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랩소디>를 향한 국내 영화팬들의 열기가 개봉 둘째 주를 지나며 외려 더 달아오르고 있다. 같은 날 선보인 이재규 감독(<역린> <다모> 등)의 <완벽한 타인>에 이어 줄곧 박스오피스 2위를 지켜온 영화는, 11일(일)을 기해 185만에 근접하며 200만 고지로 나아가고 있다. 놀랍게도 지난 주말 토, 일 양일 간 상영 스크린 수는 1,000개를 돌파했다.
2016년 5월 선보였던, 그 역사적 다큐멘터리 <비틀즈: 하드 데이즈 나이트>(A Hard Day's Night, 1964)가 1만 선을 넘지 못했고, 같은 해 10월 선보인 <비틀스 : 에잇 데이즈 어 위크-투어링 이어즈>도 겨우 2만 선에 육박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랍다 못해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제 아무리 다큐와 극영화 간의 간극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놀랍기는 멜로성 음악 영화 <스타 이즈 본>(A Star Is Born)도 마찬가지. 개봉 한 달 여간 조용히 흥행 선전을 펼치면서, 46만에 달하는 대중 관객들과 조우했다. <보헤미안 랩소디>에 비할 바는 못 되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유의미한 성취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1937년과 1954년, 1976년의 인기 동명 영화 <스타 탄생>의 네 번째 리메이크 작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월드 팝 스타 레이디 가가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 <아메리칸 허슬>(2013), <아메리칸 스나이퍼>(2014),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 <조이>(2015) 등의 명우 브래들리 쿠퍼가 호흡을 맞췄다. 브래들리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헌데 그 솜씨가 <보헤미안 랩소디>의 명장 브라이언 싱어 못잖다. 전기성과 멜로성이라는 결정적 차이는 있어도, 인물들의 감정선을 끌어내는 연출의 폭과 깊이에서는 선배 감독을 압도한다.
혹 '스타 탄생 스토리'를 모른 분들을 위해, 간단한 줄거리 소개를 해보자. 노래에 놀라운 재능을 가졌지만 외모에는 자신이 없는 무명가수 앨리는 공연을 하던 바에서 우연히 톱스타 잭슨 메인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주는 잭슨의 도움으로 앨리는 자기 안의 열정을 폭발시키며 최고의 스타로 거듭나지만, 잭슨은 어린 시절의 상처와 예술가적 고뇌 속에서 점점 무너져 간다….<스타 탄생>만이 아니라 다소 멀리는 <귀여운 여인>(1990), 가까이는 <비긴 어게인>(2013), <라라랜드>(2016) 등에서 반복적으로 맛봐온 '신데렐라 모티브'다.
통속적이다 못해 상투적이라고? 지겹다고? 그럴 수 있다. 실은 나도, 영화를 볼 마음이 아예 없었다. '배드 로맨스', '포커 페이스', '알레한드로', '파파라치' 등 레이디 가가의 히트곡들을 한때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고 그의 기행에 가까운 파격적 퍼포먼스에도 꽤 강한 인상을 받았으면서도, 배우 레이디 가가를 상상하진 않았다. 그런 마당에 브래들리의 연기를 확인하러 영화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스타 탄생>의 리메이크 아닌가.
그럼에도 끝내 한 달이 다 돼가는 지난 주 영화를 보게 된 것은, 무엇보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선사한 강렬한 감흥 때문이었다. 다시금 음악 영화의 자장 안에 푸욱, 파묻히고 싶었다고 할까. 영화과에 재학 중인 작은 아들이 어느 날 던진 한마디, “영화 좋다던데요!”도 한몫했다. 때마침 봐둬야 할 듯해 보러 간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 뒤이어 상영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뒤늦게 본 <스타 이즈 본>은 시쳇말로 '두 엄지 척'(Two Thumbs Up)이었다.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영화는 재미, 감동, 교훈들 두루 겸비한 문제적 수작이었다. 더욱이 두 음악 영화는 '상통'한다. 하긴 스테파니 조안 안젤리나 제르마노타(Stefani Joanne Angelina Germanotta)의 별칭 '레이디 가가'부터가 퀸의 명곡 '라디오 가가'에서 따왔다지 않는가. 그가 “팝 음악계에서 유일하면서도 가장 존재감이 큰 유명인 중 한 명”이라고 평한 프레디 머큐리는 앨튼 존, 데이비드 보위, 마이클 잭슨, 마돈나, 신디 로퍼 등과 더불어 레이디 가가의 역할 모델이라지 않는가.
레이디 가가에겐 《이런 식으로 태어나》(Born This Way, 2011), 《아트팝》(2013), 《뺨 대 뺨》(Cheek to Cheek, 2014), 《조안》(Joanne, 2016)에 이어 다섯 번째로, 브래들리 쿠퍼에겐 생애 첫 번째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라는 영예를 안긴 OST니만큼 “음악이 죽인다”는 등의 호들갑은 떨진 않으련다. 그래도 이런 평가는 하지 않을 도리 없다. 잭슨/브래들리가 솔로로 부르는 '메이비 잇스 타임'(Maybe It's Time)부터 앨리/레이디 가가가 부르는 '아윌 네버 러브 어게인'에 이르는 18곡의 창작곡들은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아깝다.
앨리가 영화 초입 드랙 바에서 열창하는, 에디트 피아프의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은 어떤가. 잭슨에게 앨리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명곡. 빈말이 아니라 '얄팍한'(Shallow), '언제나 우리를 이렇게 기억해줘요'(Always Remember Us This Way), '내가 뭘 발견했는지 봐요'(Look What I Found), '이즈 댓 올라이트?' 등 어느 곡이 더 좋은지, 꼭 짚어낼 자신이 없다. 그날 이후 OST를 수십 번 들었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듣고 있건만 말이다. 그야말로 “주옥같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
<스타 이즈 본>은 그러나 명 OST를 적적히 배치하는데 만족하는 음악 영화에 머물지 않는다. (고)커트 코베인에게서 영감을 받아 출발됐다는 영화는 음악을 빼고 극적 사건 및 사연, 즉 플롯의 안배나 완급 조절 등에서도 수준 급 기량을 뽐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스티븐 스필버그가 탐내는 감독 자리를 꿰찼다더니만, 브래들리 쿠퍼의 연출력은 신예의 그것이라 믿기 힘들다.
레이디 가가의 인물 해석은 어떤가. 브래들리 쿠퍼가 투자사 레이디 가가를 캐스팅하기 위해 CCR(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첫 앨범 《윌리와 가난한 소년들》(Willy and the Poor Boys, 1969) 2면에 수록돼 있는 '미드나이트 스페셜'을 듀엣으로 부른 아이폰 버전으로 보여주면서, 비욘세를 그토록 원했다는 투자사 워너브라더스를 설득했다더니, 그야 말로 '신의 한수'였다. 노래들을 후시 녹음 아닌 현장에서 담게 하자고 주장하고, 브래들리로 하여금 1년 넘게 노래와 기타 연습을 하게 몰아간 주인공도 다름 아닌 레이디 가가라지 않는가. 단언컨대 레이디 가가 아닌 <스타 이즈 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영화는 레이기 가가의 진정한 '배우 탄생'으로 손색없다.
영화에서 로이 오비슨이 불렀던, <귀여운 여인>의 주제곡을 감상하는 재미나, 레이디 가가와 브래들리가 1976년 판 <스타 탄생>의 두 스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과 적잖이 닮은꼴이라는 점 등도 흥미진진하다. 이들은 선배들을 향한 경의(Hommage)를 표하는 겸손도 잊지 않은 것. 그 얼마나 아름다운 미덕인가. 영화가 11월 12일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영화 전문 사이트 www.imdb.com 이용자들이 평점을 매긴 역대 영화 250편(Top 250 as rated by IMDb Users)에서 186위에 올라 있는 것도 관객들이 그 미덕들에 호응한 결과인 셈이다.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백문이 불여일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