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무서워할 음악을 만들자”
1968년 영국 버밍엄에서 결성한 블랙 사바스의 모토는 '공포스러운 음악'이었다. 동명의 공포영화에서 이름을 따 온 이들의 음악은 의도 그대로 음산하고 사악하며 때로는 불길한 기분까지 들게 만든다. 공업지대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음악적 지식과 경험이 없었던 이들에게 레드 제플린의 화려한 스킬이나 딥 퍼플의 지적인 어프로치는 사치였다. 대신 이들에겐 억눌린 분노와 삐딱한 시선이 있었으며 그 감정들은 이내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악마의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다.
1970년 야심차게 발표한 데뷔 앨범 < Black Sabbath >는 어둡고 거친 사운드와 불협화음, 조악한 만듦새로 평단의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감상은 달랐다. 매일 공장의 소음과 매연 속에 살아가던 버밍엄의 노동자들에게 이들의 음악은 일상의 소리였으며 갈 곳 잃은 분노와 공포를 해방하는 탈출구로 작동했다. 이내 언더그라운드를 중심으로 블랙 사바스의 이름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같은 해 두 번째 앨범이자 록 역사의 위대한 명반 < Paranoid >가 세상에 나왔다.
토니 아이오미의 살벌하기 그지없는 기타 연주가 완전히 폭발한 이 앨범은 'War pigs', 'Paranoid', 'Iron man' 등 지금까지도 헤비메탈의 교과서로 통하는 수많은 명곡들을 남겼다. 최근 영화 < 콩-스컬 아일랜드 >의 OST로 'Paranoid'가 흐르듯 이 앨범의 많은 곡들은 메탈의 상징, 메탈의 비조로 역사와 대중에 각인되었다. 느리고 낮은 음의 리프와 대비되는 오지 오스본의 귀를 찌르는 하이톤 보컬은 음악에 강렬한 개성을 부여하며 블랙 사바스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았고, 뛰어난 작사 작곡 능력을 겸비한 기저 버틀러의 지저분한 베이스와 빌 워드의 천둥 같은 드러밍이 그들을 든든히 받쳐주었다. 네 멤버의 악마적인 시너지가 폭발한 이 앨범으로 블랙 사바스는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한다. 맨손으로 시작한 무명 밴드가 마침내 어둠의 제왕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불세출의 보컬리스트, 디오를 만나다
이후 밴드는 < Master Of Reality >(1971), < Vol. 4 >(1972), < Sabbath Bloody Sabbath >(1973)등 명반을 쏟아내지만 프론트맨 오지 오스본이 심각한 마약 중독으로 팀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상징과도 같았던 목소리를 잃었지만 대신 록 보컬의 영원한 전설 로니 제임스 디오의 합류로 블랙 사바스의 음악은 전보다 훨씬 세련된 옷을 걸치게 된다. (해고당한 오지 오스본도 천재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를 만나 화려한 솔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잘 된 셈이다.)
디오와 함께한 두 장의 앨범, < Heaven And Hell >(1980)과 < Mob Rules >(1981)는 오지 오스본 시절에 비하면 어둡고 음침한 느낌은 덜하지만 곡의 출중한 완성도와 한층 무르익은 멤버들의 연주로 영원한 헤비메탈 명반으로 자리했다. 하지만 그 역시 솔로 활동에 매진하기 위해 밴드를 떠나버렸고, 다시 목소리를 잃은 블랙 사바스는 딥 퍼플의 이안 길런과 글렌 휴즈, 토니 마틴 등 보컬을 계속 교체하지만 오지 오스본과 디오 시절의 압도적인 아우라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헤비메탈의 인기 역시 차갑게 식어가던 때였다.
Sabbath Forever Sabbath
서서히 돌아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린 것은 원년멤버 오지 오스본의 복귀 소식이었다. 1997년 재결합 라이브 앨범 < Reunion > 이후 2013년 발매된 정규앨범 < 13 >은 초창기 못지않은 사악하고 무시무시한 사운드로 팬들의 오랜 갈증을 완전히 해소해주었다. 전설의 귀환에 호응한 대중의 성원으로 앨범은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앨범차트 정상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앨범 발매 후 진행된 투어를 끝으로 블랙 사바스는 공식적인 해산을 선언, 49년의 음악 여정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록음악계에 블랙 사바스가 끼친 영향력은 말로 다 못 할 만큼 거대하다. 악마와 흑마술, 피해망상 등 어두운 주제들은 이들을 통해 비로소 록의 새로운 미학으로 정착했다. 그뿐이랴. 이들이 템포를 늦출 땐 둠 메탈이, 템포를 높일 땐 헤비메탈과 스래쉬(thrash) 메탈이 각각 뿌리를 내렸다. 모든 메탈 밴드들은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만큼 해체 소식이 더욱 아쉽게 다가오지만, 그래도 진흙탕 싸움이나 누군가의 사망 없이 깔끔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데서 조금의 위안을 얻는다. 이제는 영영 역사의 저편에 남게 된 록과 메탈의 조상 블랙 사바스. 록 음악이 죽지 않는 한 그 이름 역시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블랙 사바스의 명곡들
1. Black sabbath (1970, < Black Sabbath > 수록)
역사적인 첫 등장을 알린 데뷔앨범의 첫 수록곡이다. 스산한 빗소리와 멀리서 울리는 종이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어딘가 불안한 음들로 이루어진 리프가 불길하게 이어진다. 중후반부의 리듬 전환은 이들의 초창기 음악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식으로 느린 템포의 곡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B급 공포영화를 연상시키는 무서운 앨범 재킷은 덤.
2. War pigs/luke's wall (1970, < Paranoid > 수록)
기타와 베이스의 앙상블만으로 웅장한 느낌을 표현한 도입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빠른 리프와 주술적인 멜로디, 후반부 'luke's wall'의 서정적인 기타 라인.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구성이다. 혹자는 메탈의 시작이라 할 만큼 절륜한 기타 연주가 두드러지는 곡이지만 빈 공간을 채우는 드러머 빌 워드의 필 인(fill in) 역시 숨은 주역이다.
3. Paranoid (1970, < Paranoid > 수록)
3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엔 충분했다. 그 유명한 인트로 기타 리프 이후 세 가지의 코드만으로 이루어진 팜 뮤트 연주가 쉴 틈 없이 달리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정신병 환자의 불안한 내면을 표현한 가사 역시 당시로서는 충격이었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이른 록 역사의 기념비적 명곡. 아직까지도 수많은 거물 록 밴드들이 라이브 무대에서 이 노래를 커버한다.
4. Iron man (1970, < Paranoid > 수록)
딥 퍼플에게 'Smoke on the water'가 있다면 블랙 사바스에겐 'Iron man'이 있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기타 리프가 중심 테마로 흐르며 곡을 이끈다. 그와 함께하는 오지 오스본의 보컬은 공포를 퍼트리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철인' 그 자체. 후반부 토니 아이오미의 기타 솔로도 최고다.
5. Children of the grave (1971, < Master Of Reality > 수록)
세 번째 앨범에 들어 밴드의 음악은 헤비 블루스의 색채가 사라지고 더더욱 메탈에 가까워진다. 기병대의 행진 같은 기타 리프와 함께 달리는 돌덩이처럼 단단한 베이스는 오늘날 어느 헤비메탈 밴드와 견주어 봐도 전혀 눌리지 않는 묵직함을 뽐낸다. 한 단계 원숙해진 음악성은 공포와 죽음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6. Changes (1972, < Vol.4 > 수록)
서정적인 피아노와 스트링 선율이 흐르는 블랙 사바스의 몇 안 되는 발라드 곡. 나중의 'She's gone'과 더불어 처연한 록발라드의 원형으로 국내 라디오 전파를 수놓았다.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가사와 비장한 멜로디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만큼 밴드의 넓어진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곡이다. 특히 오지 오스본의 애절한 보컬은 뜻밖의 매력으로 이후 솔로 1집에 수록된 발라드 'Goodbye to romance'의 초석을 엿볼 수 있다.
7. Sabbath bloody sabbath (1973, < Sabbath bloody sabbath > 수록)
오지 오스본의 찌릿한 보컬이 곡 초반부터 귀에 꽂힌다. 이교도의 주술 같은 기타 리프가 내내 흐르고 중간 중간 등장하는 어쿠스틱 기타가 완급을 조절한다. 곡의 백미는 서서히 끓어오르다 폭발하는 후반부로, 튜닝을 바닥까지 내린 기타 리프와 오지의 비음 섞인 고음이 대비를 이루며 피로 물든 안식일의 신비하고 무서운 기류를 형상화한다.
8. Heaven and hell (1980, < Heaven And Hell > 수록)
전설적인 록 보컬 로니 제임스 디오와의 합작은 놀라웠다. 이미 기타 리프 미학의 절정에 이른 블랙 사바스의 음악은 서사적인 구성까지 겸비하며 그야말로 완성형 헤비메탈의 수준으로 오른다. 특히 'Heaven and hell'은 앨범 내에서도 가장 치밀한 구성을 자랑하는 수록곡으로 디오의 굵고 힘 있는 목소리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웅장한 대곡이다. 이 곡 이후 원년멤버인 오지 시절의 곡들보다 디오와 함께한 때의 음악을 더 좋아하는 팬들도 생겨날 정도였다.
9. When death calls (1989, < Headless Cross > 수록)
새로운 보컬리스트 토니 마틴은 오지보다는 디오에 가까운 음색의 소유자였고, 그와 함께 밴드는 보컬의 공백을 메우며 다시 궤도 위에 오를 수 있었다. 드라마틱한 서정성을 한껏 끌어올린 편곡으로 괴물 드러머 코지 파웰이 강력한 타격감을 보탰고, 퀸의 브라이언 메이가 기타 솔로를 연주했다. 전보다 유려하고 비장해진 블랙 사바스의 후기 음악들은 영미권보다는 유럽 대륙에서 더욱 지지를 얻었다.
10. God is dead? (2013, < 13 > 수록)
불안한 코드 조합과 반음 진행이 초창기 음악을 빼닮았다. 돌아온 오지 오스본은 비록 예전 같은 고음을 잃었지만 음색만으로도 충분히 사타닉한 느낌을 자아낸다. 토니 아이오미의 거친 기타와 기저 버틀러의 침잠하는 베이스, 모든 것이 예전처럼 어둡고 깊은 공포의 감정을 자극한다. 전설의 마지막은 오랜 팬들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작별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