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어둠의 자식들에서 비 피플로
'나는 소설이나 책에 관해서는 좆도 모르는 사람이다.'
중학교 시절 읽었던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의 첫 문구는 지금까지도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체제 전복적인 메시지로 다가왔죠. 어딘지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권위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소설 혹은 책의 첫 문구에 들어간 비속어는 그네들의 권위에 똥침을 박아 넣은 것처럼 충격적이면서 신선했습니다.
글이 왜 틀에 박힌 형식이나 권력이 작동하는 시스템의 요구(이를테면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글이 담으려는 내용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어둠의 자식들>은 그 첫 문장으로 알려주었습니다. 사창가 주변에서 쓰레기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따라서 비속어와 뒷골목 전문용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소설과 현실 속에서 미사여구는 오히려 죄악일 테지죠.
뭐라 지칭하는 용어가 없어 '비 피플'이라 이름붙인 새로운 종족들을 다루게 될 연재 글에 굳이 <어둠의 자식들>의 첫 문장을 떠올리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의 동철이가 그렇듯이 줄곧 주변과 변방으로 물러나 있던 그들이 이제 스멀스멀 좀비처럼 문화의 중심으로 기어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빛에 마취되지 않았고,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가부장제, 관료주의, 계급문화, 서열과 순위로 줄 세워지는 시스템이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뀌어가면서 비 피플들은 도처에서 약진하고 있죠. 수직이 만들어 놓은 전문가에 대적해서 그들은 애호가였고, 프로페셔널에 대적해 그들은 철저한 아마추어였으며, 그래서 오히려 수직적인 시스템이 양산한 체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할 수 있었던 겁니다.
비 피플은 A에 대항하는 B이면서 수동적인 피플에 대항하는 非 피플을 지칭합니다. 미디어의 변화가 만든 사고방식의 변화, 그로 인해 수직적인 체계에서 수평적인 체계로 바뀌면서 도래한 대중의 시대가 탄생시킨 새로운 종족들입니다. 저 스스로도 변방에서 시스템 속으로 뛰어든 비 피플의 한 명이고 특히 음악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족함에도 이 연재에 용기를 내는 이유는 바로 이 부족함이 때로는 강점으로 부상되는 비 피플들의 성취에 막연한 기대를 걸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자식들>의 첫 문장이 스스로의 부족함을 드러내지만 결국 수백 장에 이르는 글이 그 소설에 채워져 있듯이 말이죠.
본 연재에서는 부족하나마 음악,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대중문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비 피플들의 양상과 징후들을 하나씩 포착해봄으로써 새로운 대중의 시대가 그려낼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크레용팝|아마추어리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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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멧을 뒤집어쓰고 스커트 안에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고는 마치 개다리춤을 추는 듯한 우스꽝스런 동작으로 다리를 흔들어대는 이 외계종족을 보다 보면 60년대 이미 맥루한이 예견한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물론 크레용팝이 이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준 이들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 고 서영춘 선생님이 “시골열차 처음 타는 기차놀이다-” 같은 노래를 들려주었을 때부터, 서수남 하청일이 “삼천리 금수강산 너도나도 유람하세-” 하며 전국을 노래하다 “어휴- 구경 한 번 잘했네.”로 끝내던 '팔도유람'을 불렀을 때부터 이미 우리는 노래가 반드시 말끔하게 잘 빠진 기성품 같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90년대까지 줄곧 신화가 된 가수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후에는 기획사들에 의해 가수들의 신화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음악이란 아마추어들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성역으로 착각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본격화되고 누구나 쉽게 노래 한 곡쯤은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미디가 대중화되면서 이런 신화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음악은 전문가들의 손에서 대중들의 손으로 내려왔다.
이 변화의 징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은 <무한도전>이었다. 그것은 <무한도전>이 바로 이 전문가의 권위가 탈각되는 시대에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를 선언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그들의 선언은 그러나 대한민국 평균 이하인 그들이 최선을 다함으로써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봅슬레이, 프로레슬링, 모델, 카레이싱, 댄스스포츠 등등 다양한 전문가의 영역에 무모하게 뛰어들었고 성취와 상관없이 그 성역을 무너뜨리며 대중화의 시대를 열었다. 음악도 그 중 하나가 되었다. 매년 <무한도전> 가요제를 통해 내놓은 음원들은 이제 시장을 통해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프로들의 전유물처럼 착각시켜온 음악의 성역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크레용팝에게서 제2의 싸이가 보인다고 한 빌보드지의 관점은 큰 틀에서 보면 그다지 틀린 것이 아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상당 부분 <무한도전>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의 영향 하에 놓여져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당시 <무한도전>과의 인연은 '강남스타일'의 음악적인 스타일과 뮤직비디오가 가진 B급 정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니 크레용팝 이전에 국제가수가 된 싸이가 있었고, 국제가수로 성장한 싸이 이전에 <무한도전>이 만들어낸 공기 속에서 탄생한 형돈이와 대준이나 UV 같은 개가수들이 어떤 새로운 흐름의 징후를 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크레용팝은 그래서 그저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우연이 아니라 바로 이 아마추어리즘이 프로의 세계를 잠식해 들어오는 새로운 문화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결과로 볼 수 있을 게다.
이들 아마추어리즘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완성도가 아니라(물론 그렇다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의 정서다. 그런 점에서 싸이도 그랬듯이 크레용팝에게서 노래만큼 더 중요한 것이 어떤 정서의 스토리텔링을 보여주고 있는가이다. 크레용팝의 외모를 가리는 헬멧과 백수를 연상케 하는 트레이닝복, 그리고 춤인지 체조인지 아리송한 이른바 직렬5기통춤 같은 이미지적 요소들은 그래서 중요하다. 마치 스스로를 디스하면서 아이돌을 비웃는 듯한 이들의 이미지는 노골적으로 아마추어리즘을 지향해 보여준다.
아마추어리즘은 프로페셔널리즘과 팬덤이 거꾸로 움직인다. 프로페셔널리즘은 완벽한 완전체의 음악과 스타일이 팬들에게 위에서 아래로 전해지는 것으로 마치 부흥성회 같은 종교적인 열광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적어도 노래를 들고 팬들과 마주한 순간에는 범접할 수 없는 신화 속 인물이 된다. 하지만 아마추어리즘은 다르다. 그들은 불완전체로서 미숙함을 드러내는 음악과 스타일이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팬들에게 수평적으로 전해진다. 팬들은 그래서 자신들과 동등한 이들의 수용자에만 머물지 않고 좀 더 능동화된 팬덤을 보여준다. 패러디가 만들어지고, 이른바 지켜주고픈 팬심이 생겨나는 건 그 동질감을 바탕으로 한 아마추어리즘의 힘 덕분이다. 간단하게 말해 빈 구석이 많으니 팬들이 그 빈 구석을 채워주고픈 욕망이 커지는 것.
크레용팝에 쏟아지고 있는 일련의 논란들도 바로 이 아마추어리즘과 관련이 있다. 초반부터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 이른바 일베 논란은 이 아마추어리즘을 콘셉트로 내세운 아이돌 그룹이 프로의 세계로 점점 들어오면서 생겨나는 마찰이자 충돌이다. 이 심지어 매니지먼트까지 아마추어적인 면을 보이는 크레용팝의 소속사는 그래서 크레용팝이 이미 프로의 세계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광고가 폐지되는 상황을 통해 깨닫는 중이다. <무한도전>이 과거 대한민국 평균 이하에 있을 때는 그 도전의 진정성으로 뭐든 할 수 있었던 데 반해, 몇 년 후 그들이 더 이상 평균 이하가 아니라 최고의 위치에 서게 되자 일종의 정체성의 혼동을 겪은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크레용팝은 그것을 너무나 속성으로 겪고 있을 뿐이고, <무한도전>이 김태호 PD 같은 훌륭한 문제해결사를 갖고 있는 반면, 크레용팝은 여전히 아마추어적인 선장을 두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만일 크레용팝이 세계무대를 꿈꾼다면 그것은 싸이처럼 겉은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하되 그 안은 철저한 프로페셔널을 추구해야 가능할 것이다.
일본의 모모이로 클로버Z를 표절했다는 논란은 일베 논란의 과열양상이 낳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모모이로 클로버Z의 콘셉트는 좀 더 일본의 코스프레 취향이 강하게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레용팝에게서 어떤 일본 아이돌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건 표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반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어쨌든 좀 더 큰 그림으로 바라보면 일본의 모모이로 클로버Z 역시 이 미디어 변화가 만들어내는 아마추어리즘의 한 소산물로 보인다는 점이다. 크레용팝이 그러하듯이 노래를 잘한다고 할 수도 없고 춤을 잘 춘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가사가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가수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목하게 만드는. 즉 미디어 변화가 전 지구촌의 변화를 동시에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크레용팝 같은 비 피플의 등장은 더 많아질 거라는 점이다.
개인 미디어로 인해 모두가 전문가가 되는 시대에 더 이상 전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래서 생겨나는 폐해는 그 콘텐츠가 가진 창조적인 매력이 아니라, 자금력과 유통 같은 기득권이 대중예술 분야에서조차 어떤 헤게모니를 만들어 낸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기득권 바깥에 서 있는 힘없는 대중예술인들은 그들과 대적하는 새로운 힘으로써 아마추어리즘을 선택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아마추어리즘이란 정서적이고 메시지적인 것이지 어떤 콘텐츠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그런 얘기는 아니다.
크레용팝의 돌발적인 틈입은 그래서 그들의 콘텐츠가 가진 가치를 떠나서 그 도발 자체로 새로운 시대의 징후를 느끼게 만든다. 지금껏 시장에 덩어리로 뭉쳐져 그저 저 위에서 내려주는 것을 소비하기만 해왔던 대중들은 이제 콘텐츠에 점점 참여하려는 욕망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콘텐츠를 창작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팬덤으로써 참여해 이 빈 공간이 많은 창작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대중들은 그렇게 조금씩 대중들이 직접 참여하는 진정한 의미의 대중문화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비 피플들의 시대는 그렇게 조금씩 하지만 분명한 걸음으로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