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은 박정현에게 제2의 전성기를 선물한 동시에 대중적 사랑에 대한 책임감도 함께 부여해 버렸다. 소리든 비주얼이든 극적인 것이 환영받는 프로그램 성격상 그의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창법은 청중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과시를 위한 보컬보다는 노래의 맛을 살리는 보컬로 표현 영역을 넓혀 오던 그간의 방향과 나가수 무대의 간극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매주 색다른 모습과 장르적 변신을 거듭하며 대중의 갈증을 충족시켜 온 그였다. 이제 '새로움'마저도 오직 개인적인 목표만은 아닌 의미가 돼 버린 것이다.
8집은 자신이 걸어 나가던 길과 도중에 만난 나가수 사이의 충돌에서 얻은 고민의 산물이다. 앨범 작업이 방송 활동 때문에 중단됐다가 프로그램 종영 후 재개되었다 하니 전후 달라진 대중적 입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팬들의 결도 다양해졌고 여러 종류의 기대가 교차했을 것이며 대중이 원하는 음악과 자신이 하려던 음악 간의 괴리도 신경이 쓰였을 테다. 영민한 건 이 고민을 아예 '시차(Parallax)'라는 단어로 주제화했다는 점이다. 보는 위치에 따라 '나'라는 대상이 달리 보일 수 있음을 당연시하며, 간극에 놓인 자신의 현재를 음악으로 선포하고 앨범의 중심으로 끌어 들였다.
고민의 흔적은 타이틀을 리메이크곡으로 가져간 것에서도 묻어나지만, 앨범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이름에서도 읽힌다. 먼저, 정석원, 황성제, 강현민 등 기존 음악 파트너들과의 호흡을 이어 가며 지금까지 구축해 온 박정현식 음악 스타일을 멈춤 없이 다져 나간다. 정석원은 모던록 풍의 '도시전설'과 90년대식 발라드 'Song for me'같은, 풍부한 사운드와 함께 보컬의 다이내믹한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곡으로 앨범에 '확장성'을 부여하고, 황성제는 가장 대중적인 트랙이라 할 만한 '서두르지 마요'와 아름다운 서정성으로 내달리는 '그렇게 하면 돼'로 박정현표 발라드의 '전형성'을 잇는다.
시차가 형성되는 지점은 인디밴드들과의 협업이다. 못(MOT)의 이이언, 몽구스 멤버 몬구와의 작업은 마치 나가수 시절 색다른 무대를 연출하듯 실험적 경험을 안기며 앨범의 다양성을 견인한다.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몽롱함과 발랄함을 각각 발산하는 'You don't know me'와 'Raindrops'가 그 결과물인데, 뜻밖의 절묘한 어우러짐이 좋게 들리지만 이 시도가 박정현만의 감성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두 밴드의 스타일을 빌려 입은 시범적 수준에 그친다는 인상은 아쉽다. 특히 'You don't know me'의 경우 이이언의 음반에 박정현이 참여했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만큼 노래 분위기를 빈틈없이 압도하는 건 오히려 이이언이다.
앨범은 전체적으로 다채롭고도 차분하다. 박정현의 프로듀싱 앨범들은 색색깔의 구슬이 꿰어진 한 줄의 목걸이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따금씩 다양한 색의 부지런한 나열이 과잉적이고 산만한 분위기를 주기도 했다면, 이번 완성품은 프로듀서로서의 성장이 엿보일 만큼 안정적이다. 전곡이 지나치지 않는 기운과 개성을 고루 주고받으며 균형감 있게 자리 잡았다. 다채로움 속을 관통하는 묘한 질서가 정돈을 일구는데, 밴드를 바탕으로 건반과 스트링이 사운드를 이끄는 편곡 스타일을 전반적으로 유지하면서 앨범에 일관된 톤을 입힌 결과로 보인다. 멕시코 밴드 'Camila'의 히트곡 'Mientes'를 리메이크한 타이틀곡 '미안해'의 편곡이 대표적 예다.
보컬은 여전히 기교를 절제하고 '바람소리 속의 그대가'에서처럼 근래 앨범에서 계속적으로 보였던 의식적인 톤다운을 잃지 않지만, 자신만의 비장의 가창력을 굳이 죽이지도 않는다. 휘트니 휴스톤을 위한 헌정곡 'Song for me'는 90년대 음악에 대한 오마주인 만큼 당시의 창법과 편곡 스타일을 디테일하게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장엄한 오케스트레이션과 함께 구사되는 디바적 창법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곡이다.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를 작사한 박주연이 가사를 쓴 '그렇게 하면 돼'에서의 뮤지컬적 느낌을 살린 연출력도 근사하다. 앨범 한켠에 심어 둔, 자신에 대한 작은 고백인 창작곡 'Any other man'도 귀를 잡아끈다.
공을 들인 앨범이지만 그의 행보를 오래 지켜본 이들에게는 어쩌면 다소 평범하게 다가갈 수도 있겠다. 나가수를 통해 팬이 되었다면 또 남다를 것이다. 분명한 건, 저마다의 시점으로 박정현의 음악을 접한 이들에게 이번 신보가 서로 다른 가치로 닿는다면, 하여 자신만의 시차를 느끼게 된다면 앨범은 제 몫을 한 셈이라는 것. 현재의 자신을 음악 속에 가감 없이 집어넣고 노래로 솔직하게 투영해냄으로써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한 발짝 더 걸어 나갔다. 길게 뻗어 있는 앞으로의 음악 여정에서 박정현의 한 지점을 충분히 설명해 줄 앨범이다. 기분 좋은 고민이 의미 있는 궤적으로 남았다.
수록곡
1. 그렇게 하면 돼

2. 실감
3. 도시전설
4. 미안해
5. Raindrops
6. 서두르지 마요
7. 손해
8. Any other man

9. You don't know me
10. 바람소리 속에 그대가

11. Song for 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