 시종일관 흐르죠. 바로 E.L.O.가 1979년에 발표해 39위에 올랐던 'Last train to London'입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많은 가수들이 디스코를 자신의 음악에 끌어들여 상업적인 성공을 일궜는데요. 데뷔 초기에 록과 클래식 음악을 접목해 '고전 음악을 하는 비틀즈'라는 별명을 얻었던 E.L.O. 역시 1979년에 공개한 앨범 < Discovery >에서 디스코 리듬을 차용한 'Don't bring me down'과 'Last train to London'으로 전미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죠.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싱글로 발표하지도 않은 푸대접 트랙인 'Midnight blue'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습니다.
1960년대 소울 음악의 시그니처 곡 중 하나인 'Soul man'의 주인공 샘 & 데이브(Sam & Dave)의 별명인 '다이나믹 듀오'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정한 다이나믹 듀오의 2004년도 작품 'Ring my bell'은 유명한 디스코 넘버인 아니타 워드(Anita Ward)의 동명의 넘버원 싱글을 샘플링 한 건데요. 하지만 리메이크에 조금 더 가깝죠.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나얼이 기름진 보컬로 참여한 이 곡은 윌 스미스(Will Smith)가 있던 랩 듀오 디제이 재지 제프 & 더 프레시 프린스(DJ Jazzy Jeff & The Fresh Prince)의 리메이크보다는 아니타 워드의 원곡 분위기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한예슬이 주연한 드라마 < 환상의 커플 >과 함께 자장면 매출에 혁혁한 공을 세운 지오디의 '어머님께' 기억하시죠?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바치는 이 감동적인 노래는 서부 힙합의 전설이 된 투팍(2pac)이 1996년에 발표한 'Life goes on'의 기초 멜로디 위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읊은 곡이죠. 그런데 투팍의 'Life goes on'은 거리에서 숨을 거두는 흑인 젊은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노래랍니다. 결코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죠.
지오디를 발굴한 박진영은 자신이 키운 가수들의 노래에 유명한 팝송을 샘플링하는 적극성을 보이는데요. 지오디는 '어머님께' 외에도 뮤직비디오에서 어처구니없는 패션을 선보인 '관찰'에서는 1980년대 초반 신스 팝의 대표곡 중 하나인 야즈(Yaz)의 'Don't go' 건반 리프와 펑크(funk) 밴드 오하이오 플레이어스(Ohio Players)의 1976년도 넘버원 싱글 'Love rollercoaster'의 그루브한 기타 연주를 중간 간주에 삽입해 흥겨운 곡으로 완성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Love rollercoaster'는 오하이오 플레이어스의 원곡보다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의 파워풀한 리메이크 버전이 더 유명하죠.
국내 가수 중에서 가장 완벽한 악동 이미지를 갖고 있는 디제이 DOC가 1996년에 발표한 '여름이야기' 역시 지오디의 '관찰'처럼 두 곡을 사용합니다. 첫 부분의 음산한 기타 연주는 버글스의 왕초였던 트레버 혼(Trevor Horn)이 결성한 아트 오브 노이즈(Art Of Noise)의 'Peter Gunn'의 인트로이고 '흠마 흠마 흠마 흠마에'로 유명한 훅 부분은 네덜란드에서 결성된 혼성 듀엣 마우스 & 맥닐(Mouth & MacNeal)의 'Hello-A'의 멜로디입니다. 거장 헨리 맨시니(Henry Mancini)의 작품 'Peter Gunn'은 1950년대에 방송된 수사 드라마의 테마 곡인데요. 아트 오브 노이즈는 이 고전을 전자음이 지배하는 펑키(funky)한 곡으로 부활시켰구요. 마우스 & 맥닐의 'Hello-A'는 1970년대 장미화가 '봄이 오면'으로 번안해 불러 이미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던 노래입니다.
라이브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싸이가 2005년에 내놓은 '챔피언'은 우리나라에서 챔피언의 개념을 완전히 바꾼 곡입니다. 그는 노래에서 공부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라고 얘기하죠. 경쟁에 지치고 기성세대가 정해놓은 룰 안에서 실패가 두려운 젊은이들은 그가 정의한 '챔피언'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완벽하게 무장해제를 합니다. '챔피언'의 신시사이저 연주는 에디 머피가 주연한 영화 < 비벌리 힐스 컵 >에 삽입된 해롤드 폴터마이어(Harold Faltermeyer)의 연주곡 'Axel F'에서 따온 리프인데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도 3위까지 오른 'Axel F'는 에디 머피가 역을 맡은 주인공 형사 엑셀 폴리(Axel Foley)의 이름이죠. 그래서 영화에서 이 곡이 자주 흘러나왔습니다. 'Axel F'를 작곡하고 연주한 해롤드 폴터마이어는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연주자 겸 프로듀서로 1970년대에 유명한 작곡가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와 함께 유로댄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뮌헨 사운드'를 창조한 선구자 중 한 명입니다. '디스코의 여왕' 도나 서머(Donna Summer)의 대표곡 'Hot stuff'의 작곡자이기도 한 그는 < 비벌리 힐스 컵 >과 < 탑 건 >의 사운드트랙으로 2년 연속으로 그래미 트로피를 수상했답니다.
우리 노래들이 워낙 익숙하니까 샘플링한 원곡이 낯설어도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시죠? 다음 회에도 여러분들이 잘 아는 노래들이 과연 어떤 팝송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