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뿌리는 단순한 복각이나 재현이 아닌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 존재한다. 예스러운 추임새와 훅은 단 2마디 안에 X세대 감성을 불러오지만, 당시의 작법을 그대로 답습하진 않는다. 그 만의 재해석은 아날로그 형식을 디지털 포맷으로 전환하는 디지털 리마스터링에 가깝다. 비트와 같은 기본 골조는 장르적 무드를 구성하기 위해 예전 스타일을 유지하고 속을 채우는 세련된 악기 구성은 요즘 트렌드와 발을 맞췄다. 동시대의 유행가들과 견줘도 어색하지 않다.
1990년대 콘서트 실황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히위고 나우', 스킷에 가까운 '내 여자친구에게'와 '기린의 편지'는 유기적으로 결합해 트랙 간의 연결과 스토리텔링을 포용한다. 도입부의 우레와 같은 함성과 유머러스한 내레이션은 자칫 진지하게만 보일 수 있는 캐릭터를 완급조절한다. 뮤지션과 간단히 호흡을 맞출 수 있고 손쉽게 공감을 부르는 직관적인 가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대여 이제'나 '지겨워'에는 처음 들어도 곧바로 따라 부르거나 함께 리듬을 탈 만한 요소가 상당히 많다.
복고를 지향하지만 추억팔이식 답습으로 끝나지 않은 진일보한 앨범이다. 더 이상의 혁신은 없을 것만 같던 한국형 뉴 잭 스윙은 기린을 등에 업고 그간 쌓인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생기를 되찾았다. < 그대여 이제 >에 담긴 오마주와 위트를 오가는 곡예는 한층 발전해 후속작 < 사랑과 평화 >에서 절륜함을 갖춰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게 됐다. 세기말 감각을 지닌 외로운 21세기의 기린아가 걷고 있는 외길. 진정한 레트路(로)다.
-수록곡-
1. 히위고 나우

2. Oldschool love (feat. Boi B Of 리듬파워)
3. 그대여 이제

4. 지겨워

5. Please stay (feat. 마리킴)
6. Storm is over (feat. Giant)
7. 내 여자친구에게
8. 난 외로움은 싫어

9. 검은 안경 (feat. 재진 Of 45 rpm)
10. 우주

11. 시간이 많아 (feat. 유연 Of Aquibird)
12. 성스러운 크리스마스
13. 기린의 편지
14. 다시 부르는 그대여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