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날씨의 토요일 밤, 어둠이 조금씩 깔리고 있는 창동역 주변에 슬금슬금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낮은 온도였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멈추지 않는 눈발이 오늘 공연을 위한 특수효과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터. 지난 내한 이후 5년만에 한국을 재방문한 일본 출신의 포스트 록 밴드 모노와 지난 한해 해외 유수의 페스티벌을 중심으로 맹활약을 펼친 잠비나이의 만남. 자국을 넘어 해외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두 팀의 무국적 록 사운드가 그들의 음악만큼이나 음울한 날씨 속에서 막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팀의 인연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 리우아르던에서 열렸던 < Into The Void >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것을 계기로, 모노가 내한공연 계획을 구체화 하던 중 잠비나이에게 오프닝 게스트로 러브콜을 보내며 합동공연이 성사되었다. 어느덧 포스트 록 거장 반열에 올라선 이들은 스티브 알비니(Steve Albini)와의 재회를 거쳐 작년 9번째 앨범 < Requiem For Hell >을 선보였고, 공교롭게 잠비나이 역시 두 번째 작품인 < A Hermitage : 은서 >로 컴백한 참이었다. 그간 쌓아온 것들을 관객들 앞에 풀어 놓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무대였으리라.
시침과 분침이 동시에 6을 가르킬 무렵, 금의환향한 잠비나이가 등장해 공연의 포문을 열었다. 첫 곡 'Deus benedicat tibi'의 서두를 장식하는 둔탁한 드럼소리, 이어 터져 나오는 거문고와 해금의 이질적이면서도 아찔한 결합. 날씨만큼이나 축축하고 스산한 사운드가 이내 가슴을 강하게 두들기고 있었다. 잠시 볼륨을 줄여 기척을 감추더니, 다시금 지축을 뒤흔드는 광폭한 사운드의 홍수가 관객의 의식을 단숨에 빼앗아갔다. 눈보라가 폭풍이 되어 덮치는 순간의 두려움을 알면서도 기꺼이 맞아줄 준비가 되어 있던 관객에겐 반가운 소용돌이었다.
줄곧 지속되는 소음 위로, 거문고와 기타의 조합이 도드라지는 'Echo of creation'이 끝나서야 기타를 맡고 있는 이일우가 간단한 인사말을 건넸다. 한 손으로는 기타를 또 한 손으로는 태평소를 연주하는 멀티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던 '소멸의 시간', 댄서블한 드럼비트의 위를 아슬아슬하게 거니는 해금 연주가 잠비나이 음악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듯한 'For Everything that you lost'까지 세계적 유명세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무대가 이어졌다.
“모노는 저희가 굉장히 좋아하는 밴드입니다. 십년전 쯤에도 보러갔던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같이 공연할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굉장히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두 번째 MC 후 16비트의 드럼 위 역동적인 전개가 인상적인 'They keep silence'가 이어졌고, 심장을 움켜쥐었다 놓았다하는 해금의 연주로 세계관을 확장해가는 'Connection'을 끝으로 본 공연 같은 에피타이저는 메인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다. 짧지만 농도 짙은 40여 분간이었다.
30분의 세팅 시간 후, 네명의 포스트 록 장인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나지막히 들려오는 실로폰 소리를 시작으로 'Ashes in the snow'를 연주, 공간계 이펙터를 통한 딜레이 사운드를 한껏 머금은 기타소리의 장중함이 관객들을 압도했다. 여기에 디스토션과 퍼즈가 가세하고, 이제 질세라 드럼과 베이스 역시 파상공세를 퍼부으며 저 다른 세계 어딘가로 공연장 안의 영혼들을 인도했다. 악기를 통해 절규하는 이 네 실루엣의 파노라마야말로 팬들이 보고파하던 바로 그 모습이었을 것이다.
마치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절정을 보는듯한 곡 후반부를 지나, 'Death in rebirth'에선 드럼 난타와 16비트 피킹 속 처연한 곡조가 그들의 오랜 주제였던 죽음과 지옥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내비쳤고, 키보드를 통해 서정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Dream odyssey' 역시 점점 덩치를 불려가는 구성 안에서 자신들의 영롱함을 뽐냈다. 각자가 자신의 연주에 몰두함에도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는 합주는 경이로울 정도였으며, 특히 기타를 세워두고 이펙터를 조작해 갖가기 노이즈를 만들어내는 타카의 퍼포먼스는 그 자체로 예술이라 칭할만했다.
최대 히트곡 중 하나라고 할만한 'Pure as snow(Trails of the winter storm)'가 울려퍼지며 공연은 클라이막스로 치달아갔다. 공백을 메우는 뿌연 심상의 기타사운드를 지나, 조금씩 살을 붙여가며 인간의 감정 그 심연의 끝을 헤집는 듯한 이미지를 청자에게 전달했다. 불규칙한 소리들을 '모노'라는 틀로 가둬 하나의 스타일로 통제해내는 기적이 극대화 되어있는 'recoil, ignite'를 지나, 이제 마지막 국면을 남겨두고 있었다. 바로 이번 작품의 타이틀과 동명의 곡인 'Requiem for hell'. 중독적인 기타리프가 반복되며 조금씩 보는 이들을 환각에 빠뜨리고, 이윽고 엄청난 음압으로 17분이라는 시간을 찰나의 순간으로 압축에 그 안에 자신들이 가진 모든 기술과 감정을 쏟아 부으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습, 그야말로 비장미의 극단이었다. 모든 부정적인 기운을 씻어내는 듯한 앵콜곡 'Everlasting lights'를 끝으로,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100여분간의 슈게이징 여행은 크나큰 여운을 남기며 인사를 건넸다.
그야말로 마음 속 어둠의 밑바닥까지 훑고 온 듯한 기분이다. 어제 과음한 탓에 오늘만은 삼가려 했으나, 또다시 혼자라도 맥주 한잔 아니 할 수 없는 밤이 되고 말았다. 내면의 어두움과 직면하고, 막막한 현실과 대면하며 생긴 생채기들이 자신들 음악의 주 소재라는 듯, 공연이 끝나자 괜히 또 씁쓸해져 입맛만 다시게 만든다. 그래도 삶이라는 의무를 견뎌낼 원동력을 이 알코올에 휘발되어 버릴 어느 밤의 풍경에서 찾는다. 폭발하는 에너지와 그에 동반되는 미려한 감수성은 비록 잠깐일지언정 우리를 황홀경에 데려다 놓은 덕분이다. 그들과 함께한 하룻밤의 우울하면서도 환희에 찬 여행. 평생 잊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