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앞둔 많은 이들이 제일 먼저 커트 코베인을 떠올려보길 기대한다. 얼터너티브의 화신, 그런지로 세계를 강타했던 너바나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 메인 송라이터인 커트 코베인은 1994년 4월 5일, 시애틀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의 마지막에 대해 논란이 많은 것은 사망 경로가 불확실하기 때문. 엽총을 사용한 자살로 경찰 조사는 마무리 되었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타살을 주장하기도 한다. 사설 탐정 톰 그랜트가 내세운 증거들이 여기에 힘을 실었다. 스스로 방아쇠를 당길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투여된 헤로인 양과 '사망 장소의 출입구로는 안쪽에서 잠겨있던 문 하나만 있었다'는 경찰 측 주장과는 다른 또 다른 문의 존재, 유서에 남은 상이한 필체 등이 그가 제기한 단서들.
타살을 주장하는 이들보다 더 나아간 음모론자들은 홀의 원년 멤버이자 커트 코베인의 아내인 커트니 러브를 살해 배후로 지목했다. 혼인 후에도 끊이지 않았던 어지러운 남성 관계와 인세를 둘러싼 너바나 멤버들과의 갈등, 커트 코베인 사후 나타난 재산 이동, 모친으로서는 부적합한 양육 등의 행동들이 호사가들의 표적이 됐다.
다만 이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커트니 러브의 소행으로 사건을 두기에는 증거가 많이 부족하다.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이어온 정신적인 문제와 약물 중독, (커트니 러브가 주장한) 자살 기도 전력과 그 무렵 가진 음악에 대한 회의 등 커트 코베인의 정황을 생각했을 때 타살보다는 자살에 무게가 더욱 실린다. 시애틀의 조그만 인디 밴드로 시작해 마이클 잭슨을 누른 이 록의 전설은 그렇게 삶을 외면한 사람이 됐다.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보다 한 순간에 타오르는 게 더 낫다.' 유서가 된 상상 속의 친구 '부다'에게 보내는 편지의 말미엔 닐 영의 'Hey hey, my my'에서 발췌한 문구가 자리했다. 태어난 지 스물일곱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 그 다음 미스터리로 넘어가볼까. 대중들은 천재를 좋아한다. 그것도 수명이 박한 천재들을 더욱 좋아한다. 신화적인 존재의 삶은 그 어느 것보다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들의 죽음이 애도의 물결에서 끊이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죽은 커트 코베인은 스물일곱 살에 요절한 천재들의 모임, '27 클럽'의 존재를 스포트라이트 아래로 다시 끌어왔다. 대중음악 역사에 있어 27 클럽은 실로 유명하다. 오죽했으면 커트 코베인의 모친 웬디 오코너조차 “결국 그 바보 같은 클럽에 가입해버렸다. 하지 말라고 말했거늘”이라 술회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멤버들은 역시 3J.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다. 이들의 족적에 대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사료를 조금만 되짚어 봐도 행보가 쏟아져 나오는, 1960년대 사이키델릭 시대를 가장 밝게 빛낸 아티스트들이다. 셋의 생애를 알고 싶다면 이즘의 검색창을 적극 활용하길 권한다.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모두 스물일곱 살에 생을 마감했다. 수면제 과다 복용 후 구토 중 질식사로 지미 헨드릭스가 제일 먼저 눈을 감았으며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재니스 조플린이, 심장 마비로 짐 모리슨이 차례로 사망했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셋 모두 연령이 비슷했기에 몰년도 거의 비슷했다.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은 1970년에 숨을 거뒀으며 짐 모리슨은 1년 뒤인 1971년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다면 27 클럽의 시초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는 블루스 뮤지션인 로버트 존슨이다. 록 계에서 로버트 존슨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블루스의 장인이자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 그 자체라 불리는 인물이며 기타 영웅들의 영웅으로도 숱하게 꼽히는 이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기타리스트가 바로 에릭 클랩튼. 크림 시절서부터 연주해온 대표곡 'Crossroads'가 로버트 존슨의 원곡이고 2004년에는 그에게 바치는 < Me And Mr. Johnson >이라는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로버트 존슨은 일생이 곧 미스터리인 사람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히어로는 사실 기타에는 별 소질이 없었다. 전설적인 블루스맨 손 하우스는 하모니카에는 재능이 있었어도 기타에는 영 능력이 안 보였다고도 회고한다. 과연 어땠을지. 그럭저럭 괜찮은 하모니카 주자보다는 훌륭한 기타리스트가 되고자 했던 것 같다. 로버트 존슨은 살던 곳 미시시피의 로빈슨빌을 홀연히 떠난다. 신화는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만들어졌다. 재능 없던 기타리스트가 명 블루스 뮤지션이 돼 돌아온 것. 한순간의 일이었다. 로버트 존슨의 공백기에 우연히 같이했던 사람들은 그가 악마로부터 기타를 배웠다고 주장한다. 마치 파우스트가 악마와 거래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악마에게 사사하는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로버트 존슨은 순회활동을 가질 정도로 대단한 블루스맨으로 성장했다. 시카고, 텍사스, 뉴욕, 세인트 루이스 등에서 모습을 비췄으며 가는 곳마다 이름을 각인시켰다.
죽음도 확실치 않다. 일반적인 설에 로버트 존슨은 독살로 숨을 거뒀다. 당시 그와 관계를 가졌던 여성으로부터 받아 마신 술에 독이 들어있었다고 또 다른 블루스 전설 소니 보이 윌리엄스가 언급한 바 있다. 더불어 이 사건을 소니 보이 윌리엄스는 여성의 남편이 행한 일이라 추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주 독성 물질로 언급되는 스트리크닌은 술에 섞어 위장하기에는 향이 독특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도통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온 로버트 존슨은 1938년 8월 16일, 2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J와 이 세 명에 앞선 1969년에 세상을 뜬 롤링 스톤스의 브라이언 존스를 시작으로 27 클럽의 전설은 시작됐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 첫 머리에 기이한 삶을 산 로버트 존슨을 기록했다. 이후 스투지스의 원년 베이시스트 데이브 알렉산더,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에이미 와인하우스 등이 불운의 이력을 이었다.
배드핑거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 송라이터였던 피트 햄 역시 27 클럽의 멤버. 그러나 역사는 피트 햄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피트 햄이 목을 맨 8년 후,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뜬 베이시스트 톰 에반스까지 덧붙여 배드핑거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밴드로 추모한다. 배드핑거는 촉망받던 밴드였다. 그 기록도 남다르다. 'Come and get it'과 'No matter what', 'Day after day', 'Baby blue'와 같은 히트곡들을 내놓았으며 해리 닐슨, 머라이어 캐리가 차례로 리메이크한 'Without you'라는 불후의 명곡을 남기기도 했다.
이들에게 죄가 있었다면 전도유망한 재능을 비틀스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배드핑거로 밴드의 이름을 바꾸기 전인 아이비스 시절 팀은 비틀스가 설립한 레이블 애플 사(社)와 계약하는 쾌거를 누렸다. 비틀스와 교류도 적잖이 가졌다. 폴 매카트니는 밴드의 첫 히트 싱글 'Come and get it'의 원작자로, 데뷔 음반 < Magic Christian Music >의 프로듀서로 많은 힘을 보탰다. 여러 명곡과 훌륭한 팝 사운드를 낳으며 이들은 빛을 받았다. 문제는 그 너머에 있는 후광이 배드핑거의 빛보다 더 셌다는 점이다. '비틀스'라는 꼬리표가 이들을 늘 따라다녔다. 비틀스의 후예로 입소문을 탔으며 히트곡들을 선보인 뒤에도 넥스트 비틀스라는 그림자는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차트 기록에서의 압박도 더욱 크게 다가왔다. 특히 애플과 마찰을 일으킨 < Ass >와 워너 사(社)로 옮긴 뒤 발매한 < Badfinger >가 차례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여기에 금전적인 문제까지 마주하고 있던 피트 햄은 끝내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몰았다. 1975년 4월 개인 스튜디오에서 목을 맸다. 이후 배드핑거는 뿔뿔이 흩어져 개인 활동을 개시했다.
1977년 기타리스트 조이 몰란드와 톰 에반스가 가입한 새로운 밴드의 이름이 배드핑거가 되며 예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했으나 이 역시도 별 다른 소득을 내지 못했다. 이후 톰 에반스도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 미국 투어를 취소하며 500만 달러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이 들어왔으며 리메이크로 큰 인기를 끈 'Without you'의 인세를 놓고 옛 동료 조이 몰란드와 마이크 기빈스, 전 매니저 빌 콜린스 등과 다퉜다. 더욱 큰 아픔은 오랫동안 품고 지냈던 친구 피트 햄의 죽음에서 기인했다. 결국 톰 에반스는 자기와 함께 배드핑거의 이름을 널리 알렸던 피트 햄이 그랬던 것처럼 목을 매 박복한 인생을 마무리했다. 전화로 조이 몰란드와 싸웠던 다음 날인 1983년 11월 19일의 일이었다.
27 클럽과 배드핑거라는 한 밴드로 이야기를 큼직하게 끌어왔다면 이번에는 개인의 이야기다. 조이 디비전의 보컬, 이언 커티스의 죽음도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스물세 해 삶을 관통해 온 간질, 발작, 우울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음침한 가사, 무대 퍼포먼스를 생각해보면 그리 낯선 결과만은 아니다. 게다가 죽기 직전 아내 데보라 커티스와의 관계도 종말에 가까웠으니 자신을 향한 압박이 더욱 크게 느껴졌을 테다. 결국 1980년 5월 18일, 부엌에서 목을 맸다. 23세의 나이였다. 다만 당시 괜찮았던 밴드의 행보를 고려하자면 그 죽음이 쉽게만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전 해에 낸 데뷔 음반 < Unknown Pleasures >가 상당한 호평을 받아 성공을 짐작케 했으며 두 번째 정규 음반 < Closer >의 발매를 앞두고 있었고 첫 미국 진출도 목전에 둔 상태였다. 주변관계와 음악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하지 않았을까. 불안했던 이언 커티스의 삶이 곧 조이 디비전이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밴드 역시 바로 해체한다. 남은 멤버들이 숨을 고르고 결성한 새 그룹 뉴 오더의 첫 싱글은 이언 커티스의 마지막 무대에서 선보였던 'Ceremony'였다.
그러나 그 어떤 죽음도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기타리스트이자 작사가인 리치 제임스만큼 미스터리할 수는 없다. 당시 매스컴에 오르내렸던 그의 자해(그 유명한 4real 난도를 포함해)와 알코올 중독, 기행 등은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미국 프로모션 투어를 앞둔 1995년 초, 런던의 한 호텔에서 유유히 떠난 이후 19년 동안 실종된 상태로 남아있었으며 2008년 11월, '정황상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사망자 명단에 올랐다. 이에 대한 원인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통장 인출 내역과 발견된 그의 자동차는 그간의 행적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그러나 멤버들 그 누구 하나 그의 복귀를 의심하지 않았다. 열아홉 해 동안 둔 실종 상태의 이면에는 이들의 믿음이 있었다. 심지어 리치 제임스 시절에 낸 마지막 음반 < The Holy Bible > 이후 추가 멤버 영입 없이 3인조 체제로 디스코그래피를 이어갔다. 결국엔 고인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지만 그 어떤 명확한 증거 없이 기록된 리치 제임스의 죽음은 지금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경우가 하나 있다.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와 '독백'의 주인공 이원진의 이야기다. '시작되는 연인들을 위해'가 수록된 데뷔 음반 < Lee Won Jin >으로 1994년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듬해인 1995년에는 두 번째 음반 < Lee Won Jin 2 >를 발매해 이력을 이었다. 사건은 공부를 위해 찾은 미국에서 발생했다. 유학 2년차가 되던 1997년 돌연 사망 소식이 들려온 것. 사망일은 3월 2일, 나이는 27살이었다. 이원진에 사망에는 교통사고 설과 유체이탈 설, 피살 설 등 각종 의혹들이 뒤따랐다. 명상 후, 구토를 하던 도중 음식물에 질식해 사망했다는 사인이 부검결과로 전해졌으나 많은 이들의 머릿속엔 이 또한 불분명한 결과로 남아있다. 혹자는 교통사고로 알고 있으며 혹자는 유체이탈 도중 발생한 질식사로도 알고 있다. 이원진의 이름이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나며 현재는 이 미스터리도 많이 옅어졌다.
싱어송라이터 엘리엇 스미스는 자기 가슴을 두 차례나 찔러 목숨을 끊었다. 애인 제니퍼 치바와 싸우고 난 후의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자살 소식이었다. 그 무렵 보였던 엘리엇 스미스의 행보는 실로 건강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마약으로부터 벗어나려 각고의 노력을 했으며 선보일 음반 < From A Basement On The Hill >의 작업도 활발히 진행 중이었다. 그랬기에 부고는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주변 상황이나 자살 방식 등을 고려해보면 미스터리한 죽음이라 할 수 있으나 인생 전반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생각해보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성적학대 등 불우한 환경에 놓여있던 유년 시절서부터 엘리엇 스미스는 많은 고통을 받았다. 알코올 중독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했으며 인생의 말미에까지 약물이 놓여있었다. 여럿 방황을 하기도 했다. 이를 이겨내고 새로이 빛날 것 같았기에 그 죽음은 씁쓸했다. 2003년 8월 21일, 서른셋의 나이로 인생을 마감했다.
위 인물들이 의문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면 이번에는 의문스러운 삶을 산 사람의 이야기다. 대중음악계에 있어 시드 배릿은 가장 신비로운 인물로 손꼽히는 아티스트일 것이다. 물론 그 일련의 신화적 행보가 그가 오랫동안 싸워온 우울증과 정신 분열, 각종 후유증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결과이나 앞서 언급했듯 대중들은 천재를, 불우한 천재를 사랑하고 또 동경한다.
시드 배릿이라는 캐릭터에는 만들어진 요소가 분명 자리하고 있다. 길게 겪은 병력과 약물 복용, 짧은 음악 활동과 같은 비극적인 이력들이 성역을 더욱 열광적으로 끌어올렸으리라.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그 기저에 거대한 예술적 성과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원년 멤버로서 제대로 남긴 정규 앨범은 단 한 장, 1967년의 데뷔작 <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 뿐이지만 이 음반과 당시의 짧은 활동으로 시드 배릿은 핑크 플로이드를 반 이상 정의했다. 복잡다단한 고차원의 단계에서 우주적으로 뻗어가는 밴드의 예술성은 그가 자신을 온전히 쏟아 부은 결과물이었다. 게다가 집단적 낙관주의만을 노래했던 당시의 히피 문화와는 다른 세련된 사이키델리아를 구현하며 차별화된 그룹의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솔로 음반 < The Madcap Laughs >도 수준 높은 재능 없이는 나오지 못했을 작품이다.
상태 악화로 밴드에서 탈퇴, 솔로로서 몇 안 되는 결과물만을 발표한 뒤부터는 서서히 대중의 시선 밖으로 자취를 감췄다. 1972년 핑크 페어리 등에서 활동하던 드러머 트윙크 등과 함께 사이키델릭 밴드 스타스를 조직했으나 활동기간은 짧았다. 핑크 플로이드의 < Wish You Were Here > 제작이 한창일 1975년, 스튜디오에 등장한 시드 배릿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예의 멋진 외모는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삭발한 뚱뚱한 사람이 와있었다. 심지어 옛 동료들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밴드가 연주하던 곡은 그의 삶을 다룬 'Shine on you crazy diamond'였다.
솔로 활동 이후 음악 활동은 없었다. 1987년과 2004년 각각 발매된 존 필 세션 라이브와 라디오 원 세션 라이브는 모두 1970년과 1971년에 녹음된 것들이다. 이따금 파파라치 사진들이 공개돼 근황이 전해졌다. 2006년, 예순의 나이에 시드 배릿은 췌장암으로 작고했다. 한순간에 타오른 신비한 천재성 때문이었을까. 많은 아티스트들의 영향점에는 그가 항상 서있다. 음악을 같이했던 친구들은 이 남자의 생애로부터 < Dark Side Of The Moon >과 < Wish You Were Here >라는 걸작을 만들어냈고 데이비드 보위, 티렉스의 마크 볼란, 줄리안 코프 등이 그의 이미지를 이어가고자 했다. 사이키델리아를 추구하는 최근의 밴드들에게도 시드 배릿은 주요한 모티프가 된다. 초기 핑크 플로이드에 채무를 진 엠지엠티는 <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의 수록곡 'Lucifer Sam'을 커버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좀 다른 의미로 미스터리하게 이미지를 구축한 인물이다. 펑크 로커들에게 있어 섹스 피스톨스는 필수의 롤 모델이다. 쓰리 코드의 단순한 구성과 직선적인 연주, 날 선 가사와 “뭐가 됐든 다 망해라” 식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보자. 메인 송라이터는 전 베이시스트 글렌 매틀록이었다. 가장 앞에 나선 이는 보컬 조니 로튼(존 라이든)이었다. 사운드 메이킹에 공을 세운 사람은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였다. 그리고 가장 인기가 많았던 멤버는 시드 비셔스였다. 이번에는 시드 비셔스에 관한 이야기다.
어찌 보면 음악을 하기에는 가장 부적합한 사람이었다. 일단 연주에는 영 능력이 없었다. 녹음은 스티브 존스가 대신 베이스를 쳐줬고 공연은 간신히 했다고 한다. 악기를 가르쳐주려 했던 모터헤드의 레미 킬미스터가 먼저 손을 놨을 정도였으니. 이상하다. 왜 그리 인기가 많았을까. 뉴욕 돌스와 섹스 피스톨즈를 성공적으로 이끈 매니저 말콤 맥라렌은 시드 비셔스를 들어 '펑크의 애티튜드'라 칭했다. 팀 내 기행의 선두에는 늘 그가 있었다. 항상 술 아니면 약에 취해 무대에 올랐으며 걸핏하면 깨진 병으로 자기 몸을 그어댔다.
이 미스터리한 행동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애인 낸시 스펑겐의 죽음은 실로 기괴한 사건이었다. 뉴욕의 한 호텔 화장실에서 찔려 죽어있는 낸시 스펑겐을 발견했을 때 같이 방에 있던 시드 비셔스는 마약에 취한 채로 막 일어난 상태였다. 그러나 정황도 불분명했으며 조사 도중 보였던 애인에 대한 애정과 자살 기도와 같은 그의 태도에 당국은 보석금을 받고 돌려보냈다. 1979년 2월 1일, 잠시 수감됐던 시드 비셔스는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죽었다. 무혐의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약물을 과다 복용한 것.
섹스 피스톨스로 활동하던 1977년 6월, 영국 데일리 미러 지(紙)와의 인터뷰에서 시드 비셔스는 “25이 되기 전에 아마 죽을 것이다”고 말한 적 있다. 그리고 자살을 암시하는 메모에는 “가죽 자켓과 진, 부츠를 입힌 채로 묻어 달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에 반했다. 별 볼일 뮤지션이기 이전에 성격이 분명한 아티스트였다. 연주를 못하는 것은 관객들에게 그리 중요한 장해가 아니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곧 펑크였다. 스물한 해의 삶도, 예술의 반열에 오른 위치도 참 기이했다.
다음 미스터리는 도시 전설, 즉 괴담이다. 이 '썰'의 추종자들에 의하면 올 여름, 우리가 만날 뻔한 폴 매카트니는 가짜 폴이 된다. 1966년 폴 매카트니는 죽었다. 그 이래로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는 폴은 원래의 그와 아주 많이 닮은 사람. 1969년, 비틀스의 < Abbey Road >가 발매된 직후, 미국의 대학생들이 라디오와 잡지 등에 관련 근거를 첨부한 기사들을 올리며 세계 전역으로 확대됐다.
여기서 주장하는 몇 가지 근거와 정황을 소개해볼까 한다. 우선 폴 매카트니는 1966년 차량 추돌 사고로 사망했다. 이 교통사고를 다룬 노래가. 페퍼 상사의 마지막 트랙 'A day in the life'다. 1967년의 싱글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종료 직전에는 “내가 폴을 묻었다(I buried Paul)”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망론을 주장하는 다른 이는 < The Beatles (White Album) >의 수록곡 'Revoltuon 9'의 가사 'Turn me on, dead man'도 이를 입증한다고도 한다. < Abbey Road >가 나오면서부터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선 커버 아트부터. 폴 매카트니 혼자 맨발에 다른 발을 뻗고 눈을 감은 채 걷고 있다. 여기에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의 복장은 각각 장례식에서의 목사, 무덤파는 사람, 장의사를 연상시킨다. 이들 너머로 보이는 폴크스바겐 자동차의 표지판 'LMW 281f'는 “아내 린다 매카트니가 울고 있다 (Linda McCartney Weeps). 만약 폴이 살아있다면 28살 일 것이다(281f→28if→28 if).”의 준말이다. 이외에도 1966년 전후의 사진들끼리 비교해보면 얼굴, 머리 가르마, 신장 등이 달라졌다. 폴 매카트니의 사망 사실을 명시하지 않고 은유로 표현하는 데에 대해서 이 사람들은 비틀스가 설치한 의도적 장치라고 말한다.
어떤가. 믿을 수 있는가. 물론 비틀스 네 멤버와 주변 지인들은 거짓이라며 부인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 Abbey Road >가 등장했을 당시 폴 매카트니는 27살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LMW 281f'의 효력은 다수 무너진다. 곳곳에 허점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반론은 덧붙이지 않겠다. 곳곳에 허점이 존재한다고는 했지 모든 주장에 허점이 존재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 편이 이 특집에 더욱 잘 어울릴 테니까. 믿거나 말거나(2)
다른 주제로 비틀스 얘기를 더 해볼까 한다. < The Beatles (White Album) >에 수록된 'Helter skelter'를 거꾸로 돌리면 숨겨진 메시지가 나온다는 얘기가 한 때 돈 적이 있다. 내용은 악마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메탈 음악의 시초 격으로도 자주 언급되는 강렬한 사운드 때문에 더욱 그렇게 들렸을 테다. 일정한 문구를 배치해 거꾸로 녹음하는 방식을 백마스킹이라고 한다. 악마에 대한 내용을 전한 애쉬의 'Evil eye'나 반대로 재생해도 동일한 코러스 내용이 들리는 벡의 'Loser'처럼 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물론 많지만 백마스킹에 관한 이슈들은 대개 의혹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례가 하나 있지 않았나. 피가 모자란다는.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이 나왔을 무렵, '교실 이데아'의 “바라만 보고 있을까' 부분을 뒤로 돌리면 그렇게 들린다는 소문이 한반도를 강타한 적 있었다. 일찍이 밝혀진 대로 이는 괴담이다.
백마스킹을 사용한 국내 대표적인 사례로는 김현정의 '떠난 너'가 있다. 불법 다운로드가 가득하던 당시 음반 시장에 나와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만들었으니 잘못된 유통 경로를 거치지 말고 구매해서 음원을 들어 달라'는 내용을 노래 앞머리에 담은 것. 이를 거꾸로 녹음해 인트로를 장식하는 음향효과처럼 사용했다. 넬 역시 백마스킹을 종종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시작의 끝'의 경우 되돌려 들어도 동일한 선율이 등장하며 '기생충'은 숨겨진 가사를 확인해볼 수 있다. 외에도 많은 예시들이 있으니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미스터리 특집을 마무리할 마지막 이야기는 이승환의 다섯 번째 정규 음반 < Cycle >의 수록곡 '애원'의 뮤직비디오에 관한 것이다. 촬영 장소는 5호선 광나루 역. 지하철이 출발할 무렵 기관사와 함께 소복을 입은 여성이 찍힌 게 문제의 장면으로 크게 입소문을 탔다. 당시의 여론은 노이즈 마케팅을 의도한 일종의 조작이라는 분위기로 흘렀다. 여기에 이승환은 일체의 합성이나 연출이 들어가지 않았다 해명했지만 많은 매체가 달려들어 만든 분위기를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아웃사이더가 된 계기”였다고 그는 지금까지도 술회한다. 불편한 미스터리였다. 아티스트는 다음 앨범의 수록곡 '귀신소동'으로 불만을 표현하기도 했다.
한 때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다뤘던 SBS의 TV 프로그램 < 토요미스테리 >에서도 이 소동을 다룬 적 있다. 오래 전 광나루 역 인근에서 죽은 한 여인이 귀신일 것이라는 게 제작진이 내린 결론. 사실이라면 실로 섬뜩할 일이다. 2,3 분 간격으로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는 필자도 지금 왜 이 내용을 마지막에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빨리 글을 마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