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큰 발렌타인, 피아, 코어 매거진, 브리즈 등과 함께 했던 금요일 밤을 넘어, 필자는 좀 더 빡센 팀들로 라인업을 꾸린 토요일 공연을 찾았다. 공연 시작 20분 전, 이미 장내는 가득 메워져 있었다. 관객들 사이에는 왠지 모를 기대감과 설렘이 서려 있었고, 배경 뒤 모니터에는 여름에 있을 <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2015 >의 프로모션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부분은 이를 바라보며 지난여름의 기억을 곱씹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약속된 시간에 맞춰 첫 무대가 시작되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년 최고의 루키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3인조 밴드 아즈버스였다.
이어 바세린이 등장했다. 사정상 불참했던 이강토의 공백이 아쉽긴 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헤비니스 신을 헤쳐온 이들의 연주와 노래는 '진짜'를 기다려왔던 이들에게 그야말로 딱 맞는 맞춤복이었다. 이전까지는 슬슬 박자를 타던 이들이 서서히 원을 만들고 모싱과 슬램을 하기 시작했고, 밴드 역시 'Radix', 'The protester', 'Red raven conspiracy'로 관중들이 놀기에 딱 좋은 환경을 던져주었다. 보컬 신우석은 별도의 멘트 없이 노래에 집중하는 한편, 조민영은 < GMC Record > 주최의 < 2015 New Year Fest >의 개최 소식을 알리는 등 팬들과의 의사소통에 힘을 쏟는 모습이었다. 2007년에도 참전했던 만큼, 아직까지 살아남아 8년 만에 부활한 공연에 동참했다는 것 사실 역시 감동을 배가시키기도 했다.
이어 한진영의 생일 축하 노래와 함께 등장한 '옐몬' 옐로우 몬스터즈. 최근 가장 활발히 활동하여 고정 팬이 많기로 소문이 난 만큼 더더욱 공연장의 열기가 뜨거워졌고, 특히나 세 멤버를 향한 여성들의 눈길이 전에 없이 초롱초롱해졌다. 첫 곡으로 이들이 분출한 곡은 바로 'Red flag'!
한바탕 쓸고 지나간 그 열기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을 즈음, 저 멀리 페스티벌에나 볼법한 깃발이 보였다. 꾸준히 작품 활동과 공연을 이어나가며 여전한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는 그들 역시 8년 전에 이어 다시 한 번 얼굴을 내민 팀 중 하나. 크로우의 보컬이기도 했던 장학은 말끔한 외모만큼이나 정돈된 말솜씨를 보이며 관객을 좌지우지했다. 무엇보다 마니아들이 제법 눈에 띄었던 무대였다. 2012년 앨범에 담겨 있는 'Abondoned'를 필두로 'Sorrow Mr. Breaker Part 3', 'The death of shame'를 열창하며 '지금의 디아블로가 어떤 모습인지'를 어느 때보다 강하게 어필했다. 깃발을 보고 감격에 겨워하던 장학은 “올해 록페스티벌에서 꼭 저 깃발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멘트로 여운을 남겼다. 'To strong to surrender'와 'Harlem desire'를 통해 꺼내 보였던 육중한 헤비메탈 사운드는 그간 쌓은 연륜만큼 그 무게감을 발하고 있었다.
메탈의 과격함과는 또 다른 섬세함. 아트 오브 파티스는 잠시 그 열기를 식혀줌과 동시에 음악 자체에 몰두하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김바다의 보컬과 카리스마도 명불허전이었지만, 특히 주목할 만했던 것은 기가 막힌 플레이를 보여준 이태훈의 기타 연주였다.
이미 공연은 3시간 이상 진행된 상태에서 끝판왕 크래쉬가 등장했다. “크래쉬! 크래쉬!” 이미 객석은 그들에 대한 갈구로 가득차 있었다. 인트로로 데뷔앨범의 첫 곡 'Scream'이 흐르며 그들의 기원을 알린 뒤, 곧바로 5집의 'Whirlwind struggle'로 단숨에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누구의 팬이건, 어떤 신분이건, 나이와 성별이 어떻건, 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 다시 한 번 공연의 분위기를 처음으로 리셋 시켰다. 그런데 그 찰나에 잠깐 사고가 발생했다. 킥드럼이 예기치 못하게 찢어졌던 것. 교체하는 시간을 벌 동안 의도치 않게 안흥찬의 토크쇼가 이어졌고, 몸이 근질근질해질 때쯤 'Creeping I am'과 'Crashday'로 기다린 이들에게 최고의 화답을 보냈다.
“이 곡을 낸지 벌써 22년이나 됐네요”라는 말로 세월의 길이를 짐작케 한 'My worst enemy'로 옛날의 추억을 되살리는가 하면, 'Swandive'와 'War. Inc'로 현재의 그들 또한 명백히 살아있음을 퍼포먼스로서 대답했다. “이제 시작이야, 이제. 어디 따라올 테면 따라와봐!”라고 외치는 안흥찬의 카리스마, 양쪽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임상묵과 하재용의 기타, 간만에 돌아왔음에도 크래쉬는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정용욱의 드럼은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사실을 몸소 증명했다.
뜨거워진 분위기만큼이나 객석은 그간 갈증으로 헤맸던 헤비메탈 마니아들의 원풀이로 가득했다. 슬램이나 모싱은 기본, 서프나 다이브도 종종 벌어졌다. 1집 LP를 든 관객이 무대 위에 올라가 헤드뱅잉을 하는가 하면, 여러 관객들이 다이브를 시도하며 흥을 돋았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점은, 메탈 공연이었음에도 성비가 거의 5:5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옐로우 몬스터즈나 디아블로, 아트 오브 파티스의 팬들 또한 제법 공연장을 찾았다는 것이 이에 한몫했겠지만, 확실히 이러한 헤비한 성향의 공연에선 보기 힘든 사뭇 낯선 광경이었다. 또한 중장년층보다는 중학생(고등학생도 아닌)을 비롯한 10대들이 관객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꽤나 긴 시간동안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규 팬층의 유입은 고무적이면서도 분명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이들은 과연 어디서 크래쉬를 접했을까. 작년의 펜타포트였을까 아니면 피처링으로 참여했던 < Show me the money >에서 였을까. 궁금증은 여전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유년층의 지지는 분명 헤비메탈 신에 새로운 활기 그 자체가 될 것은 확실했다.
'Declaration of the absure', 'Misguided criminal', 'Turn to dust' 등의 레퍼토리가 이어진 뒤, 마지막 곡으로 펼쳐 보인 것은 바로 'Smoke on the water'.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는 팬들의 얼굴엔 어느덧 아쉬움보다는 후련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이어지는 앙코르 요청. 안흥찬은 공연에 도움을 준 여러 업체와 사람들을 비롯, 이곳을 찾아준 이들에게 특히나 고마움을 표하며 다시금 금속성의 포효를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크래쉬, 그리고 앞으로 크래쉬가 나아갈 방향을 말해주는 곡으로서 고른 것은 바로 스테픈울프(Steppenwolf)의 'Born to be wild'. 여태껏 해왔듯 앞으로도 타협 없이 와일드하게 음악인생을 이어나가리라는 이 선언으로 대미를 장식했고, 11시가 다 되어서야 공연은 막을 내렸다. 장장 5시간에 걸친 메탈 여행이었다.
세월을 뛰어넘는 라인업과 세대를 가로지르는 관객층. < CRAZY FOR CRASH >는 단순히 한 노장메탈밴드의 복귀 세레모니를 넘어, 앞으로의 메탈 시장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순간이었다. 데뷔한지 22년이 넘은 밴드의 퍼포먼스에 스무살이 채 되지 않은 이들이 몸을 맡기는 광경. 아마 국내 헤비니스 뮤직 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장면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꽤나 긴 시간이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으며, 1990년대 후반에 홍대를 찾았던 이들과 2010년이 넘어서 홍대를 찾았던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훌륭한, 그리고 황홀한 페스티벌이었다. 끝은 디아블로의 보컬 장학이 했던 헌정사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크래쉬가 왜 위대한지 알아요? 왜냐면, 22년 동안 한국 헤비메탈을 지켜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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