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무대를 둘러보며 먼저 눈에 띈 뮤지션은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에 선 강이채였다. 그는 머리띠에 깃을 꽂고 그 뒤로 긴 천을 맸다. 그 아래로는 꽃무늬 바지를 입었으며 음악과 의상의 조화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보여줬다. 멋진 자태와는 다르게 습한 날씨는 그의 바이올린 소리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런 악기를 들고도 그는 '성냥'과 'Radical paradise'처럼 인상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더 브이 스테이지에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에 오르며 내한 공연 소식까지 알린 레이니(LANY)의 타임이었다. 거기에 유일한 정규 앨범을 코리아 에디션으로까지 발매한 탓에 필자도 이 밴드가 궁금해졌다. 가득 메운 관중과 커다란 함성으로 밴드의 인기를 단숨에 실감했다. 인기에 비례하듯 밴드의 라이브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오히려 너무 깔끔해서 사운드가 다소 가볍게 들렸다. 공연하는 중간중간 보컬 폴 제이슨 클라인(Paul Jason Klein)은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말뿐만 아니라 연신 미소를 지은 그의 얼굴에서도 관객을 향한 고마움이 드러났다. 공연 내내 밴드가 행복의 에너지를 분출한 덕분에 팀에 대한 궁금증은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날 유일한 힙합 무대를 선보인 지코는 여러 악기로 라이브 셋을 꾸렸다. 통상 반주 음원에 노래하는 것과는 다르게 라이브 밴드는 생동감 넘치는 사운드를 들려줬다. 그 수혜로 신곡 'Artist'와 'Anti'를 비롯한 그의 다양한 히트곡들이 무대를 빛냈다. 매 곡이 끝날 때 관객들은 미친 듯이 환호했고, 그 환호는 '유레카'에서 터졌다. 너 나 할 것 없이 많은 관중은 후렴의 색소폰 리프에 맞춰 지코와 함께 웨이브를 췄다. 나름의 진풍경이었지만 바로 이게 다 함께 즐기는 페스티벌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힙합에 대항이라도 하듯 지코의 타임 앞뒤로 가장 강렬했던 록 밴드의 무대가 있었다. 먼저 튠업 스테이지의 해리빅버튼은 규모가 작은 스테이지임에도 거칠고 날카로운 톤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공연 시작과 동시에 관객들은 열광했고 이에 부응하듯 슬램 존이 만들어졌다. 셋 리스트는 올해 나온 < Man of Spirit >을 중심으로 묵직한 곡들이 울려 퍼졌다. 사운드는 기타의 거침과 보컬의 육중함으로 완벽히 합을 이뤘다. 공연 중 최고는 블랙사바스의 'Iron man'과 딥 퍼플의 'Smoke on the water' 메들리였다. 밴드는 정체성을 공표하면서도 다수가 알고 즐길만한 선곡으로 흥을 표출했다.
배턴은 다음 주자 칵스가 이어받았다. 등장과 함께 보컬 이현송은 “오늘 우리의 무대는 전설이 될 거야!”라는 포효로 공연을 열었다. 관객들은 음악에 몸을 맡기며 슬램과 기차놀이에 빠져들었다. 신시사이저의 하이톤이 강했던 것을 빼면 멤버들의 연주는 완벽했다. 셋 리스트에는 당연히 새 EP < RED >를 포함한 이름난 곡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Acdc' 'Jump to the light' 'Oriental girl'로 이어지는 메들리 타임은 칵스 공연의 정상이었다. 특히 'Jump to the light'에서 드랍 후 터지는 하이라이트는 시공간을 흔들 정도로 관객들을 흥분시켰다. 공연이 끝나도 필자는 속으로 '역시 칵스다'라는 말을 되뇔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진 하늘 아래에서 한 음성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이적의 내레이션이 공연에 불을 밝혔다. 그의 특기인 부드러운 곡들이 지산의 관중을 끌어모았다. 밤하늘 사이에 두고 '같이 걸을까'와 같은 절절한 발라드는 무대의 모든 것을 감동적으로 보이게 했다. 감성적인 발라드가 주를 이뤄도 그가 예고했던 '뜨거운 것이 좋아'를 포함해 '압구정 날라리'와 '하늘을 달리다'가 틈틈이 흥을 띄웠다. 흔히들 누군가의 노래를 듣고 취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건 바로 이적의 노래를 듣고 써야 한다.
완전히 어두워진 무대의 스크린에 음울한 실루엣의 숲 영상이 하나 켜졌다. 무겁게 깔린 엠비언트 사운드가 중압감으로 현장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따로 설치한 조명기가 눈에 들어올 즈음 시규어 로스가 나타났다. 어느 팀보다 큰 함성이 밴드를 맞이했다. 환영의 박수가 거의 끝나자 욘시 비르기슨(Jonsi Birggisson)이 순간 몰입해서 활로 기타를 켰다. 곧이어 그의 팔세토 보이스가 합쳐지면서 풍성한 음들이 공간을 장악해 밴드만의 새로운 소리의 공간을 창조했다. 무엇보다 이 공연의 백미는 영상과 조명의 합이었다. 연주 타이밍에 맞춰 번쩍이는 조명과 음악을 한 단계 상승시키는 몽롱한 영상이 완벽한 무대를 만들었다.
종일 더 브이 스테이지의 사운드는 베이스가 조금 강해 중고음이 편하게 뻗어 나오질 못했다. 그에 반해 시규어 로스의 소리는 달랐다. 아이슬란드에서 날아온 청정의 소리가 정말로 아름다웠다. 밴드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무대로 올라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었기에 그들의 사운드는 더욱 신비로웠다. 모든 것이 그들 나름의 영업 비밀이니 할 말은 없다. 대신 그 비밀을 알아내기보다 그들의 노력이 배어난 음악을 듣고 감동하며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시규어 로스를 끝으로 무대 앞에는 여전히 밴드의 음악에 사로잡힌 무리로 가득했다. 거리에는 아쉬움을 남기며 귀가 버스로 향하는 사람들과 딘을 비롯해 여러 무대로 움직이는 관객들로 붐볐다. 헤드라이너의 시간은 끝났지만, 아직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타임 테이블 상에는 디제이 스테이지부터 해서 여러 뮤지션들이 아쉬움을 달래며 서서히 두 번째 날을 마무리했다.
날씨를 따라 지산의 하루는 정말 뜨거웠다. 멋진 무대를 준비한 아티스트들은 물론 이를 즐기는 관객들까지 모두 열정이 넘쳤다. 이 열기를 보조하는 각종 편의 시설과 부대시설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 덕에 일상을 떠나 축제를 찾아온 모든 이들은 같은 마음을 공유할 수 있었다. 걱정은 잊고 현재를 즐기는 마음. 이 모든 게 음악이 만들어낸 기분 좋은 환상으로 한여름 밤의 꿈처럼 추억 속에 자리를 잡았다.
자료 제공=CJ E&M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