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는 그간 이어져오던 흐름이 각각 정점을 맞은 시기라고 보입니다. 우선, 팝은 더욱 가파르게 하향세를 타며 심한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질 좋은 오리지널 앨범은 사라지고 대신 당장의 성과를 위해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나 베스트 작품에 집중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지요. 크리스 하트(Chris Heart)의 < Heart Song >, 메이 제이(May. J)의 < Summer Ballad Covers > 등의 커버 작품을 비롯해 오리콘 상위에 있는 작품들은 모두 비즈(B'z), 펑키 몽키 베이비(Funky Monkey Babys), 슈퍼플라이(Superfly), 니시노 카나(西野 カナ)의 베스트 앨범이라는 점을 보면, 일본 역시 아이튠즈와 레코쵸크를 위시한 개별 음원 시장으로의 진입을 본격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쪽은 확실히 록 신이었습니다. 전부터 기대주로 주목받아왔던 밴드들이 완벽하게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간만에 내수를 벗어난 타국의 러브콜도 쇄도하며 엄청난 활기를 띄었습니다. 원 오크 록(One Ok Rock), 사카낙션(サカナクション), 세카이 노 오와리(SEKAI NO OWARI), 맨 위드 어 미션(Man with a Mission)은 10만장 밴드로 진입하며 신진 4대 밴드로 그 위상을 굳혔고, 여기에 맥시멈 더 호르몬(Maximum the Hormone)이 6년 만에 컴백하며 2013년 유일하게 3주 연속 위클리 1위를 차지하는 등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 래드윔프스(RADWIMPS)와 범프 오브 치킨(Bump of Chicken) 등의 슈퍼스타와 카나분(KANA-BOON)이나 크리프하이프(クリープハイプ ) 등 신진 세력 역시 고르게 좋은 반응을 보이며 이 불씨에 기름을 들이 부었네요. 아직 일부 뮤지션을 제외하면 국지적인 인지도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이 기세라면 조금 더 많은 대중을 록으로 포섭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확실히 엿보인 한해였습니다.
아이돌 시장은 여전히 아라시(嵐)와 에이케이비(AKB) 사단의 쌍끌이였지요. 다만 오오시마 유코(大島 優子)의 졸업발표로 본격적인 세대교체시기를 맞은 에이케이비 그룹이 슬슬 그 생명력을 빠르게 소진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기도 합니다. 그나마 그룹 입장에서 다행스러웠던 것은 '恋するフォーチュンクッキー(사랑하는 포츈쿠키)'가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Heavy Rotation)'의 뒤를 잇는 전국구 히트곡이 되었다는 것이겠죠. 2인자인 모모이로 클로버Z(ももいろクローバーZ)가 6만명 규모의 닛산 스타디움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며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가운데, 작년 한해 주목할 만한 팀은 아무래도 베이비메탈(BABYMETAL)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사쿠라학원(さくら学院)의 유닛으로 파생되어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섬머소닉, 록 인 재팬 등의 페스티벌에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무대형 아이돌로 급부상했습니다.
그 밖에 잠시 주춤해있던 모닝구 무스메(モーニング娘)를 비롯한 하로프로 계열 팀들이 아이돌 시장 부흥과 함께 상승세를 타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엑자일(Exile) 산하의 이-걸스(E-girls)가 'ごめんなさいのKissing You(미안해요의 Kissing you)'를 히트시키며 신인으로서는 가장 얼굴을 알린 팀이 되었습니다. 또한 록 페스티벌에서 록과 아이돌의 전면적인 협력이 더욱 가속도를 내기도 했습니다. 前AKB48 멤버 마에다 아츠코(前田 敦子)가 < Countdown Japan 13-14 >에 출연했다는 사실은 이제 마이너가 아닌 메이저 아이돌 역시 록 페스티벌의 섭외 대상임을 명확히 했고, 설 무대가 많아지며 각기 콘셉트를 달리한 퍼포먼스형 아이돌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 흐름에 대한 반증이겠지요. 이런한 것들이 2013년 한해 아이돌 신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만한 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위와 같은 경향 때문인지 확실히 좋게 들은 음반 중 록의 지분이 상당한 한 해였습니다. 그래서 고심한 결과 이번 결산은 총 2회로 구분해, 이번 주는 일본음악 신 전체를 통틀어 선별한 올해의 앨범을, 그리고 다음 주에는 올해의 록 앨범 및 인상 깊게 들었던 싱글 들에 대한 한줄평, 2014년의 유망주를 소개하는 시간으로 웹페이지를 채워보려고 합니다. 아, 그리고 일본음악 결산만큼은 이즘 전체가 아닌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파트이기 때문에, 개인의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항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 앨범이 최고다!'라기 보다는 '좋은 앨범을 소개하고 함께 듣고 싶다'는 마음이 우선시되는 코너이므로,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새로운 일본음악들을 많이 알아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면 2013년 제이팝 결산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순서는 무순)
원 오크 록(One Ok Rock) < 人生×僕=(인생을 걸고 나는) >
캬리파뮤파뮤(きゃりーぱみゅぱみゅ) < なんだこれくしょうん(뭐야 Collection) >
케라케라(ケラケラ) < ケラケライフ(케라케라이프) >
사실 냉정히 말해 이키모노가카리(いきものがかり)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포크록 스타일의 팀이긴 합니다. 홍일점 보컬에 남자멤버 둘이라는 점도 같고요. 하지만 좀 더 록적인 운영의 편곡, 진중함과 발랄함을 오가는 멤버 메메(Meme)의 목소리가 제가 좋아하던 이키모노가카리의 2집 시절, 특히 '夏空グラフィティ(여름하늘 그래피티)'를 떠오르게 해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직계선배의 최신작 < I >보다 이쪽이 훨씬 신선하고 좋게 들려왔습니다. 베스트 트랙으로 꼽고 싶은 청명한 첫사랑의 색깔을 설렘 가득 표현한 '虹色ハートビート(무지개색 하트비트)'(앞서 이야기한 여름하늘 그래피티의 오마쥬 같기도 하네요), 오사카 출신이라는 점을 이용해 타코야키를 주제로 만든 재미있는 푸드 송 'たこ焼きソング~大阪で生まれたからって~(타코야키송~오사카에서 태어났으니까)' 등을 통해 이들의 매력에 흠뻑 빠져 보시길 바랍니다.
코미나미 야스하(小南 泰葉) < キメラ(키메라) >
제일 본인답지 않은 스타일로 맨얼굴의 자신을 드러낸 타이틀 'やさしい嘘(상냥한 거짓말)'을 필두로, 특유의 음색이 다변하는 편곡과 맞물려 매력을 발산하는 'パロディス', 건반의 터치감이 그만의 그루브한 세계를 만들어주는 'Soupy world'까지. 본인으로서는 10대에 음악을 시작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 뒤 다시 돌아와 몇 개의 EP 이후 내놓는, 근 데뷔 10년만의 첫 정규앨범입니다. 먼 길을 돌고 돌아온 만큼, 성취감 보다는 '겨우 잘 정리해서 냈구나'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는 그.(성격 자체가 워낙 어질러놓고 수습을 못하는 스타일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던 기억이 나네요,) 이 한 장에 담겨 있는 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닌 강산이 한 번 바뀔 동안 느낀 슬픔과 절망,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 뒤섞여 있는 거대한 삶의 캔버스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카낙션(サカナクション) < Sakanaction >
이처럼 커리어 초반부터 일렉트로니카의 접목으로 독자적인 길을 종용했던 야마구치 이치로의 야망은 그런 음악은 절대 뜰 수 없을 거라던 주위의 수군거림을 차근차근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아 평단의 박수와 사람들의 지지를 최고치로 끌어올렸습니다. 오밀조밀한 비트로 밀어붙이는 'Inori'와 공간감 있는 신스 음이 전반을 지배하는 와중에 후반부에 절정을 이루는 후렴이 완성도 있게 배열된 사카나식 EDM 'ミュージック(Music)' 등이 사카낙션표 음악의 스탠다드를 보여줍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이제야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완성시킨, 단언컨대 밴드가 내놓은 작품 중 최고작으로 손꼽을 만합니다.
소녀시대(Girl's Generation) < Love & Peace >
하나 덧붙이자면, 태연을 메인으로 내세우는 국내와 달리 제시카와 티파니 투톱 체제로 가는 듯한 보컬 운용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역시 좀 장르상으로 어울리는 목소리를 찾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소녀시대의 일본 노래들에게서 태연의 목소리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류의 거품이 빠져버린 위기상황을 퀄리티 자체로 극복해내며 동시에 팬덤까지 지켜낸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사실 꼭 '여기서까지 SM앨범을 뽑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뭐 좋은 음반인 것을 어떡하겠습니까.
맥시멈 더 호르몬(Maximum the Hormone) < 予襲復讐(예습복수) >
딱히 레퍼런스를 잡을 수 없는 펑크와 메탈 중심의 믹스쳐 사운드, 그로울링과 샤우팅을 오고 가면서도 그 안에 빼곡이 들어차있는 대중적인 멜로디, 무엇보다도 멤버 맥시멈 더 료쿤이 풀어 놓는 노골적이고 적나라하면서도 솔직한 '중2' 시절의 파편 하나하나는 그야말로 '대작'의 스멜을 솔솔 풍겨옵니다. 여기에 앨범 재킷은 해설과 만화가 덧붙여진 약 150P의 부클릿으로 이루어져 있어 소장욕구 또한 샘솟게 하더군요. 전작에 비해 다양성이나 규모면에서 훨씬 방대한 모습을 보이는 메가톤급 작품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팀이 환영받을 수 있는 나라라니, 이럴 때는 확실히 열도의 신이 살짝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킨키 키즈(Kinki Kids) < L Album >
이 뿐 아니라 타마키 코지, 카메다 세이지, 마츠이 고로, 오쿠다 타미오 등 연륜 있는 뮤지션 등이 총출동하며 2CD로 이루어진 앨범의 음악적 근간을 탄탄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도모토 코이치, 도모토 츠요시 두 사람은 여러 솔로 작품을 통해 이미 아티스트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에 가 있긴 하죠. 쟈니즈도 그 점을 인정했는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오랜 시간 울려 퍼질 보편성 가득한 음악집을 만들어 내는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네요.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의 지향점이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팬들에 대한 배려라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특히나 기분 좋게 감상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 Summer Snow >를 보며 '요~ 타이요오노 시타데~' 할 때가 엊그저께 같은데 말이에요.
래드윔프스(RADWIMPS) < Xと○と罪と(X와 O와 죄와) >
평소 무신론자로서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냄과 동시에 전작의 수록곡 'DADA'와 'G行爲'의 접점을 잡아낸 하이브리드 스타일의 '実況中継(실황중계)',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사과나무를 심는 대신 내일 모레 시작될 세상을 위해 모든 걸 글로 남겨 놓겠다는 내용이 인상적인 'アイアンバイブル(Iron Bible)', 16비트의 피킹으로 비이성적인 세상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会心の一撃(회심의 일격)' 등 '믿고 듣는' 팀으로 어느덧 자리를 굳혔네요. 더군다나 5월에 내한까지 잡혀 있으니, 그때까지는 즐겨 들어야겠습니다. 그래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아요.
호시노 겐(星野 源) < Stranger >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다가가고자 한 의도가 러닝타임 전체에 걸쳐 있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맞춤복을 입은 듯 모자라지도 않게, 지나치지도 않게 적적히 마음을 울립니다. 이전에 비해 좀 더 활력을 갖춘 밴드 사운드, 좀 더 잘 들리는 멜로디로의 움직임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그의 또 다른 모습을 체감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피아노와 스트링, 16비트의 드럼이 퇴근 후의 고요하고도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ワークソング(Work song)', 절제된 기타의 울림이 마음 속 한 켠에 쌓아두었던 추억을 꺼내보게 하는 'フィルム(Film)'도 추천곡이지만, 역시 절정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는 듯한 절창이 가슴을 찌르는 '知らない(모르겠어)'입니다. 영상이 소리를 압도하는 시대에 어떤 시각적 자극 없이 온기를 무사배달하는 호시노 겐, 어느 작품과도 비교 불가한 2013년의 목소리입니다.
카리스마닷컴(Charisma.com) < アイ アイ シンドローム(Ai Ai Syndrome) >
리드곡으로 자리잡은 'Hate'에 일괄적으로 이들의 지향점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둔탁한 비트에 얹혀지는 심플한 신스 라인, 무엇보다 제법 괜찮은 플로우를 보여주는 MC 이츠카의 랩이 지금 이 글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더욱 템포를 올리고 EDM의 소스를 적극 활용한 'George', 드래곤 애쉬(Dragon Ash)나 립 슬라임(Rip Slyme), 엠플로(M-flo) 등이 보여주었던 힙합튠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Lifefull' 등 양쪽이 접합 점을 잘 찾아내 구현해냈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제가 이들을 처음 접할 때만 해도 전업 뮤지션은 아니었던 듯싶은데, 이 정도면 적을 옮기고 좀 더 활발한 활동을 해줘도 좋지 않을까 싶네요.
사이토 카즈요시(斉藤 和義) < 斉藤(Saito) >
블루스를 가미해 자신만의 색채를 발현한 'Hello! everybody!', 피아노 세션으로 한층 풍성한 질감을 선사하는 'One more time', 한겨울에 어울리는 따뜻한 발라드트랙 'かげろう(아지랑이)' 등을 대표곡으로 꼽을 수 있겠네요. 오랜 기간 커리어를 이어 오면서도 여전히 기존의 팬들과 새로운 대중들을 동시에 포섭하는 음악적 능력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꾸준함에 대한 자축 세레모니이자 오랜 지지에 대해 건네는 감사의 선물,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의미 있는 기념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