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소리도 없이 >, 홍의정 감독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근면성실하고 전문적으로 시체 수습을 하며 살아가는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 어느 날 단골 범죄 조직의 실장 용석(임강성)에게 유괴된 11살 초희(문승아)를 단 하루만 맡아달라는 특별한 부탁에, 마지못해 응한다. 한데 다음 날 아이를 돌려주려던 두 사람 앞에 용석이 시체로 나타나고,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쯤 되면 그렇고 그런 범죄 드라마이기 십상이다. 필자 역시 그러려니, 짐작했다. 예상은 보란 듯 빗나갔다. 일찍이 피력했듯 영화는 거장 이창동에서 출발해 봉준호와 박찬욱(의 영화 중 특히 < 복수는 나의 것, 2002 >), 김지운(의 < 조용한 가족, 1998 >) 등을 경유해 '홍의정 월드'로 나아가는 문제작 걸작 아닌가. 혹 과대평가 아닐까 싶어, 매체 시사회 이후 일반 극장에서 두 번을 더 관람했다. 볼수록 영화의 맛은 한층 더 커지고 짙어져갔다. 영화는 '괴물 신예'의 역대급 장편 데뷔작인 것이다. 그에 걸 맞게, 충분히 인정받고 있진 못해도.
< 소리도 없이 >는 동류의 범죄성 휴먼 드라마의 거의 모든 도식을, 말 그대로 '해체'시킨다. 유괴된 아이 찾기 드라마 따위는 아예 벌어지질 않는다. 아이의 가족은 영화 말미 등장하나, 얼굴들조차 선명히 드러나질 않는다. 범죄 조직의 미화는커녕 묘사 자체도 별로 없다. 살인도 거의 고작 두 명이 시체로 등장할 뿐, 살해 장면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경찰 관련 흥미진진한 에피소드가 있긴 해도, 그 또한 내러티브 주변부에 머무른다. 영화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가 태인-창복-초희 세 중심캐릭터들을 축으로 펼쳐지는 관계의 휴먼 드라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초희 캐릭터도, 문승아 연기도 역대급이다. 내게 올해의 여자배우는, 아역의 한계를 붕괴시킨 이 미성년자다! 이병헌도 엄지 척이긴 하나, 내게 올해의 남자 배우도 유아인이다! 이 영화 없는 2020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최근 어느 원고에서 내 역대 한국영화 베스트 8위작으로 위치시켰다면, 내 열광을 이해할까. 그야말로 '괴물 신예'의 출현이다.
2.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 홍원찬
마지막 청부살인 의뢰 건을 완수한 이후 전혀 예상치 못한 새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인남(황정민)과, 그 의뢰 대상이었던 조직의 형제를 살해한 인남을 태국에까지 추격하는 무뢰한 레이(이정재), 그리고 인남의 조력자 트랜스젠더 유이(박정민) 세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하드보일드 범죄 액션물이다. 이중의 사건과 삼중의 사연을 축 삼아 펼쳐지는 플롯은, 통속적이다 못해 진부한 감이 없지 않다. <소리도 없이>와는 대조적이다. 때문에 영화는 숱한 비판‧비난을 먹어야 했다. 하나 다름 아닌 그 통속성 덕에, 코로나 19 와중에도 440만 가까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늘 그렇듯 통속성은 대중영화에는 으레 요청되는 필요조건이요 양날의 검인 것.
무엇보다 유이 캐릭터와 박정민 연기가 압권이다. 그것은 2020 제4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에서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가히 생애의 성격화(Characterization)요 열연이다. 레이와 이정재도 그렇다. 비록 < 남산의 부장들 >의 이병헌에 밀려 수상엔 실패했어도, 일생일대의 호연을 선보였다. 레이는 김지운의 < 악마를 보았다 >(2010)의 두 악마 경철(최민식)과 태주(최무성)에 필적할 희대의 악마적 캐릭터다. 그들만이 아니다. <소리도 없이>의 문승아엔 못 미쳐도, 인남 딸 유민 역의 박소이는 '아역의 발견'에 값한다. < 담보 >의 어린 승이는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혹자는 이 영화의 액션 연출이 뻔하다, 고 평한다. 하지만 내게 그 쾌감은 예외적으로 다가왔다. 기념비적 국산 액션영화 < 아저씨 >(2010, 이정범)보다 한층 더 통쾌하고 흥미진진하다. 그 임팩트나 완급의 리듬감은 이명세의 < 형사 Duelist >(2005)에 버금간다. 그래 내게 한국 액션물은 이 영화를 기점으로 나뉜다. 액션 스펙터클과 드라마의 조화도 수준급이다. 강제규의 < 태극기 휘날리며 >(2004)나 김한민의 < 명량 >(2014) 등에 비교될 만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진심이다. 동의하거나 않거나….
3. 남산의 부장들, 우민호
임상수의 < 그때 그 사람들 >(2005)이 그렇듯, 역사적 사실들과 그럴듯한 허구들을 적절히 결합해 요리해낸 팩션(Faction=Fact+Fiction)성 휴먼 드라마다. 1979년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독재의 막판으로 치닫던 대통령 박정희를 안가 술자리에서 저격‧살해한 '10·26 사태'와, 그 사태 발발직전 40일 간의 드라마틱한 사건·사연들을 극화했다. 그 토대는 가천대 교수로 재직 중인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의 동명 논픽션이다.
영화는 475만 여명을 동원하며,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를 제치고 2020년 종합 박스 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 코로나 19 탓에 국내, 아니 세계 영화시장이 초토화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대기록이다. 그 역사적 역병만 아니었다면 <기생충>에 이어 20번째 국산 천만 영화로 등극됐지 않았을까, 싶다. 비평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주요 영화상 중 그 포문을 여는 부일영화상(29회) 때만 해도 남우주연상(이병헌)과 남우조연상(이희준)에 만족하고 최우수작품상은 < 벌새 >(김보라)에, 감독상은 < 유열의 음악앨범 >(정지우)에 넘겼었다. 하지만 영평상에서는 남우주연상 외에도 영예의 작품상까지 가져가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 파란은 한 동안 지속될 전망이다.
이 영화,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처럼 연기와 성격화가 단연 주목감이다. 죄다 명불허전들이다. 이병헌-이희준-이성민 등의 연기 '케미'가 일품이다. 이성민의 '박통' 싱크로 율에는 감탄을 거듭하지 않을 길 없다. < 보헤미안 랩소디 >(2018)의 라미 말렉(프레디 머큐리)에 비견될 만하다. 김재규를 재현한 김규평 캐릭터도 압도적이다. 김재규의 현현, 이라 한 만하다. 그 점은 김재규의 유족들도 인정‧상찬한다. 덕분에 감독은 적잖이 흔들렸던 전작 < 마약왕 >(2018)의 부진을 극복하고, 출세작 < 내부자들 >(2015)로 복귀하는데 성공한다. 호불호가 꽤 갈리기는 하나, < 남산의 부장들 >은 여로 모로 '2020년의 영화'로 손색없다.
4. 바람의 언덕, 박석영
상기 세 영화는 예산의 구체적 액수를 떠나, 다들 대중영화들이다. < 소리도 없이 >의 경우 순제작비 13억으로 상대적 저예산이긴 해도, 이 영화의 8천만 원에 비하면 '거액'이다. 게다가 영화건 TV에서건 잘 나가는 스타급 연기자들인 유아인 유재명 등이 영화의 안팎을 든든히 떠받쳐준다. < 바람의 언덕 >은 오랫동안 지병을 앓던 재혼한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의붓아들을 남겨두고 고향 태백을 찾는 중년 여인 영분(정은경)과, 태백에서 필라테스 학원을 운영하며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품고 살면서도, 엄마가 눈앞에 나타나도 정작 그 이가 엄마인 줄도 모르는 한희(정선) 두 모녀 이야기다.
감독은 여성 아닌 남성이다. 박석영. 가출 소녀들의 '길 위의 삶'을 극화한 '들꽃 3부작', < 들꽃 >(2015) < 스틸 플라워 >(2016) < 재꽃 >(2017)의 감독이다. 봉준호가 < 기생충 >의 지하실 남자 근세 박명훈을 발견한 것도 < 재꽃 >을 통해서였다고. 내가 그의 영화를 스크린에서 제대로 본 것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조우한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부산영화제 등 국내외 숱한 영화제들을 통해 크고 작은 화제를 불러일으켜온 주인공이었건만 말이다. 남성 감독이 연출했건만, 모녀 간에 서서히 형성돼 나아가는 여성연대는 가슴이 먹먹하리만치 아름답고 의미심장하다. 흔히 모성은 본능적‧맹목적이라고는 하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영화는 웅변한다. 독립적 개별 여성으로서 존재감도 그 못잖게 중요하다는 것. 정선경과 정선은, 내가 경험한 최고의 모녀 연기다. 영분과 한희는 최상의 모녀 캐릭터들이고.
실은 그들 모녀만이 아니다. 의붓아들 용진(김태희)도 그렇거니와, 영분의 더할 나위 없는 말동무인 택시기사 윤식(김준배)도 자못 인상적이다. 어느 리뷰(2020 제8회 무주산골영화제)에서도 짚었듯, “감독은 자칫하면 신파가 될 수 있는 소재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능숙하게 풀어낸다. 대사보다는 비언어적인 요소가 이들의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가 된다. 영화는 한겨울의 태백이 배경이지만, 서늘하기보단 포근하다. 이들 삶에 분명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내게 2020년 단 한 편의 우리 독립영화는 이 영화다.
5. 이장, 정승오
< 바람의 언덕 >에 이은 내 두 번째 독립영화 후보들은, 당연히 한둘이 아니었다. 홍상수의 < 도망친 여자 >는 감독 특유의 반복과 변주가 흥미로웠으나, < 풀잎들 >(2018)이나 <강변호텔>(2019) 같은 직전작들에서 확장된 지점들이 부재했다.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2020년의 한국 독립영화'인 < 남매의 여름밤 >은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긴 하나 지나치게 무난해, 나를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다. 막판까지 < 이장 >과 자리다툼을 벌인 < 69세 >(임선애)는, 연출의 치밀함 등에서 와 닿았지만 69세 여성 주인공을 노인 취급하는 접근이 영 마땅찮아 최종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 작은 빛 >(조민재)도 < 69세 > 못잖았으나, 이미 부일영화상 신인감독상을 안은 터라 다른 영화에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에서 택하질 않았다. < 기도하는 남자 >(강동헌)도 주목할 만한 문제작이나, 결말부 처리가 다분히 안일하지 않나 싶어 배제했다.
< 이장 >은 죽은 이의 무덤을 옮기는 '이장'(移葬)을 계기로 펼쳐지는, 어느 가족 3대의 '웃픈' 드라마다. 영화는 2대인 4녀 1남, 그 중에서도 4인4색인 4녀를 중심으로 전개되나 1남의 사연도, 4녀 중 맏언니 아들의 이야기도, 자식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큰 아버지 내외의 언행도 주목에 값한다. 그 모습들은 외면하기 힘든, 우리들의 가족 초상화일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는 영화의 으뜸 덕목은, '막장'인 듯 막 나가면서도 끝내 가족이라는 '연대'를 저버리지 않는 영화의 선택. 영화를 관류하는 그 '정감'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면서, 기대 이상의 여운을 남긴다. 8인으로 이뤄진 그 가족 3대 이야기에 1남의 전 애인이 등장, 가세하며 드라마의 넓이와 깊이가 한층 더 확장되고 심화된다. 주‧조연할 것 없이 총9인의 연기 '케미'도 눈길을 끌기 모자람 없다. 봉준호의 < 기생충 >과 비교를 하고 싶은 것은 그래서다. 1남 승락 역의 곽민규는, 영평상 신인남우상을 받았는바, 나머지 8인도 수상감으로 부족함 없다. 그 9인 캐릭터와 연기를 '요리'하는 감독의 솜씨는, 신인이라고 믿기 어려운 수준을 뽐낸다. 그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 이장 >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