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바야흐로 그런지와 브릿팝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너바나를 필두로 펄잼과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의 사대천왕을 거쳐 푸 파이터스, 스매싱 펌킨스 등이 얼터너티브의 후예를 자처했고, 여기에 펄프와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블러 등이 세기말 버전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일으키며 앞서가던 이들의 시야에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 가운데 여성은 없었다. 뷰욕이나 리즈 페어, 토리 에이모스 정도가 이러한 흐름에 반기를 들었지만, 그저 떠내려가지 않고 버틸 수 있음에 만족할 뿐이었다. 이러한 여성 뮤지션의 약세 속에 나타난 그는 앨범 한 장으로 일거에 다른 유수의 아티스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신성의 출현, 바로 앨라니스 모리셋과 그의 데뷔작 < Jagged Little Pill >의 이야기다.
작품이 가진 기록들은 슬쩍만 봐도 그 면면이 화려하다. 3300만장에 이르는 판매고와 제3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마이클 잭슨, 머라이어 캐리 등을 제치고 주요부문인 앨범 오브 더 이어 최연소 수상(현재 최연소 기록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 Fearless >가 가지고 있다.), 롤링 스톤지가 뽑은 < The 500 Greatest Album of The Year > 포함 등등. 갓 스물이 지난 한 여성 뮤지션이 해낸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성취다. 성적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은 채 써내려간 자기고백이 역으로 대중들에게 있어 실로 놀라운 공감대 형성을 이뤄낸 덕분이었다.
그의 작품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자신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 바빴던 다른 뮤지션들의 작품에 지친 이들은 현실적인 감정에 귀 기울이는 그의 목소리를 앞 다퉈 찾기 시작했고, 그렇게 앨라니스 열풍이 본격화되었다. 첫 싱글이었던 'You oughta know'를 보자. 헤어진 옛 연인에게 'Are you thinking of me when you fuck her'라 일갈하는 이 한 구절은 여느 강성의 남성 록 밴드들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통렬함을 담고 있었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플리와 데이브 나바로가 각각 베이스와 기타로 참여한 것이 이슈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여타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면, 그는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장 큰 차이였다.
친구나 이성, 가족과 자아를 극히 개인적인 시선에서 다루었음에도, 이를 대중들이 캐주얼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에는 잘 조율된 사운드와 멜로디의 공이 컸다. 자국인 캐나다에서 댄스 팝 가수로 활동하던 그가 프로듀서로서 글렌 발라드를 맞아들인 건 그래서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장르를 바꾼 것이 아닌, 표현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서 맞아들인 얼터너티브 록이 그를 개화시켰다. 러닝타임 전반에 걸쳐있는 활기찬 디스토션 소리가 그의 불안하고도 예민한 감정을 긍정적인 애티튜드로 재탄생시켰으며, 대중적인 선율 또한 각계각층의 대중을 불러 모으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메시지에 치우친 중량감을 음악 쪽으로 덜어내며 접근성을 높인 프로듀싱의 균형감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대표 레퍼토리인 'Ironic', 낙차 큰 멜로디로 혼란스러운 정서를 내비치는 'You learn'만 들어봐도 알 수 있듯, 그의 창법은 강함과 여림이 공존한다. 저음에서는 단단한 목소리로, 고음에서는 심하게 꺾이는 얇은 음색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의 섬세한 내면을 표출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샤키라, 핑크, 에이브릴 라빈을 필두로 우리나라에서는 체리필터의 조유진과 자우림의 김윤아, 일본으로 건너가면 시이나 링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냈다. 이는 그가 '결과물로서의 음악'에만 집착했다면 거둘 수 없었던 업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단순한 들을 거리에서 벗어나 '소리를 통한 정서적 일체감'이라는 측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당시의 다른 음악들과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명백해지는 사실이다.
삶의 희로애락을 설득력 있게 담아냈기에 이만한 호응이 가능했다. 발매 초반만 해도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이 작품은 순식간에 세대와 성별 뿐 아니라 국경 또한 초월하며 그의 전성기를 견인했다. 내면의 연약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이를 주체 못할 만큼의 희망과 기대감으로 환원시킨 앨라니스의 의지, 그것은 곧 우리가 가져야할 인생에서의 태도이기도 했다. 노래 속 메시지가 던지는 화두에 대해 잠시 고민하다가도 이내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것은, 결국 지금 겪고 있는 나의 아픔이 이 한 장에 담긴 음악과 같은 환희로 거듭나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갑작스레 불끈 쥐어지는 주먹은 덤이다.
- 수록곡 -
1. All I really want

2. You oughta know

3. Perfect
4. Hand in my pocket

5. Right through you
6. Forgiven
7. You learn

8. Head over feet
9. Mary Jane
10. Ironic

11. Not the doctor

12. Wake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