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이자 팀의 지휘자인 김태원의 삶은 참으로 괴로웠을 것 같습니다. 보컬이 들어오면 잠시 후 나가고, 새로 들어왔다 하면 좀 있다 또 나가고... 이승철, 김재기, 김재희, 박완규, 김기연, 이성욱, 다시 이승철, 정단이 거쳐 갔으니 지금까지 보컬 주인공이 일곱 차례나 바뀌었죠. 보컬 말고 밴드 라인업이 변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구요.

세계 밴드사상 최다 교체 기록이라고 할까요. 김태원도 그러더군요. '요동치는 삶'이었다구요, 그래서 이젠 보컬이든 멤버든 '나가는 게 많이 슬프지는 않다'구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9집에서 노래했던 정단도 나가버리고 만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밴드와 김태원은 다시 보컬을 찾아야 했죠.

이번에 보컬을 선발하는 심정은 남다르지 않았을까요. 똑 같은 숫자라도 두 자리숫자인 10집 앨범인데다가 어느덧 활동 2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죠. 기념비적 시점을 장식할 인물이니 잘 뽑아야 했죠. 주인공은 생소한 이름인 정동하입니다. 김태원은 만나는 순간 '이 친구다!' 했대요. 부활의 정체성을 부각할 최적의 목소리라는 거죠. 그래서 과연 노래를 어떻게 했는지 더 궁금해지더군요.

일단 정동하는 성공적으로 보이네요. 타이틀곡, 과감하게 2곡을 동시에 타이틀로 내세웠는데 그 2곡인 '추억이면' '슬픔을 이기는 기도'를 들어보니 그의 보컬은 신인 치고는 전혀 불안하지 않습니다. 우선 높이 솟아오르는 대목에서 날카롭게 찌르는 과거 부활 보컬의 양상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리고 어깨 힘을 상당히 빼고 수수하게 노래합니다. 허스키한 맛도 있구요.

하긴 앨범 제목이 <서정(抒情)>이니까 김태원으로부터 부드럽게, 서정적으로 노래하라는 주문이 있었겠죠. 부활의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별난, 순탄하게 흐르고 읊조리는 모던한 느낌의 'Yellow'를 들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전 신보에서 이 곡이 제일 좋더군요) 김재기보다는 덜 감정적이고, 박완규보다는 덜 포효하고, 이승철보다는 덜 능란하지만 그럼에도 꽤 매력적입니다. 최대한 절제가 가져온 미덕이죠.

우리 대중들이 좋아할, 지극히 부활적인 록발라드는 일곱 번째 곡 'Imagine'입니다. 멜로디가 참 국산(國産)적, 흔히 말하는 '뽕'이네요. 왜 이 곡을 타이틀로 하지 않았을까 따져보건대 아마도 도입부에서 정동하의 노래가 안정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봐요. 신인이라는 걸 속일 수 없는 거죠. 미안한 얘긴데, 이승철이었다면 더 날렵하게 처리했을 겁니다. 아쉬운 대목이죠.

이런 지적도 있을 법하네요. 분명 보컬 정동하로 새 진용이 갖추어졌는데도 여전히 너무도 부활적으로 들린다는 거 말이죠. 맞는 얘깁니다. 그래서 보컬이 새로 들어온 줄 인식하지 못한 채 들을 팬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그만큼 김태원이 부활의 정체성을 꽉 붙잡고 간다는 얘기도 되지 않겠어요? 그게 꼭 단점은 아니라는 거죠.

곡은 줄줄 잘 흘러갑니다. 1번부터 12번까지 중간에 끊지 않고 쭉 듣게 되네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이게 김태원의 주특기 아닐까요. 한국 사람의 정서와 기막히게 궁합을 잘 맞춥니다. 김태원한테 전염이 된 건지 베이스주자 서재혁이 쓴 10번 곡 '노을'마저 김태원 작품으로 들릴 정도네요.

김태원은 이번 앨범을 두고 '대중한테 선물하는 의미의 앨범'이라며 '지금까지 9권의 책을 냈다면 새 앨범은 전체의 줄거리를 원고지 1매로 축약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활 음악의 축약판이라는 거죠. 정말 그래 보입니다. 선물의 개념에 딱 알맞은 2곡이 있는데 하나는 '마지막 콘서트'로 알려진 '회상Ⅲ(In eternity)'로 이 곡은 조PD가 랩하고 노래했네요. 부활이 이런 걸 한다는 건 열린 시스템이라는 증거겠지요. 하지만 조PD의 강점이 잘 포착되지 않아 감동은 덜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현재 영화와 뮤지컬에서 최고 주가를 올리는 배우 조승우가 부활 5집에 수록된 바 있는 곡 '작은 너에게'를 불렀다는 거죠. 뮤지컬 경험을 살려 뮤지컬 식으로 노래했네요. 나름대로 괜찮습니다. 그는 뮤직비디오 '추억이면'에도 출연해줬죠. 도와주려면 이렇게 확실히 도와줘야 합니다. 드럼 채제민과 건반 엄수한이 뮤지컬 <헤드윅>의 세션을 한 인연이 작용했다는 군요.

걸리는 점이라면 전체적으로 너무 편안하다는 걸 거예요. 적어도 밴드인데 몇몇 곡은 쿵쾅거리고 때려 부숴줘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드럼 베이스 기타가 심심했을 거 같습니다. 그러나 20년을 자축하는 앨범이니 이해도 되는군요. 20년이라면, 10집이라면 힘보다는 관록이죠. 팀의 농익은 연주력은 인스트루멘탈 '4.1.9 코끼리 탈출하다'를 들어보면 알 겁니다.

정동하 빼고 채제민, 엄수한, 서재혁도 부활에서 6-7년을 보냈으니 어떻게 해야 대중과 접점을 마련할 수 있는지 알겠지요. 멤버들이 말하더군요. 우리가 밴드의 본보기가 돼야 한다고, 어려운 밴드현실에서 반드시 서바이벌의 승자가 돼야 한다고요. 비장하죠. 왜 그렇게 비장하냐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이렇게 비장하게 만든 우리 음악계가 반성해야 할 줄로 압니다.

모든 것을 떠나서 부활 같은 20년 경륜의 밴드를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은 다행이자 자랑이죠. 강산이 두 번 변하는 긴 세월을 버티며 부활을 지켜준 리더 김태원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서정 록의 숨결이 가득한 이번 앨범이 성과를 거둬 '사랑할수록' 'Lonely night' 'Never ending story'로 그랬듯 다시 한번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수록곡
1. 시간 (작사 김태원, 작곡 김태원)
2. 추억이면 (작사 김태원, 작곡 김태원)
3. 슬픔을 이기는 기도 (작사 김태원, 작곡 김태원)
4. Yellow (작사 김태원, 작곡 김태원)
5. 4.1.9 코끼리 탈출하다 (작곡 김태원)
6. 거미의 줄 (작사 김태원, 작곡 김태원)
7. Imagine (작사 김태원, 작곡 김태원)
8. 회상 Ⅲ (in eternity) (작사 김태원/조PD, 작곡 김태원)
9. Second 8.1.1 (작곡 김태원)
10. 노을 (작사 김태원, 작곡 서재혁)
11. 작은 너에게(feat.조승우) (작사 김태원, 작곡 김태원)
12. 희망에게 (for my father) (작사 김태원, 작곡 채제민, 김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