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에픽 하이는 많은 사랑을 받는 뮤지션임에 틀림없다. 힙합이라는 베이스에 대중성을 가미해 들고 나오는 노래마다 이슈가 되고 주목을 받는다. 과거 힙합은 주로 남성 팬들의 지지를 받던 음악 장르였다면 최근에는 공연장을 가도 여성 팬들이 많이 보인다. 일반 대중들의 힙합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힙합에 관련된 프로그램도 제작되며 인기 있는 힙합 가수들도 예전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이런 힙합의 대중화를 이끄는데 에픽하이가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픽 하이의 시작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발매한 1집 < Map Of The Human Soul >은 화려한 피쳐링 진과 문학적인 가사로 힙합 매니아 층의 시선을 끌었지만 대중들에 파고들지는 못했다. 음악적 참여도를 높여 돌아온 2집 < High Society >에서는 첫 심의 당시 앨범 트랙 18곡 중 14곡이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기도 했으나 타이틀 곡 '평화의 날'로 에픽하이의 이름을 조금씩 알리며 대중들의 작은 집중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타블로의 예능 활동과 시트콤 출연이 더해져 그들의 인지도 상승에 보탬이 되었다. 그의 뛰어난 스펙과 재치 있는 언변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이는 에픽 하이의 노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에픽 하이를 소위 스타덤에 오르게 한 대표곡을 꼽으라면 단연 'FLY'일 것이다. 3집 앨범 < Swan Songs >에 수록된 이 곡을 통해 에픽하이는 꿈과 희망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다가와 예상치 못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시대 최고 인기의 동방신기를 제치고 공중파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K팝 음악 시장에서 주류가 아니었던 힙합 음악이 1위를 한 것은 놀라운 이변이었다.
대중들에게는 조금 거리가 있고 어렵게 느껴지는 힙합이라는 음악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대중성을 녹여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저 대중적이고 상업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냐는 힙합 매니아 층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앨범 전체를 들여다보고 수록곡을 하나씩 살펴보면 사실 그렇게 대중적이지만도 않다.
에픽 하이의 음악이 인정받고 사랑받는 이유 가운데 가사의 영향은 압도적이다. 가사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해주고 심지어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준다. 때로는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가사로 가슴을 뻥 뚫어주며 때로는 희망적이고 도전적인 이야기로 힘을 주었다. 우리를 깊은 고뇌에 빠지게 하는 철학적인 가사들, 한편으로 우리를 감상에 젖게 만드는 서정적 인문의 언어들. '시에 만취된 상태' 혹은 '서사적인 높음'이라는 에픽하이의 이름처럼 그들이 써내려가는 한편의 서사시는 나를 끝없는 삼매경으로 몰아갔다.
Epik High and Me
언제든 어디서든 에픽하이의 음악과 붙어살았던 같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무조건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 현실을 비관하다가도 이상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에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되찾았다. 화가 나고 눈물이 날 땐 나와 비슷한 감정의 음악을 들으며 위로받고 위안 삼았다. 다른 사람에겐 전혀 느낌이 없고 아무 의미 없는 곡이어도 나에겐 최고의 치료제였으며 안식처였다.
실패란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낙엽이 된 가엾은 그대여 / 두발로 뛰어가렴, 버팔로 같이 거친 인생의 풍파도 / 날카로운 창과 칼로 다진 수난도 / 자신감의 방패를 쥔 너의 두 팔로 막아내고 / 다시 태어나 인생의 투사로 / 눈물로 고개를 숙여버리기엔 / 너는 아직도 채 익지 않은 벼이기에 / 힘에 부칠 땐 기대감에 기대 / 미래는 기회란 생각이 참된 삶의 지혜 (중략) 오늘 내가 무너져도 I got tomorrow just follow / 그대로 고독의 포로가 되지 말고 / you know? you're king, a hero, no lie let you soul sing / 날개 펴고 높이 fly 높이 나는 새 만이 / 보다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으니 / 거침없이 날아가리...나는 가리 / 성공이란 먹이를 낚아 챌 때까지 / 매서운 매의 눈빛으로 나는 살아가리...
(풍파 - 1집 < Map Of The Human Soul > 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성공의 질서 / 숨 막혔던 학업에 지쳤던 영혼의 쉼터 / 그때부터 내 삶을 갱신했죠 / 가족을 눕혀버린 신이 때론 괘씸해도 / 세상이 친구를 뺏고 사랑이 배신해도 / 내 펜의 검은 눈물로 대신했고 / (중략) / 한숨은 쉬어도 내 꿈은 절대 쉬지 못해 / (중략) /
세지 못할 기억의 자산 속에서 / 베지 못할 실없는 자만 통해서 / 절대 그 누구도 꺾지 못할 / 나를 키워내며 부족함을 보탰어...
(Yesterday - 3집 < Swan Songs > 중에서)
참패를 맛보고 고개 숙여도 돼 / 죽도록 아픈 맘을 마지못해 죽어도 돼 / but the soul, 내 혼은 아무도 뺏지 못해 / (중략) / 혀 차는 소리와 그 어느 적과 / 대자연과 세상의 그 어느 벽과 / 총알조차 내 목소리 막을 수 없어 / 내 꿈을 절대로 눈 감을 수 없어 / I will never die / 세상이 나를 찢고 무너뜨려도 / 눈물을 삼키고 일어나 / I will never die / 세상과 부딪히고 쓰러뜨려도 / 내 피를 삼키고 일어나
(혼 - 4집 < Remapping The Human Soul > 중에서)
에픽하이의 음악은 주체적으로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배움의 시기에 둘도 없는 지침서였다. 음악을 통해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꿈을 찾는 법, 다른 사람들의 시선보다 나 자신을 믿는 법, 새로움에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는 법,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패기. 나는 그렇게 에픽하이 음악으로, 음악에 의해 성장했다.
힘든 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음악
노래 제목을 이어 만든 '선곡표', 영화 제목을 이어 만든 'Scenario(피해망상 pt.2)', 영화 속 악역의 이름을 모아 만든 '악당'에서도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선곡표'와 'Scenario(피해망상 pt.2)'에서는 각각 노래, 영화 제목으로만 문장을 만들고 글을 구성했다. '악당'에서는 영화 속 악역들의 캐릭터를 소개하며 나열했다. 평범함을 벗어난 참으로 기발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김동률) 사랑할수록(부활) 멀어져간 사람아(박상민) /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스윗소로우) 사랑해 그리고 생각해(김진표) / 너를 위해(임재범) 천일동안(이승환) 이별이 오지못하게(페이지) / 내 눈물 모아(서지원) 살다가(SG워너비) 사랑한 후에(신성우)...
(선곡표 - 4집 < Remapping The Human Soul > 중에서)
난 이 비열한 거리에 버려진 똥개 / 나쁜 놈 놈 놈들의 약속에 속은 것 / 내게 태양은 없다 이제 공공의 적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복수는 나의 것 / Livin' etes wide shul, 눈먼 자들의 도시 / dark night (dark knight)의 twilight / there's nowhere...
(Scenario(피해망상 pt.2) - 북 앨범 < 魂: Map The Soul > 중에서)
The world is mine. 욕심에 손이 모자라. 야심에 미치면 어때? I'm 토니 몬타나 /
오기로 의지를 부풀려. 두뇌를 쓰는 죄인. 박쥐같은 꿈들의 날개를 꺾는 베인 /
편견 속에 날 가두는 건 아닐 한 대처. 목소리로 두 귀를 삼키는 한니발 렉터 /
악당만 노리는 악당. 속이 메스꺼워. 음... 악조차 선 같게 보일 덱스터...
(악당 - 7집 < 99 > 중에서)
2012년, 3년 만에 에픽 하이가 돌아왔다. 새로운 소속사에서 선보인 음악들에 기존의 에픽 하이의 느낌이 아니라는 혹평도 있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에픽 하이의 이름으로 타블로, 투컷, 미쓰라가 하나가 되어 그들의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었다는 것. 그 자체가 소중하고 감사할 뿐이다. 그들은 분명 지금도 쉬지 않고 새로운 앨범을 위해 작업 중일 것이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음악의 영향이라고 생각해요.” 어디선가 했던 타블로의 말처럼, 그들은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음악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우리를 찾아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