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포함 아시아 국가 감독이 자국은 물론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 및 스태프들과 함께 만든 영화를 '아시아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고 느슨하게 규정해보자. 지난 11일 개봉된, 방은진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은 영화적 수준도 그렇고, 아시아 영화의 어떤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눈길을 끈다.
<집으로 가는 길>은 2004년 10월 30일 프랑스 오를리 국제공항에서 영문도 모른 채 마약 운반범으로 검거돼,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무려 756일 간이나 처음엔 프랑스 본토 감옥에 곧 이어 대서양 소재 프랑스 령 외딴 섬 마르티니크 교도소에 수감돼 있어야 했던 30대 한국인 주부의 실화를 극화한 영화다. 실화의 실제 주인공 이름은 장미정. 이른바 '장미정 사건'은 사건 발생 1년 몇 개월 뒤 KBS2 '추적 60분'을 통해 2006년 선보였고, 그 사건이 모티브가 돼 장미정을 송정연으로 바꾸고 때로는 실화에 충실하게 때로는 자유롭게 각색해 빚어졌다.
영화를 향한 호기심을 반감시키지 않기 위해, 구체적 스토리는 더 이상 상술하지 않으련다. 장미정 사건을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 실화성은 <집으로 가는 길>에 다가가기 위한 결정적 단서다. 영화가 함축하고 있는 일련의 시대성이 그로 인해 한층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당시 기사를 통해 실제 주인공의 사연을 접하게 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로 프랑스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끊이지 않았다”며 영화화 계기를 밝힌 감독은, “실제 인물들의 심경과 배경들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면서도 “무엇보다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어떻게 접목시켜서 표현해낼 것인지가 사건을 영화화함에 있어 가장 큰 과제였다”고 말하지 않는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영화를 통해 알기 전까지 나는 장미정 사건을 뚜렷이 인지하질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이 사건이, 1980년대까지의 군사 정권에서가 아니라 10년도 채 되지 않은, 2000년대 중반의 문민·참여정부 시절에 벌어졌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한때 '노문모' 회원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것은 당혹을 넘어 일대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 2003)이나 <남영동 1985>(정지영, 2012)의 그것들과는 또 다른 성격의, 보다 근본적인 그 무엇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별 반 다를 게 없는, 우리들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자화상에 대한 새삼스러운 각인이랄까.
<집으로 가는 길>은 그러나 그런 충격 등을 이용해 재미나 보려는, 얄팍한 선정주의적 부류의 영화는 아니다. 영화를 평하며 '선전선동'(Propaganda) 운운한다면, 해석의 자유를 넘어 난센스며 오독일 공산이 크다. 전도연(송정연 분)과 고수(남편 김종배 역)처럼 '잘 나가는' 스타 배우들이, <301 302>(박철수, 1995) 등에서의 '좋은 배우'를 넘어 주목할 만한 장편 데뷔작 <오로라 공주>(2005)를 비롯해 '소포모 징크스'를 보란 듯 날려버린 문제적 리메이크 수작 <용의자X>(2012) 등을 통해 감독으로서의 존재감을 굳건히 한 방은진 같은, 이 땅의 대표적 여성 감독이 뭐가 아쉬워 프로퍼갠더 용 영화에 헌신하겠는가. 영화를 싫어하거나 혹평을 하는 건 자유다. 하지만 그 이유에는 설득력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싫어함이나 악평은 인격적 모욕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건 영화가 못마땅한 이들도 원하진 않을 게 자명하다.
실화성은 <집으로 가는 길>의 출발점일 따름이다. 영화는 실화성을 넘어 보편성을 띤다. 어느 인터뷰에서 전도연도 역설했듯, 송정연 이야기는 “···그녀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개연성 있게 그린다. 영화의 토대가 된 장미정 사건은 물론, 세계적인 국제기구 중 하나로 “대부분 정치적으로 대의제, 경제적으로 자유시장 원칙을 받아들인 선진국들이 회원으로 참여한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OECD) 회원국이며 '한류의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수치스러운 비극이다. 때문에 영화는 사건 당시의 우리 정부를 향해 때론 코믹하게 때론 신랄하게 비판의 화살을 날린다. 더욱이 프랑스 재판관 등의 입을 통해 주불 한국 대사관, 즉 한국을 향한 비판을 내뱉기도 한다.
그 비판은 하지만 자·타칭 선진국 중 선진국으로 일컬어져 온 프랑스에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그들이 수감자의 인권을 위해 애쓰는 것은 자기 식의 원칙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수감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성폭력을 일삼는 이는 그 잘 난 선진국 프랑스의 여성 교도관이다. 그 교도관의 부당한 행위를 보고도 묵인하는 것도 프랑스 동료 교도관들이다. <집으로 가는 길>의 비극적 사건은 따라서 시대, 나라를 불문하고 언제 어디서건 벌어질 수 있다는 보편적 메시지를 전하는데 성공한다. 그 보편성 덕에 <집으로 가는 길>은 아시아 영화로서 어떤 가능성을 제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영화의 기획·제작·연출 의도 여부를 떠나.
<집으로 가는 길>을 관류하는 기조는 다름 아닌 절제다. 감독은 최루성 드라마로 흐르지 않으려고 애쓰고 또 애쓴다. 그럴 법한데도 감독은 주인공들의 억울함을 그들의 입을 통해 좀처럼 토로시키지 않는다. 영화 말미 한, 두 차례 주인공들이 분노를 터뜨릴 때조차도 절제를 완전히는 버리지는 않는다. 그 지독한 절제로 인해 영화를 보며 심심치 않게 눈가에 눈물을 머금긴 해도, 실컷 눈물을 흩뿌리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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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으뜸 미덕으로 평가되고 있는 전도연의 인물 해석 및 연기도 마찬가지다. 감독의 요청이 아니더라도 전도연 역시 절제적 연기를 견지한다. 사건 관련 다큐멘터리는 일찍이 봤으나 장미정 씨는 일부러 만나지 않으려 했다는 전도연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최대한 현실적으로 보이고 싶었다. 감정적으로 더 빠질 수 있는 상황도 객관적이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현실이 더 냉정할 때가 많다. 그래서 정연이라는 캐릭터를 냉정하게 대하려고 했다. '과연 수감된 그녀는 슬프고 힘들기만 했을까?' 싶더라. 적응하는 시기, 살아남기 위한 시기도 분명히 있었을 거다. 연기할 때 그런 작은 부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감독은 말할 것 없고 주연 배우의 의도는 100% 실현됐다. 위 인터뷰 기자의 말처럼, “특별한 체중감량과 분장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연의 모습은 점점 초췌해진다. 전도연의 볼 살이 쏙 들어가 다들 살을 뺐다고 착각했을 정도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전도연의 연기가 <너는 내 운명>(박진표, 2005)의 그것일 거라 예상했건만, 보고 나니 <밀양>(이창동, 2007)이어서 내심 놀란 데도 충분한 까닭이 있었던 셈이다.
상기 절제 및 객관성 덕분에 영화가 만약 어떤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 분노는 관객의 몫이다. 그 지점에서 영화는 여로 모로 비교 가능한 <도가니>(황동혁, 2011)에 연결된다. 비록 법 개정까지 가진 않겠으나 <집으로 가는 길>이 야기 시키는 분노는 <도가니>의 그것처럼 '좋은 분노'다. “아름다운 사회를 꿈꾼다면 분노하라”라고 『분노하라』(임희근 역|돌베개 |2011.06.07.) 등의 저서에서 (고) 스테판 에셀이 역설했던 바와 같을, 여느 프로퍼갠더와는 판이하게 다른 함의의 분노! 그 분노를 직접 목격해보지 않겠는가?
전찬일(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