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해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할 수는 없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보고도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한다. 맞다. 우리는 서로 다른 취향을 지니고 있다. 세상의 누구도 완벽하게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할로우 잰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 밖의 좋아하는 음악을 꼽으라면 분명히 서로 다를 것이다. 음악을 많이 듣는 대중음악평론가들조차 서로 좋아하는 음악이 달라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을 위한 투표를 하면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취향 때문일까? 우리는 취향의 필연적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취향이라는 것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할로우 잰을 좋아하는 것이 취향이라면 그 취향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할로우 잰을 좋아하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할로우 잰을 좋아하는 취향을 타고 난 것일까? 그럴 리 없다. 특정한 성격의 사람이 특정한 음악을 더 좋아하거나 덜 좋아할 수는 있지만 그 역시 천차만별이다. 록 음악을 좋아한다고 다 성격이 거친 것도 아니고, 일렉트로닉 음악을 좋아한다고 다 춤추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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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누군가는 할로우 잰을 좋아하고 또 누군가는 할로우 잰을 싫어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취향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각자의 취향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사실 각자의 취향이 계발되거나 확대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듣는 음악을 생각해보자. 국악, 록, 블루스, 알앤비, 일렉트로니카, 재즈, 클래식, 포크, 힙합을 비롯한 음악 장르를 다양하게 들으면서 성장하는 사람, 그래서 음악에 대해 폭넓은 감식안을 갖게 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다양한 음악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창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 국민이 모든 장르의 음악을 다 좋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악은 세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성별에 따라, 정치적 이념에 따라 서로 다른 기호, 다른 취향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의 많은 이들처럼 좁은 기호만을 자신의 취향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할로우 잰의 음악에 이를 수 있는 길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할로우 잰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다양한 록 음악을 자연스럽게 건너 건너 가면서 할로우 잰에 이를 수 있는 길 말이다. 기본적으로 음악을 폭넓게 들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에서 음악은 어렸을 때나 감수성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 청소년기 이후에는 대학 가는데 별 도움되지 않는 과목이다. 그래서 실용음악과나 음대에 가려는 이가 아니라면 음악을 듣는 것은 그냥 노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게다가 TV나 라디오, 인터넷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은 거의 당대의 주류 음악들뿐이다. 두세 장르의 음악이 인기 순위의 1위부터 100위까지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폭넓은 음악을 자연스럽게 찾아들으면서 다양한 취향을 갖게 되기는 쉽지 않다. 할로우 잰의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어도 할로우 잰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만, 만약 록 음악을 좀 더 자주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면 분명 할로우 잰의 팬은 지금보다는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록 음악을 쉽게 듣기는 쉽지 않다. 서울, 광주, 대구, 부산, 인천을 제외한 지역의 중소도시에서는 빅스타가 아닌 이들이 공연할 수 있는 시설조차 변변히 없다.
더 큰 문제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편안하게 음악을 들을 여유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음악을 듣는 것은 감성 교육을 위해서일뿐이다. 청소년이 되면 대학에 가야 하고, 대학에 간 다음에는 취직을 준비해야 하고, 취직을 한 다음에는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한 다음에는 아이를 낳아서 키워야 한다. 그 과정 하나 하나가 정말 쉽지 않다. 대학 등록금, 실업률, 결혼 자금, 주택 가격, 비정규직 비율, 정년 나이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한국인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전력질주를 해야 하는 삶이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달려도 안심하기 어려운 삶이다. 언제 어떻게 밀려날지 모르는 삶인 것이다. 그러니 음악을 폭넓게 들으면서 서로 다른 음악의 매력에 젖을 수 있는 여유를 만들기가 정말 쉽지 않다. 그런 여유를 가진 사람은 가정 형편이 여유롭거나 예술 쪽에 종사하는 이들, 혹은 아직 사회로 진출하지 않은 청년세대인 경우가 많다. 종종 TV에서 다른 장르의 음악을 갖다 바치듯 들려줄 때에서야 비로소 “아, 이런 음악이 있구나”, “이런 음악도 좋구나”라고 느끼는 것이 현대 한국인의 삶이다.
사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서로 다른 장르 음악마다의 서로 다른 매력을. 그리고 좋은 음악에 잠겼을 때의 감동과 위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그런데도 음악의 다채로운 빛깔과 감동을 누리지 못하고 한정된 취향만이 자신의 취향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재미를 다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이들이 다 음악팬이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자신의 취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조차 변변히 가져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한 사람이 다양한 음악을 들어가면서 자신의 취향이 할로우 잰에게 있는지, 김광석에게 있는지 확인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닌 것이다. 쉽게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도 있어야 비로소 다른 음악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취향을 넓힐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사람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사회 탓이 크다. 나라 탓이 크다. 세상이 달라지지 않으면 아마도 우리의 취향 역시 늘 그만그만 할 것이다. 하다못해 TV 프로그램들이라도 달라지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