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릭 오도마 (Slick O'Domar)가 이름의 앞부분을 생략하고 첫 정규앨범 < 밭 >을 들고 나왔다. 래퍼 콸라 (Qwala)가 이끄는 오사마리 (OSAMARI) 크루의 일원으로 보낸 지난 2년이 그대로 녹아있는 이 앨범의 최대 장점은 탄탄한 기초를 기반으로 펼쳐내는 담백함, 솔직함이다. 오도마는 자기자신을 치열하게 바라보고 꾸밈없이 이야기하는, 음악의 서사적 기능에 충실한 보기 드문 래퍼다.
개사해서 커버한 비틀즈의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앨범을 연다. 몽환적인 공간으로의 초대와 세계관의 확립을 간결하게 해내는 재치는 취향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기에 매력적이다. 앨범에서 전하려는 오도마의 성장기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켄드릭 라마, 스눕 독과 닥터 드레를 듣는 유학생에서 SG 워너비와 UV, 버벌 진트를 좋아하는 한국 래퍼로 연결되는 '장미밭'에 집약되어 있다.
장미밭은 앨범의 핵심 이미지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보면 치열함이 있다는, 이중성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입장을 대입해 공감할 수 있다는 보편의 장점은 작품 자체를 텅 빈 껍데기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을 내재하고 있지만, 오도마는 장미밭의 비유를 자신의 삶에 투과해 놀라운 해상도로 전달하며 이 위험을 뛰어넘는다.
장밋빛으로 비춰지는 래퍼들의 열악한 현실의 '홍등가'는 밀도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콸라의 옷가게 90웨이브 (90wave)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에서의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지인 래퍼가 속상해 열심히 가사를 쓰려다가도, 결국 게임을 하며 밤을 샌 뒤 자괴감을 느낀다.
이 이중적 감정 역시 앨범의 한 축을 담당한다. 래퍼들의 '급'을 나누며 '모독'감을 주는 한국 힙합에 대한 구토를 동반한 염증이 있고, 그 폭력을 내재화해 스스로를 '범인'으로 규정하는 자기연민에 대한 자각과 혐오도 있다. 두 감정에서 도출하는 결론은 “내가 뜬다. 꼭” 으로 수렴하기도, “우린 서로가 서로의 가시가 되어, 나아가기 위해 서로에게 아픔을 새겨”낸다는 고통의 수용을 통한 연대로 진화하기도 한다. '상실의 시대'속 김오키의 색소폰 연주가 대변하는, 고통의 출처에 대한 성찰이 두 정서를 연결한다.
앨범의 모든 비유가 완벽하다고 하지는 않겠다. 자신과 동료 래퍼들을 홍등가의 상품으로 묘사하는 시도는 참신하지만, 본인이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성 노동자의 경험이 자신의 그것과 같으리라 섣불리 판단하고 대입하기 때문에 투박하고 폭력적이다. 앨범의 다른 부분에서 보여주는 성찰의 수준과는 어긋나는 부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성장을 기대해볼 만 한 대목이다.
사실 모든 래퍼는 솔직함을 팔고있다. 그러나 작업물의 매력과 설득력은 서사의 깊이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허세와 연출된 허울은 티가 나기 마련이다. 오도마의 작업물은 고도의 연출을 거쳤지만, 연출된 것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이지 서사 그 자체가 아니다. 반가운 솔직함이다.
- 수록곡 -
1. 장미밭
2. 비정규직 (Feat. James Keys)
3. 홍등가 (Feat. onthedal)
4. 급
5. 범인 (Feat. The Quiett)
6. 모독
7. 밭 (추천)
8. 상실의 시대 (Feat. 김오키)
9. 가시밭
10. 가시가 되어 (Bonus Tr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