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이라? 더 이상 도발적일 수 없을, 선정성 다분한 제목이다. 김혜수, 유아인, 허준호, 조우진 등 빵빵한 출연진에도 아랑곳없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별 다른 관심을 갖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국가부도, 라니 대체 뭔 말인가? 내 기억에 대한민국이 부도를 맞은 적은 없거늘. 물론 안다. 그날이 1997년의 그 고통스러웠던 외환 위기를 가리킨다는 것쯤은. 1997년 12월, 대한민국이 국가부도 위기에 처했으나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부도 사태만은 면한 사건.
하지만 그 사건을 기점으로 “1980년 중반부터 이어진 호황기가 끝나고, 기업들의 줄도산이 이어졌으며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지 않았는가. 그 이후 “1년여 간의 IMF 관리 체제 끝에 18억 달러를 상환하면서 외환 위기로부터 벗어났고, 2001년 8월 23일을 끝으로 IMF 관리 체제가 종료되었”(이상 다음백과 참고, 인용)지 않은가. 그러니 대한민국 정부의 구제금융 요청(1997년 11월 21일)에 부응(?)해 IMF가 한국에 550억 달러를 긴급 지원하기로 협정을 체결한 1997년 12월 3일을, 국가부도의 날이라 단정한들 망발이요 과언이라 할 순 없는 노릇이다. 10월 27일 개최된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한국 경제는 기초가 튼튼하다"며 위기설 일축하지 않았었던가. 그날은 명백히, 국가부도의 날이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바로 그날과 그날 직전 일주일 간, 그리고 그날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의 드라마를 솜씨 좋게 요리해 펼쳐 보인다. 때론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긴박감 넘치나, 극적 유머 등으로 일정한 영화적 거리감을 잃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수준급 균형감을 유지하면서. 감독 최국희의 장편 데뷔작 <스플릿>(2016)은 보지 못했으나, 신예의 연출력치곤 가히 주목감이다.
각본을 쓴 엄성민 작가의 말에 따르면, 영화는 “실제 IMF 협상 당시, 비공개로 운영됐던 대책팀이 있었다는 기사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우리에게 너무나 큰 사건이었지만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IMF 협상이 어떻게 진행됐고,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서 해결해 보겠다고 뛰어든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지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다.”
그 “한 사람”은 김혜수가 분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그녀는 몇몇 팀원과 함께 어떻게든 위기를 막으려 무던히도 애를 쓰나, 끝내 실패를 맛보고 만다. 그녀를 축으로 한 그 팀의 이야기에서 출발했어도, 영화는 그들만을 중심으로 흐르진 않는다. 그들 주변의 다양한 인물들, 크게 재정국 차관(조우진) 등 위기를 출세‧영전의 기회를 삼는 권력층 엘리트들, 전직 펀드매니저 윤정학(유아인) 등 위기에 역-베팅해 갑부가 돼는 벼락부자들, “대한민국 경제는 문제없다는 정부의 호언을 굳게 믿었다가 부도를 맞게 되는” 갑수(허준호) 등, 가족과 회사를 지켜내기 막판까지 버텨보려 했던 이 시대의 가장, 평범한 소시민들의 이야기들이 더해진다.
재야 경제학자 우석훈도 진단했듯 이 영화는, “자신의 신념이나 생존을 향해 달려가는 4개의 축이 만들어내는 외형적 다이나믹스를 가지고 있는 영화다. 김혜수와 조우진의 노선이 충돌하고, 권력과 욕망이 충돌한다.” 비록 “겉모습의 얘기”긴 하나.
상기 네 축의 드라마로써 영화는 기대 이상의 복합성‧입체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극적 거리감과 균형감 등이 두루 구축되면서, 영화가 한시현의 영웅담으로 새지 않는 것. 영웅화는커녕 특별히 미화되지도 않는 그녀는 희망의 가능성으로 제시될 따름이다. 영화의 큰 덕목이다.
더 큰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녀'라는 사실이다. 제작자(이유진)가 여성이기에 그럴 법하긴 해도, 각본에 감독이 다 남성인데도 말이다. 그녀를 다름 아닌 김혜수가 연기했다는 것도 영화의 큰 매혹이다. 여걸 이미지의 김혜수는 시현의 현현으로 손색없다. 2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 그 세월의 시련 탓에 갑수도 더 이상 예전의 갑수가 아니건만 시현 그녀만은 예의 그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극적 설정은, 크고 깊은 위안을 안겨주면서 예사롭지 않게 다가선다.
개별 연기도 그렇지만 연기의 '케미들'도 일품이다. 김혜수와 조우진 간의 맞대결도 흥미로우나, IMF 총재 역 뱅상 카셀과 김혜수의 일전은 기념비적이라 할만하다. 표정, 몸짓, 영어 대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배우에 필적한다. 이렇듯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팩션(Facts+Fiction=Faction) 드라마의 으뜸 미덕은, 무거울 대로 무거운 소재의 무게에 압도당하거나 주눅 들지 않고 시종 영화 오락‧예술적 감흥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