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지망생들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김현식 같은 인물을 꿈꾸었고 작곡가들은 유재하가 되기를 열망했다. 대학생들은 김광석, 정태춘, 노찾사의 포크나 민중음악을 찾았다. 조용필은 여전히 '가왕'이었고 이선희는 여가수 대표였다. '트윈폴리오'와 나훈아의 앨범은 스테디셀러 품목으로 늘 레코드가게에 배치되어 구매자를 기다렸다. 모든 게 무난히 흘러가고 있었다.
차라리 그때 대중적 화제 측면에서 떠들썩했던 특기할 가수는 이 땅의 인물이 아니라 미국에서 온 아이돌 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이었다. 1992년 2월에 있었던 이들의 내한공연에서 수십 명이 다치고 급기야 한명의 학생이 깔려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지자 갑작스레 '청소년문화'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외국의 댄스그룹에 열광한 10대들에 대한 언론의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얼마 후 한 신문에서는 '뉴 키즈 참극 벌써 잊었나?'하는 개탄조의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하지만 '뉴 키즈 사태'에 몰매를 맞은 그 청소년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열혈과 집단 히스테리를 폭발시켜줄 새 아이콘을 맞았다.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뉴 키즈 사태' 정확히 한 달 후인 3월, 잠시 후 돌풍을 몰고 올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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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은 방금 전에 터뜨린 히트곡 '안녕'에서 랩을 시도했다. 다만 그게 영어였다는 점에서 과감함은 선을 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껄이듯 빠르게 토해내는 래핑은 미국에서는 대박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좀 거북하다는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우리말로 랩 하기는 방정맞은 거 아닌가?” “그건 미국 애들 얘기지!”
포크, 발라드, 록, 민중가요가 대세인 현실에서 우리말 랩에 대한 도전은 감행되지 않고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걸 했다. 누구보다 더 과감하고 용의주도한 서태지가.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단 한 곡으로 대중음악계 아니 사회 전체가 갓 나온 신인에게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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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 빠져가는 만큼 기성세대의 당혹감도 그에 비례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서태지의 음악은 전혀 청취 경험이 없는, 느닷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변화에의 적응 속도가 더딘 어른들은 정도의 차가 있었을 뿐 대체로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공유했다. “서태지가 나오고부터 가요를 안 들었어!” 세대의 갈등과 대결 구도가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가 에너지 공급원인 서태지는 불리할 게 없었다. 대중음악 바람과 시장의 주인은 청춘 아닌가. 1993년 '하여가'를 거쳐 1994년에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강력한 록으로 채색한 3집 앨범으로 또 한 차례 격변의 기치를 들어올린다. 2년 전 '난 알아요'가 음악적 광풍이었다면 이번에는 사회적 쓰나미였다.
'발해를 꿈꾸며', '교실이데아', '내 맘이야' 같은 현실적, 도발적, 저항적 메시지의 강한 노래는 교실은 물론 사회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매일아침 일곱 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됐어(됐어) 이젠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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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음악과 위상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서태지 20년이 알려주는 것은 아티스트의 실험과 도전이야말로 대중예술을, 때로는 사회를 새로운 지평으로 안내해주는 동력이라는 사실이다. 담대하게 덤벼야 바뀐다. 케이팝의 해외공략과 인디의 분발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음악계는 서태지의 키워드인 도발정신이 보이지 않는다.
없는 게 아니라 가려진 것이겠지만 그런 미디어와 관습이 낳은 불평등 못지않게 우리 음악계가 상업성과 인기에 묶여있다는 논리도 결코 허술하지만은 않다. 서태지가 필요하다는 말은 팬들에게는 재림의 바람이겠지만 음악계로서는 변화를 향한 타는 목마름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