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aybellene (1955)
밥 윌스의 컨트리 송(정확히 말하면 웨스턴 스윙)인 '아이다 레드'를 경쾌한 부기우기로 창의적 변형을 일궈낸 것부터가 경이와 충격을 불렀다. 여기서 체스 레코드 사장 레너드의 유명한 한마디가 나온다. “흑인 사내가 이 같은 컨트리 송을 쓰다니 믿을 수가 없다!” 그게 로큰롤이었다. 이 한방으로 로큰롤은 '컨트리'와 '리듬 앤 블루스' 즉 흑백의 결합 즉 회색임이 공표되었다. 차트 데뷔였음에도 빌보드 5위로 점프하면서 언더그라운드의 '신상' 로큰롤은 단박에 주류로 솟아오르게 된다. 블루스(컨트리지만 이 곡은 기본적으로 12마디 블루스)를 베이스에 담아낸 사운드도 귀를 잡아끌지만 <롤링스톤>은 '로큰롤 기타가 여기서 시작된다'고 정의했다. 척 베리는 록 역사의 중요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2. Roll over Beethoven (1956)
로큰롤은 미국, 구체적으로는 '너나 나나 다 같은' 미국의 대중을 대변하면서 성장했다. 성질상 당연히 유럽의 백인 귀족들이 듣는 '클래식'과는 대척점에 선다. 위대한 고전음악가 베토벤의 무덤 위를 구른다니 이것은 클래식에 대한 '꼬마'음악 로큰롤의 맹랑한 도전이다. 후대의 로큰롤 뮤지션들은 이 곡을 '로큰롤의 찬가'로 상승시켰다. 나중 대놓고 리메이크한 밴드 몇몇을 꼽자면 비틀스(1963, 미국 캐시 박스 차트 30위)와 제프 린의 그룹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1973년 영국 6위, 미국 42위)가 있다. “척 베리 곡을 커버하지 않으면 로큰롤의 정체성은 내걸지 못한다!”는 말은 허언일 수 없다.
3. School day(Ring! ring! goes the bell!) (1957)
엘비스 프레슬리, 리틀 리처드, 제리 리 루이스 그리고 척 베리의 로큰롤은 나이 든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정적이고 축축한 1950년대의 습기를 걷어내며 홀연히 비상했다. 학교의 규율과 성적에 얽매여 숨 막힌 10대들에게 몸을 흔들게 하는 로큰롤은 자유를 향한 축복의 '해방구' 인 동시에 '구원' 아니었을까. 'School days'로도 통한 이 노래가 생생하게 증거한다. 빌보드 알앤비 차트 1위, 핫 100에서도 당당 3위에 올랐다. 갓 태어난 로큰롤은 이미 서구 중고교 키드들을 잠식했다. 누군가 그랬다. “학교와 감옥이 있는 한 로큰롤은 영원하다!”
4. Rock and roll music (1957)
고인이 된 척 베리 헌정 특집을 게재하면서 빌보드가 “그는 로큰롤을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세상을 바꾸는 태도로 변환시켜 놓았다”라고 붙인 타이틀은 매우 적절하다. 분명 그가 로큰롤 시조 혹은 최초 시작자는 아니다. 하지만 후대 누구나 그를 로큰롤 대부와 비조로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노래가 전미 차트에 오르면서 로큰롤의 실체가 알려졌고 더욱이 로큰롤의 '대표 송가'를 잇달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Roll over Beethoven', 'School days'도 그렇지만 'Rock and roll music'은 제목부터 명시적이다. 비틀스가 왜 이 곡을 리메이크했겠는가. 자신들이 로큰롤 밴드라는 거다. 존 레논의 명쾌한 한마디. “만약 로큰롤에 또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다면 아마도 척 베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5. Sweet little sixteen (1958)
여름 그룹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척 베리의 'Sweet little sixteen'에 다른 가사를 붙인 'Surfin' USA'를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저작권 개념이 흐릿했던 그때 애초엔 비치 보이스의 창작곡으로 알려졌다. 당연 척 베리 곡 출판업자의 압력에 직면했고 결국 저작권 전체를 넘겨야 했다. 'Surfin' USA'의 원곡이란 사실은 뭘 말하는가. 그만큼 춤을 자극할 만큼 곡이 신나게 잘 굴러간다는 것! ('Rock and roll music' 가사 “만약 나랑 춤추고 싶다면 로큰롤이어야 할 거야!” 그대로다) 이 곡에 대한 죄의식이 남았을까. 비치 보이스는 상당한 세월이 흘러 'Rock and roll music' 리메이크 버전을 내놓았고 5위까지 오르는 빅 히트로 다시금 자신들이 척 베리로 시작하는 록 계보에 속해있음을 공시했다.
6. Johnny B. Goode (1958)
척 베리 곡 가운데 대중적 인지도가 가장 높은 곡. 아마도 1985년의 유쾌한 SF 블록버스터 영화 <백 투 더 퓨처>에 소개되어 대중의 뇌리에 깊이 저장된 덕분일 것이다. 1980년대 대중문화 소비자들은 이 순간으로 척 베리를 '30년 전의 로큰롤 개척자'로 재(再) 정의했다. 곡은 한마디로 '시골 소년 인간승리'. “엄마는 말하셨지. '언젠가 커서 넌 큰 밴드의 리더가 될 거야. 전국 각지에서 네가 연주하는 것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몰려들 거야'라고” 나중 로큰롤을 하려는, 록밴드를 꿈꾸는 누가 이 노랫말에 현혹되지 않았겠는가. 거의 모든 록 밴드들이 이 주술에 홀려 그를 졸졸 따랐다. '하멜른의 파이드 파이퍼', '피리 부는 사나이'가 록에 있다면 그는 척 베리였다.
7. Back in the USA (1959)
척 베리는 침울하고 회의적인 미국 흑인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도리어 정반대 긍정과 낙천의 정서로 내달렸다. 심지어 뉴욕이나 LA의 백인이 불러야 할 것 같은 '미국 찬가'를 불렀다. 이 곡에 따르면 '미국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이 옳은 곳'이란다. 국가를 찬양했다고 백인 사회에 대한 굴종으로 내리치기보다는 그들 식의 극복으로 유연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노래를 들어보면 안다. 사실 예부터 흑인들은 침통한 블루스를 해도 결코 낙관과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다. 여기에 '아프로 아메리칸'의 위대성이 자리한다. 1978년 '미스 로큰롤 USA'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는 이 곡의 리메이크로 차트 16위라는 호응을 얻었다. 나중 1987년, 그는 척 베리의 회갑연 성격의 세인트루이스 공연 무대에 합류해 록의 어른을 경배했다.
8. Come on (1961)
척 베리의 거대한 존재감은 상기했듯 1960년대와 1970년대 뮤지션들의 잦은 헌정 커버가 첫 번째 증빙이다. 비틀스가 기량 향상과 단련을 위해 척 베리의 상당수 곡을 취했다면 라이벌 롤링 스톤스는 1963년 말, 아예 데뷔곡으로 척 베리의 'Come on'을 택했다. 영국 차트 21위에 오른 이 버전도 나쁘지 않지만 척 베리의 오리지널 자체가 워낙 수작이다. 후크, 코러스 활용은 물론 전체적 흐름도 견고하다. 그러나 빌보드 100위권 진입은 실패했다. 1959년 매춘금지법인 맨 법(Mann Act)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이미지 추락과 차트 장악력 약화에 따른 결과였다. '풍운아' 시절은 마감되었다.
9. You never can tell (1964)
1970년대에 빼어난 감식안을 자랑하던 <로스앤젤레스 헤랄드-이그재미너> 록 평론가 켄 터커는 록 25년 역사를 장식한 걸작 가운데 하나로 척 베리의 'You never can tell'을 꼽았다. 하긴 복역을 마치고 다시 나왔을 때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빌보드 14위). 수인 생활 중 썼다는 곡. 그런데 곡조와 메시지는 '룰루랄라 즐거운 인생'이니 이런 지독한(?) 아이러니가 없다. 부제가 'C'est la vie'(이게 인생이야!)다. 1977년 컨트리 차트를 장식한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는 이 부제를 내건, 케이준 피들 연주가 돋보이는 리메이크 버전을 발표해 찬사를 받았다. 1994년 쿠엔틴 타란티노의 문제작 <펄프 픽션>에서 존 트래볼타와 우마 서먼이 트위스트를 출 때 흘러나온 리듬이 바로 이 곡이다.
10. My ding-a-ring (1972)
대체 뭐에 대한 노래일까. 라이브로 녹음된 곡은 관객들이 키득키득 웃으며 따라 부를 만큼 '재미'가 느껴지는데 뭐가 그리 즐거운지는 노랫말을 경청하면 풀린다. 이중의 의미 함축(double entendre)이라지만 뜻 때문에 엇갈릴 리가 없다. 마스터베이션, 바로 외설이다. 그래서 당대 일각의 방송국들이 금지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2주간 빌보드 1위를 점령했을 만큼 스매시 히트를 쳤다(척 베리의 유일한 넘버원 송). 성적 개방의 분위기가 넘쳐흐른, '더티가 아름다웠던' 1970년대라서 가능했을지 모른다. 이번 추모특집으로 척 베리 히트곡을 모은 빌보드는 이렇게 이 곡을 정리했다. “우리가 뭐라 하겠는가. 1970년대는 정말 기이한 시대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