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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중에는 '겁'을 '겂'으로 잘못 발음하는 분이 제법 된다. 임창정이나 '날 닮은 너' 작곡가, 또는 음반 프로듀서가 그렇게 발음하는 어르신한테서 실마리를 얻은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임창정은 2009년 KBS < 해피 선데이 >의 코너 '불후의 명곡'에 출연했을 때 "감정 전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투리를 사용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른바 '시적 허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례다. 그러나 오류는 오류다. '날 닮은 너'는 급기야 한국어능력시험에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곁'도 가요에서 잘못된 발음으로 심심찮게 마주하게 된다. '곁'은 구개음화에 적용돼 '이(ㅣ)' 모음이 붙으면 '겨치'라고 발음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모음에서는 '겨테'(곁에), '겨틀'(곁을), '겨트로'(곁으로) 등으로 발음해야 맞다. 공일오비(015B)의 '슬픈 인연'("아, 나의 겨츠로 다시 돌아올 거야."), 서태지와 아이들의 'Good Bye'("그런 네 겨츨 난 오늘 훌쩍 떠나네."), SBS < K팝 스타 > 네 번째 시즌에서 정승환과 박윤하가 커버한 '슬픔 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이젠 그대 겨츨 떠나가야 해.") 등이 틀린 발음의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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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정도는 명함도 못 내민다. 이응을 히읗으로 발음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보컬에 매끄러운 굴곡을 연출하는 차원에서 콧소리를 넣는다거나 감정 과잉으로 힘을 주다 보면 이런 발음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엄지"를 "험지"로 발음해 오프로드 차량 동호회 찬가처럼 들리는 홍진영의 '엄지 척'이 전자의 대표적인 본보기다. '미안해서 미안해'("호늘"(오늘), "헙쓰니까"(없으니까), "하닌 거지"(아닌 거지))를 비롯해 다수의 노래에서 이응을 히읗으로 바꾸는 발성 연금술사 김진표는 후자에 해당한다.
감정의 과한 이입은 오히려 노래의 멋과 맛을 해치기도 한다. 지난 5월 공일오비는 본인들이 1992년에 냈던 '5월 12일'을 박재정을 보컬로 초대해 새롭게 선보였다. 박재정은 문뜩 떠오른 지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심리를 대체로 잠잠하게 잘 표현했다. 하지만 "어디서"를 "허디서"로 발음하는 첫 소절은 무척 아쉽다. 땅이 꺼지기를 바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는 가창은 노래의 정서를 뒤집어 놓는다. 햇살 좋은 날 갑자기 옛 사랑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매일 그녀를 생각해 온 그림이다. 달라진 음절 하나가 주인공을 기운 빠진 스토커로 만들어 버렸다. 노래에서 발음은 정말 중요하다.
일련의 잘못은 의식하고 신경 써서 부르면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다. 또한 워낙 넓게 퍼져 있어서 많은 음악팬이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항이기도 하다. 아니면 노래를 만든 사람이나 가수의 표현을 존중해 예술적 변용으로 납득 가능하다.
문제는 구강구조, 짧은 혀 등 조금 남다른 신체조건이나 잘못된 말 습관이 길게 이어져 온 탓에 어쩔 수 없이, 혹은 자기도 모르게 부정확한 발음을 내는 경우다. 보컬과 기타를 담당하는 오진석, 타악기를 연주하는 이영훈으로 구성된 인디 포크 록 듀오 두나무밴드가 그 안타까운 예시다. 이들이 지난 5월에 출시한 데뷔 EP < Doonamu Band EP.1 >에서는 '번데기 발음(θ)'의 향연이 펼쳐진다. 노래를 부르는 오진석은 거의 모든 시옷을 방송인 노홍철처럼 'th'로 발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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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상이 거듭되니 곡과 가사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해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바지락 칼국수를 먹는 기분이 든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음식을 먹는데 계속해서 머리카락이 나오는 상황이다. 음정이 계속 떨어져 하나의 노래가 세 개의 노래로 들리는 오로라 가창은 개선 항목에서 뒤로 밀려날 만큼 발음이 단연 심각하다.
바깥에서 단출하게 공연할 때에는 정교하지 못한 음향시설과 주변 소음의 은혜로 이 흠이 어느 정도 가려진다.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면 보컬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작품을 기록해 놓겠다는 야망이 결점에 대한 부끄러움을 앞질러 굳이 민낯을 내보였다. 용감한 결정이기도 하며, 만용이기도 하다.
본인들로서는 어쨌든 단점을 극복한 활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자연스러운 발음에 연사당하는 불편함은 청취자의 몫이 된다. 두나무밴드는 제작 과정에서 소비자가 느낄 고충을 최소화했어야 한다.
만약 댄스음악을 하는 가수라면 오토튠을 쓴다든지, 기깍기(곡이 진행되는 중에 리듬을 덧입히거나 패턴을 달리하는 것)나 기존하는 보컬 샘플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부정확한 발음을 덮을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이는 미봉책일 뿐이다. 똑같은 장치가 거듭되면 금방 지루해진다. 차라리 로파이 뮤지션이었다면 곡 스타일에 묻어가기가 수월했을 텐데 이 역시 음악 방향으로 삼지 않는 이상 큰 도움이 될 수 없는 조언이다.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은 시옷이 들어가는 단어 대신 다른 어휘를 쓰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것도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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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홍철은 우스꽝스러운 발음을 주변에서 더 돌출해 줌으로써 자신의 특징으로 갖추는 데 성공했다. 대중에게 웃음을 주는 임무가 큰 사람에게는 이처럼 결점도 장점이 되곤 한다. 그러나 가수들은 전환의 국면을 누리기가 쉽지 않다. 어색한 발음은 대체로 노래의 감흥이 퍼지는 것을 막는 장벽이 된다.
가수가 되고 싶은데 발음 교정 훈련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신체구조의 문제 때문에 그 이상을 영영 마음에 담아 두는 사람도 많다. 두나무밴드는 그런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례가 될까? 그들에게 희망적인 대답은 어떤 것일까? 두나무밴드가 색다른 고민을 하나 던져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