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의 연주는 '아름다운 강산'이든 '미인'이든 '빗속의 여인'이든 그렇게 철저히 신중현의 느낌과 사고에서 나올 수 있는 지극히 필(feel) 적인 음악들인 것이다. 그래서 수십년이 흐른 이 시대에 불려지고, 사랑받고 있고 지금 들어도 예스럽거나 촌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다. 전 세계 명곡들이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는 것처럼...
신중현의 기타에 대해선 이 말 정도 외에 할 게 없다. 아니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의 연주를 분석하고 스케일과 주법을 논하는 것보다는 그 인물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더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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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장에서 쉴 새 없이 일하면서 생계를 책임지는 소년 가장이 되었고 이렇게 힘든 생계 속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기타였고,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명곡들의 느낌들은 아마도 불행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들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다르지만 전설적인 뮤지션들을 보면 명인, 명반, 명곡은 '가난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축복'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1957년 미8군 오디션을 보게 되는데, 예상 밖으로 단번에 합격을 하는 바람에 전자기타와 앰프를 가지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다행이 친구의 도움으로 악기를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본격적인 음악인생의 시작을 알렸다. 미8군에서의 신중현의 인기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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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록 밴드 '애드포(ADD4)'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 록 밴드는 대중들에게 낮선 모습이었고 아쉽게도 최초의 타이틀과 몇 장의 앨범만을 남기고 애드포는 1966년에 해체되고 만다. 하지만 다시 미8군무대로 복귀하고 새로운 밴드를 만들었을 무렵 박인수라는 가수가 그를 찾아온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뮤지션들이 그의 곡을 받기위해 줄을 서다시피 하게 된 것이 말해주듯 이미 그 실력은 음악계에 퍼진 상태였다. '신중현사단'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박인수뿐 아니라 김추자, 펄 시스터즈, 이정화, 김정미, 장현 등 수많은 연주자와 가수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신중현은 때로는 사이키델릭하고도 마초적인 음악으로, 때로 한국인의 한이 서려있는 감성으로 우리 땅에 '한국 록'의 양식을 확립했다.
격동의 세월을 지나온 대한민국, 그 격동의 대한민국의 음악 역사 속에 신중현이라는 천재 뮤지션이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 독재정치의 탄압과 너무 일찍 피어난 한 천재 뮤지션을 이해 못하는, 아니 이해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를 '대마초왕초'로 몰아 결국 갓 태어난 한국 록에 재를 뿌리는 폭력적 암흑 분위기 속에 신중현 음악의 질주는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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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만약 술자리를 비롯한 사석에서 록에 대해 떠들면서 신중현이 이름과 그 음악세계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사이비 소리를 듣기 딱 알맞다. 게다가 음악관계자가, 평론가가 그렇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실제로 내가 그런 상황에 더러 마주쳤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신중현이란 뮤지션에겐 늦은 감이 있지만 얼마 전 펜더 기타 회사로부터 펜더 기타를 증정 받게 된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받는 것이라고 하니 정말이지 더 위대한 분이란 생각이 든다. 몇 해 전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어서 걱정도 많이 됐었지만 여전히 새로움을 창조하고 목말라 하시면서 작업실서 오늘도 기타를 편애하고 계실 것이다.
이렇듯 음악을 사랑하고 끝없이 갈증을 느끼는 뮤지션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바로 이 땅 위에, 록에 관한 한 척박한 대한민국이라는 이 땅 위에 그런 존재가 있다.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또 한 시대를 같이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후배 뮤지션에게는 큰 영광인 것이다. 더 이상 그에게 바랄 것이 없다.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해주셨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게 있을 뿐이다.

대표작 : 1999년 윤도현 밴드 < 한국 록 다시 부르기 >
최근작 : 2009년 비갠 후 < City Lif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