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더 존 미스티(Father John Misty) - < Pure Comedy >
감상의 초점을 음악적 만듦새에 두면 앨범은 듣기 좋은 바로크 팝, 오케스트럴 포크의 모음이다. 음반 구석구석에는 1970년대의 엘튼 존과 해리 닐슨, 랜디 뉴먼의 흔적이 골고루 남아있다. 적재적소에 배치한 소리 장식과 쉽게 지나치기 어려울 만큼 매력적인 멜로디, 처연한 구석이 있는 조시 틸먼의 목소리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사운드 활용과 선율의 파워만으로도 앨범의 값어치는 상당하다.
이 음반의 특별함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 Pure Comedy >의 진가는 촘촘한 스토리텔링을 이루는 가사를 통해 완성된다. 열세 곡의 노래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조시 틸먼의 괴로움, 눈부시게 진보한 세상을 바라보는 서늘한 시선, 삶을 윤택하게 한 첨단 기술을 향한 냉소 따위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담담하게 써 내려간 이야기엔 빼어난 구성미가 존재한다. '순수 코미디'를 표방한 우리네 '블랙 코미디'. 음악과 내러티브,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은 올해의 작품. (정민재)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 < DAMN. >
전작들과 또 다른 스타일로 새로운 걸음을 내디뎠다. < To Pimp A Butterfly >와 < Untitled Unmastered. >를 장식했던 재즈, 네오 솔, 펑크(funk)는 자취를 감췄다. 대신 이번에는 보통의 힙합 문법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 수록곡을 성긴 비트로 꾸밈으로써 유행과 조금 거리를 뒀다. 이 때문에 시종 유지되는 음침한 분위기는 < DAMN. >을 한층 야릇하게 만든다.
변한 것은 반주의 표정뿐이다. 살면서 이런저런 시련을 맞닥뜨릴 때마다 느낀 두려움을 상기하는 'FEAR.', 총기 범죄가 만연한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XXX.', 인종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을 지적하는 'PRIDE.' 등 삶과 주변 사회를 살피는 무게감 있는 노랫말은 여전히 굳게 자리를 지킨다. 이따금 플로나 톤을 바꿔 가며 활기를 생산하는 감각적인 래핑 또한 변함없다. 음악적 쇄신, 묘한 흡인력과 숙고를 아우른 < DAMN. >으로 켄드릭 라마는 재차 특별함을 웅변했다. (한동윤)
시저(SZA) - < Ctrl >
본인의 속마음조차 제대로 알 수 없어 결국 상대방의 관심을 통해 존재 이유를 찾게 되는, 어른이 되기엔 아직은 어린 20대의 한복판. 그 혼란의 정서가 뭉근하고 눅진한 비트 위로 나른하게 펼쳐지는 순간, 동세대 여성들의 삶과의 접점이 마법처럼 만들어 진다.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자존감과 외로움을 마치 대화를 하듯 리드미컬하게 노래하는 'Drew barrymore', 남녀관계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감정들을 별다른 수식 없이 있는 그대로 나열한 듯한 'Love galore' 등 남다른 보컬 퍼포먼스와 깊이의 정도가 다른 솔직함으로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혼자만의 방'을 구축하고 있다.
베이스를 강조한 비트, 몽환적인 신스 리프를 동반해 성적 언어를 쏟아내는 'Doves in the wind', 규정된 여성상에 태클을 거는 'Normal girl'에선 성적인 화두를 부각시키며 이 모든 이야기가 단순히 '개인'을 떠나 '전체'에 대한 고찰의 문제로 확대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 또한 놀랍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잘 짜인 러닝타임의 스토리텔링과 이에 맞는 음악을 제공해 준 프로듀서진의 역량,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를 흡수해 최대치를 발휘한 이 알앤비 신성의 보컬 퍼포먼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거창한 선언이나 성명은 커녕, 오히려 그 반대인 내면으로 침잠해 얻어낸 공감과 위로이기에 그 상징성은 더욱 강하게 와닿는다. 유난히 삶이 공허하고 버겁게 느껴질 어느 날, 유난스럽지 않게 마음을 달래줄 동반자가 될 2017년의 한 장. (황선업)
엘씨디 사운드시스템(LCD Soundsystem) - < American Dream >
6년 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작별 후 해산을 알린 엘씨디 사운드시스템.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듯 밴드의 선장 제임스 머피와 그의 크루는 야심 찬 거대 레트로 프로젝트로 돌아왔다. 그 작품은 21세기 브라이언 이노를 꿈꾸는 베테랑 아티스트가 과거의 혁신가들이 남긴 사운드 유산을 쌓아 올린, 커리어 사상 가장 장대한 스케일의 < American Dream >이다.
미니멀리즘의 까칠한 펑크 록으로 새 시대의 허세를 비틀던 머피는 성숙한 시선과 농익은 실력으로 기막힌 사운드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웅장한 시작으로 커튼을 열어젖히며 쏟아져 들어오는 'Oh baby'부터 건조한 기타 리프의 질주 'Call the police', 일렉트릭 디스코 'tonite'과 'other voices'까지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긴 호흡의 연속이 이어진다. 크라프트베르크, 토킹 헤즈, 브라이언 이노, 그리고 데이비드 보위까지. 1970년대 실험가들의 영전에 바친 < American Dream >으로 엘씨디 사운드시스템은 치밀하고 치열하며 성숙한 2017년의 기록을 썼다. (김도헌)
무라 마사(Mura Masa) - < Mura Masa >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신인인가, 했더니 이미 이전부터 징조가 여럿 있었다. 처음엔 여타 뮤지션처럼 사운드 클라우드에 자신의 믹스 테이프를 올리면서 커리어를 쌓았고, 2016년 BBC에서 주관하는 사운드 오브(비평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루키 선정 투표 시스템)에서 신예 힙합 그룹 웨스턴(WSTRN)과 공동 5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Beat slayer”, 약관의 나이를 갓 넘은 신인 프로듀서 무라 마사가 자신을 표현하는 말이다. 날카로움으로는 따라갈 검이 없었다던 일본의 명도(名刀) 무라마사의 이름처럼 비트와 장르를 난도질하여 해체, 재구성하고 혼을 불어넣는다. 박자를 제 손안에서 주무르면서도 난해한 리듬에 매몰되지 않고 청아한 사운드의 공명과 다른 이의 목소리를 빌려 만들어내는 명료한 훅은 이미 팝의 기본형이 되었다. 영국령 채널 제도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시골 소년의 금의환향. (정연경)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Tyler the Creator) - < Flower Boy >
매니악했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가 달라졌다. 기괴함과 난폭함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던 'Yonkers'의 그가 분방함을 한 숨 죽이고 부드러움을 두 숨 늘렸다. 특유의 저음으로 빽빽하게 내뱉던 래핑도 여유로워졌다. 이유 있는 변신. 그가 이토록 잘 들리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음반을 만든 건 메시지 때문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는 자기 고백의 서사가 바로 이 작품에 담겨있다.
젊은 세대의 감성을 아우르며 감각적인 비트와 뮤직비디오, 또 옷차림으로 호응 받던 그가 겉옷을 벗고 자신을 드러낸다. 수록곡 'Garden Shed(Feat. Estelle)'에 서려 있는 은유적인 커밍아웃과 'I ain't got time!'에서 작정하고 적어낸 내면의 풀이가 그 심기일전을 보여준다. 타이틀 'Who dat boy(Feat. ASAP Rocky)' 정도가 이전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의 콘셉트를 보여주지만 상관없다. 거친 외관으로 감싸지 않아도 전달되는 음악적 호소력이 그의 발전을 알린다. (박수진)
퀸스 오브 더 스톤 에이지(Queens Of The Stone Age) - < Villains >
2010년대는 복고와 레트로 문화가 전반적인 유행이지만 퀸스 오브 더 스톤 에이지의 < Villains >만큼 시계추를 완벽하게 돌린 앨범도 흔치 않다.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EDM과 알앤비, 힙합과 달리 록 진영은 과거를 기반으로 오히려 예전을 향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퀸스 오브 더 스톤 에이지가 정좌하고 있다. 7번째 정규 앨범 < Villains >는 그 확실한 영역표시로 기록될 작품이다.
< Villains >는 절대로 친절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서 좋은 앨범을 만들고 싶은 의욕도 없는 음반이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만들고 하고 싶은 말을 노래한다. 밀도가 높고 촘촘하지만 정리가 안 된 거친 사운드 그리고 롤러코스터를 타듯 변곡점이 심한 곡 구조는 꾸밈없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로큰롤임을 대변한다. 2000년대 초반,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프리랜서를 선언한 라디오 피디 겸 진행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돈을 좇지 마라. 돈을 좇으면 못 번다.” 퀸스 오브 더 스톤 에이지의 < Villains >는 계산기를 두들기는 음반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도 부와 명예를 획득한 '진짜' 로큰롤 음반이다. (소승근)
썬더캣(Thundercat) - < Drunk >
퓨전 재즈의 자유로움을 잃지 않으면서 대중과의 연결점까지 잘 짚어낸 빼어난 앨범! 평균 2분을 조금 넘는 수록곡들 안에 꽉꽉 눌러 담은 상상력이 들을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준다. 프로듀서이기 이전에 뛰어난 베이시스트인 썬더캣의 연주는 작품을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다. 'Uh uh'에선 연주자로서의 자신감을 마음껏 뿜어내고, '소리'에 관한 깊은 관심은 'A fan's mail (tron song II)'같은 곡들의 몽환적인 사운드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천재 뮤지션의 고품질 퓨전 알앤비 세트다.
마이클 맥도널드와 케니 로긴스를 비롯해 퍼렐에 위즈 칼리파와 켄드릭 라마 등, 화려한 피처링 목록만 봐도 현재 팝 씬 안에서 썬더캣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쟁쟁한 스타들의 개성을 < Drunk >의 스타일 안에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전체적인 음악적 기획력이 빛난다. 밴드음악의 주춧돌인 베이스 기타처럼, 대중음악의 근간인 재즈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진짜 실력'이다. 수미상관 구성이나 곡들 사이의 긴밀한 연결 또한 이 앨범의 무시 못 할 즐거움이니 놓치지 마시길! (조해람)
빈스 스테이플스(Vince Staples) - < Big Fish Theory >
적당한 괴팍함과 은근한 친근함이 < Big Fish Theory >에 놓여있다. 애정과 존중이 사라지고 혐오만 남은 커뮤니티와 그곳을 빠져나온 이를 감싸고 있는 허무함을 그려내기 위해 디트로이트 테크노와 하우스의 건조함을 선택, 노 아이디(No I.D.)를 비롯한 힙합 프로듀서가 아닌 플룸(Flume)이나 GTA, 소피(Sophie) 등 전자음악 프로듀서들을 끌어들여 완성한 음반은 이제 고작 두 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한 래퍼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고 혁신적이다. 음반은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라는, 다른 두 장르가 선사하는 기본적인 즐거움을 밀도 있는 사운드와 정교한 짜임새로 충실히 구현한다.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찍어낸 양산형 비트들에 귀가 지쳐있던 올해, 좋은 스피커에 대한 구매욕이 강하게 든 작품은 < Big Fish Theory >가 유일했다. (이택용)
로드(Lorde) - < Melodrama >
데뷔곡 'Royals'에서 밝힌 것처럼 '금니, 보드카, 욕실에서 취하기, 핏자국'은 없다. 호화스러운 스웩보다는 절망스럽고 혼란스러운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17세의 나이로 그래미 어워드(2014)의 신데렐라가 되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그. 2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힘들고 아픈 사람과의 사이, 사랑의 슬픔을 전력을 다해 풀어놓았다. 하우스 피아노의 질주가 들뜨게 만드는 'Green light'를 시작으로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으로 끝나는 “그런데 대체 망할 완벽한 장소라는 게 뭐야? (What the fuck are perfect places anyway?)”('Perfect places')까지.
취한 듯 늘어트리는 발음들이 전자비트와 만나면서 더욱 몽환적이고 신경질적으로 펼쳐진다. 일렉트로니카 위로 무아지경으로 몸을 흔드는 그의 모습은 위태롭지만 아름답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그래서 잡아먹힐 것만 같은 위험한 매력이 그대로 팔딱거리는 앨범. 아는 척, 있는 척, 멋있는 척, 특별한 척 하는 연출이 아닌 진짜의 광기가 서려있어 더욱 스며든다. (김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