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화) 기준으로 한국 박스오피스 1위와 12위에 올라 있는 <보헤미안 랩소디>와 <스타 이즈 본>은 평컨대, 불행하다 못해 절망적이기 십상인 우리 시대에 일말의 위안과 행복을 안겨주는 희망의 영화들이다. 그들은 그 희망을 통해 우리네 관객들에게 어떤 절대적 교훈 내지 메시지를 던진다. 일찍이 어느 철학자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진단했듯, 결코 절망하지 말고 희망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통속적이다 못해 진부하기 짝이 없는 명제를. 영화의 수준을 넘어, 그들이 기대 이상의 크고 깊은 감동‧재미를 선사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래서다.
상기 두 수작과 대조적 방식으로 희망을 역설하는 영화들과 조우하는 맛은 어떨까. 22일 선보인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Fahrenheit 11/9)와, 다음 주 28일 선보이는 <국가부도의 날>이 그들이다. 이 두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등의 크고 작은 다름의 와중에도, 깨어 있는 '소수'―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김종영 교수가 『지민의 탄생-지식민주주의를 향한 시민지성의 도전』(휴머니스트, 2017년 3월)에서 '지민'(知民)이라 일컬은―의 소중함과, 그 소수의 저항‧투쟁을 통해 희망‧변화의 가능성을 강변하는 주제의식 등에서 적잖이 닮은꼴이다.
우선 <화씨 11/9>. 이 영화는 우선 제목에서부터 “9/11테러와 사우디의 연계성을 무시하고 곧바로 이라크 침공을 선택한 부시 대통령과 그의 측근에 대해 회의적인 렌즈를 들이댄” 문제적 다큐멘터리 <화씨 9/11>(Fahrenheit 9/11)과 직결된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가 2등 상 격인 심사위원대상을 안은 2004년 칸영화제에서, <침묵의 세계>(1956, 자크-이브 쿠스토 & 루이 말 감독)에 이어 다큐멘터리 영화 사상 두 번째로 칸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바로 그 화제작. 원제에 딸린 우리 말 부제 '트럼프의 시대'는 따라서 사족일 수 있으나, 영화의 존재이유(raison d'être)를 선명히 제시한다는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확보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비포 앤 애프터, 미국과 세계는 어디로?! 2016년 11월 9일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이끈 민주주의의 민낯, 플린트 워터 사건부터 플로리다 주 총격 사건까지 우리가 몰랐던 미국이 밝혀진다!” 국내 종합 포털에 실려 있는 간략한 소개다. 그토록 트럼프를 싫어해왔으면서도 일찌감치 트럼프의 당선을 예측했던 감독 마이클 무어가 펼쳐 보이는 미국의 민낯은 충격 그 자체다. 버니 샌더스 후보가 웨스트버지니아 주 55개 군에서 모두 승리했음에도 민주당이 결과를 조작해 힐러리 클린턴을 최종 후보로 선정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에 불참하는 등 이탈했으며, 결국 민주당이 트럼프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한 셈이라니 어찌 충격이 아니겠는가.
올 2월 마조리 스톤맨 고교에서 발생한 플로리다 주 총격 사건은 국내 언론을 통해 적잖이 목격한 바 있으나 감독의 고향이기도 한 미시간주 플린트 시에서 2014년 4월부터 촉발된 수질오염 사태, 플린트 워터 사건의 인종 차별적 배경과, 릭 스나이더 주지사나 오바마 전 대통령 등의 대응을 지켜보기란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충격을 넘어 분노하지 않을 도리 없다. 그러니 어찌 민주당 이탈표가 속출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감독 특유의 음모론적 주장이라고?
그런 반론이 터져 나온다 한들 무리는 아니다. 마이클 무어가 누구인가. 장편 데뷔작 <로저와 나>(1989) 이래 줄곧 정치적 주제‧사회의식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자신만의 방법론을 통해 만들어왔으나, 그 작업 방식을 둘러싼 논란은 늘 상존해왔지 않았는가.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다큐 코미디'나 '에세이 영화', '선동 영화', '퍼포먼스 아트'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면서 말이다. 브리콜라주나 캐리커처는 말할 것 없고, 대상 인물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많은 이들이 궁금해는 하나 정작 물어보지는 못했던 질문들을 거침없이 던지는 스토킹마저 마다 않지 않는 끈질긴 감독 아니던가. 그래 그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으레 찬반양론이 대립해오지 않았는가(포털 다음 『근현대 영화인사전』 참고).
그래서일 터.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 인터넷무비데이터베이스(www.imdb.com)의 네티즌들로부터 <화씨 9/11>의 7.5점(10점 만점)에 비해 저조한 5.8점밖에 받지 못한 까닭은. 미국에서 9월 개봉된 이후 1천만 달러도 채 되지 않는 흥행 성적을 올린데 그친 것도 그렇고.
그럼에도 <화씨 11/9>를 선정(주의)적 선동쯤으로 일축하기 무리인 것도 사실이다. 그 내적 논리가 제법 공고한 것.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기득권 중심의 정치경제 운용은 지난 수십 년 간 정설을 넘어 진리가 되다시피 한 게 현실 아닌가. 레니 리펜슈탈의 유명 다큐 <의지의 승리>(1935) 등을 빌려 트럼프와 히틀러를 등가 처리하고, <노스페라투>(1922), <메트로폴리스>(1927),
사건의 배치, 즉 플롯이나 때론 서정적이고 때론 대위법적인 효과적 음악 연출 같은 정교한 영화적 만듦새 등의 미덕은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감독은 역설하지 않는가. 어떤 경우에도 체념에서는 안 된다고. 이제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연대해 맞서 싸워야 한다고.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그 자신, 감독 마이클 무어처럼!(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