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의 요지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Red hair heroin'을 지나 '빗물 고인 방'에 접어들면 본격적으로 그의 장기인 탱고를 펼쳐놓기 시작한다. 주제의식과 주선율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장르의 특성상 연주곡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이입이나 심상을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특히 'Chivalry'같은 경우 뚜렷한 기승전결과 각 악기들이 협주와 솔로를 반복하는 형식의 편곡으로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다만 길지 않은 각각의 수록곡들이 비슷한 반경에서 맴도는 것은 작품의 흠이다. 수록곡들이 모두 어떤 시각 매체의 배경음악처럼 느껴지곤 하는데 결국 음악 자체가 일종의 부가적인 기능에서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영감을 받은 소재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재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처음에 아무 배경지식 없이 신보를 접했다. 처음 들으면서 특별한 감상은 없었는데 고상지의 코멘트를 읽고 난 뒤 음악이 모두 그의 언급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의도를 곡에 잘 녹여낸 역량 덕분도 있겠지만 작가의 가이드가 너무 친절한 탓에 다른 판단의 여지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반도네온이 쉽게 만나기 힘든 악기인 덕분에 고상지라는 음악가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주목과 인지도를 쌓고 있었다. 예전 인터뷰에서 희소성 덕에 빨리 이름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배우면서 실력이 늘어가는 중임을 밝힌 적이 있었는데 이번 정규작이 그러한 일련의 단계들을 마무리하는 과정일거라 짐작해본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비인기 장르의 도약,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이라는 빛 좋은 수식어를 갖다 붙이기가 우스워졌다. < Maycgre 1.0>은 그만큼 연주자 고상지보다는 작곡가 고상지에, 장르보다는 모티프에 방점을 찍는다. 스스로의 취향을 드러냄으로써 쉽게 얻을 수 없는 범용성까지 손에 넣었다.
-수록곡-
1. 출격
2. Red hair heroin
3. 빗물 고인 방
4. Chivalry
5. Ataque
6. 홍제천의 그믐달
7. A los amantes
8. Envy
9. 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