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은 담담히 인생을 노래하는 가수였다. 여느 가수들처럼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았다. 통기타 한 대, 하모니카 하나만 달랑 메고서 무대에 올랐고 사람들의 가슴속에 저마다 추억을 새겨주었다. 또한 그는 히트곡이 많은 가수가 아니었다. 대신 무수히 많은 '김광석의 노래' 들이 존재했을 뿐이다. '이등병의 편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처럼 다른 사람의 곡을 부르기도 했지만, 그것은 사람들 속에서 이내 김광석의 노래가 되었다. 김광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슴속에 자신의 '김광석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 간직한다.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 방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 3집 >(1992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밤새 그리워하다 뜬 눈으로 새벽을 맞이할 때, 뿌옇게 서린 창문에다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보고는 이내 지워버리는 그 마음. 쓸쓸히 읊조리듯 이별을 노래하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는 잘 알려진 곡은 아니지만 김광석의 이별 노래 리스트 중 단연 으뜸인 곡이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 다시 부르기2 >(1995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부부의 이별을 노래하는 곡으로 이 노래 역시 많은 사람들이 베스트로 꼽는 곡 중에 하나이다. 김목경의 원곡으로 김광석이 다시 불렀고 그의 노래로 더 잘 알려졌다. 평생을 함께 했던 인생의 동반자를 떠나보내는 슬픔은 김광석의 목소리를 타고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촉촉이 젖어 든다. 나이가 많든 적든 모두가 공감하고 가슴아파할 수 있게 만드는 힘 역시 김광석의 노래가 가진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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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의 노래를 접한 것은 13년쯤 전이다. 영화 < 공동경비구역 JSA >를 보고서 영화 속에서 울러 퍼지는 그의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날 저녁 김광석 <다시 부르기1> 앨범이 내 손에 들려져 있었고 그 이후 나는 김광석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버렸다.
무엇이 그렇게 그를 좋아하게 만들었는지 확실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혹자는 말한다. 김광석의 목소리에는 우리 인생의 쓴맛과 단맛이 모두 들어 있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김광석의 노래의 가장 큰 힘은 그의 진실성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그는 항상 진심을 담아 노래하는 가수였다. 그렇기에 그가 부르는 노래는 우리의 독백이 되고 가슴 깊이 간직한 이야기가 되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곧 우리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마음속의 편지이다.
이처럼 김광석의 노래는 우리의 인생 곳곳에서 조용한 위안을 준다. 입대를 앞둔 20대의 청춘들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라며 위로해주는 '이등병의 편지', 자신이 가진 것들이 하나 둘 씩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서른을 앞둔 청춘들을 위한 '서른 즈음에', 황혼의 이별을 노래하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등은 우리의 인생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삶의 어느 순간에 문득 곁으로 다가와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김광석은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와 동물원 시절을 거쳐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1989년 '김광석 1집'을 시작으로 1995년 '다시 부르기2' 까지 모두 6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대중가수 김광석의 시작은 2집(1991년) '사랑했지만'의 히트로 일컬어진다. 그리고 3집(1992년)에 수록된 '나의 노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를 점령하고 있을 당시에도 지속적으로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며 사람들에게 김광석 이라는 이름을 각인 시켰다.
3집 이후 1년 뒤 발표한 <다시 부르기1>(1993년) 은 우리가 알고 있는 김광석 음악의 시작을 엿볼 수 있는 앨범이다. 이 앨범에서 그의 목소리는 더욱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전까지는 가창력을 앞세워 곡에 맞춰 노래를 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에 곡을 녹이고 풀어내어 노래를 하는 김광석이 되었다. 그래서 이 앨범은 이전의 곡들을 다시 부른 리메이크 앨범이었지만 누구누구의 곡이라는 수식어를 지우고 단지 김광석의 노래라는 이름만 남기는데 성공한다.
잘 알려진 곡 중 하나인 '사랑했지만'은 <2집>과 <다시 부르기1>에 각각 실려 있다. 두 곡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음정이 낮아졌다는 것이다.(기존의 D키에서 C키로 한음을 낮추었다) 고음위주의 가창력을 통해 노래를 하던 이전과 달리 <다시 부르기1> 에서는 감정을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음역 대를 선택하여 목소리에 힘을 빼고 노래한다. 이를 통해 한동준 작곡의 '사랑했지만' 이라는 곡은 곧 김광석의 '사랑했지만' 으로 완성된다. 이후에 발표하는 '김광석 네 번째'(1994년), '다시 부르기2'(1995년)는 완전한 자신만의 스타일 정립과 함께 한국 포크의 계보를 잇는 앨범이라는 극찬을 받는다. 한국 대중가요 명반을 선정하는 작업에도 두 앨범은 빠지지 않을 만큼 빼어난 수작이다.
서서히 꽃을 피워가며 정점에 이르렀던 김광석이기에 96년 사망까지의 짧은 활동 기간은 더욱 아쉬움을 준다. 정점에서 멈추어버렸기에 우리는 더욱 더 그를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 김광석이 보고 싶다. 김광석이 듣고 싶다. 가끔씩은 헛된 상상도 해본다. 그가 돌아와 준다면, 혹은 내가 조금 더 일찍 그를 알았더라면 그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17년 이라는 세월이 지나간다. 그의 목소리와 노래 앞에서 지난 세월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의 노래는 이 세상의 모든 노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곁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