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는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Best Original Score) 부문 수상작 선정에 이변이라 할 수 있는 결정을 연거푸 내렸다. 1981년 제53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마이클 고어(Michael Gore)가 영화 < 페임 >(Fame)에 쓴 경쾌한 팝 스코어로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 스타워즈: 에피소드 5-제국의 역습 >(The Empire Strikes Back)을 누르고 수상의 영광을 가져간 것이 그 시초. 이듬해인 1982년에는 방겔리스(Vangelis)의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가 전자음악 스코어로 다시 한번 윌리엄스 경의 < 레이더스 >(Raiders of the Lost Ark)를 꺾는 파란의 주인공이 되었다. 1989년 재즈 피아니스트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이 < 반항의 계절 >(The Milagro Beanfield War)로 수상하기까지, 오스카 음악상에도 시류를 반영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987년 개봉한 < 라운드 미드나잇 >(Round Midnight)은 1950년대 파리 재즈클럽을 배경으로 한 음악가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베르트랑 타베르니에(Bertrand Tavernier)가 감독하고 타베르니에(Tavernier)와 데이비드 레이피엘(David Rayfiel)이 각본을 썼다. 주인공 데일 터너(Dale Turner) 역에는 실제 재즈 테너 색소폰 연주자 덱스터 고든 (Dexter Gordon)이 출연했다. 버드 파웰(Bud Powell)과 레스터 영(Lester Young)의 삶을 하나의 캐릭터로 결합한 주인공은 술과 마약에 빠져 보낸 지난날을 청산하고 생 제르맹의 전설적인 블루 노트 클럽에서 연주하며 삶을 개선하려 한다. 어느 날 밤 터너는 자신의 전성기 팬이었다고 하는 한 남자를 만난다. 프랜시스 볼러(Francis Borler)라는 이 남자는 이혼 후 딸과 함께 근근이 사는 그래픽 디자이너. 점차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음악에 대해 투영한다.
덱스터 고든과 함께 영화에는 실제 재즈 명인들이 대거 출연했다. 에디 웨인 역에 허비 행콕을 위시해, 재즈 비브라폰과 마림바 연주자 바비 허처슨(Bobby Hutcherson), 재즈 드럼연주자 빌리 히긴스(Billy Higgins), 기타에 존 맥러플린(John McLaughlin), 베이스에 피에르 미슐로(Pierre Michelot), 재즈 색소폰 연주자 겸 작곡가 웨인 쇼터(Wayne Shorter), 재즈 더블 베이시스트 론 카터(Ron Carter), 베이스 매즈 빈딩(Mads Vinding), 재즈 드러머 토니 윌리엄스(Tony Williams), 재즈 트럼펫에 쳇 베이커(Chet Baker)와 프레디 허버드(Freddie Hubbard) 그리고 에릭 르 랑(Éric Le Lann), 팔레 미켈뵈르그(Palle Mikkelborg), 재즈 피아니스트 시더 월튼(Cedar Walton) 등이 그 면면들. 셀로니어스 몽크(Theolonious Monk), 조지(George)와 아이라(Ira) 거쉰(Gershwin) 형제, 버드 파웰(Bud Powell)과 같은 재즈 전설들의 명곡을 특선으로, 당대의 걸출한 재즈 아티스트들이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연기 자욱한 재즈클럽에서 울려 퍼지는 정통 재즈와 명연주자들의 잼 세션은 그야말로 명불허전.
론 카터의 베이스에 핸콕의 예술적인 피아노 반주와 바비 맥퍼린(Bobby McFerrin)의 감성과 영혼을 울리는 스캣이 구성진 타이틀 트랙 'Round midnight'부터, 고든의 색소폰 연주가 피아노, 드럼, 베이스, 기타의 반주 속에서 호소력을 더하는 'Body and soul'(터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프랜시스가 어둠 속에 떨고 있는 베랑제르를 안아주는 장면에 깔린 'Bérangère's nightmare #2'에 이어서 반주), 바비 허처슨의 비브라폰과 웨인 쇼터의 테너 색소폰이 핑거 스냅과 어울려 명랑하고 흥겨운 'Una noche con francis'(터너가 프랜시스를 친구라며 블루 노트에 데려올 때 연주), 로넷 맥키(Lonette McKee)의 아름답고 감성적인 보컬이 실린 거쉰의 'How long has this been going on?', 쳇 베이커의 풍부한 트럼펫 독주가 압권인 스윙 곡조의 'Rhythm-a-ning'(딸과 식사 중인 터너에게 마약상이 말을 건네고 간 뒤 이어지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사운드트랙에 고스란히 녹아든 음악성은 가히 독보적이다.
영화의 표제곡인 'Round midnight'는 셀로니어스 몽크가 1944년에 쓴 기성 명곡. 'Body and soul'은 자니 그린(Johnny Green) 작곡, 에드워드 헤이먼(Edward Heyman), 로버트 사워(Robert Sour), 프랭크 이튼(Frank Eyton)이 작사한 1930년 곡이고, 'Rhythm-a-ning'은 1957년에 몽크가 쓴 곡이며, 'How long has this been going on?'은 1928년 무대 뮤지컬 “퍼니 페이스”(Funny Face)를 위해 조지와 아이라 거쉰이 곡과 가사를 썼다. 영화에 사용할 목적으로 새롭게 쓴 곡은 'Bérangère's nightmare', 'Still time'(터너와 프랜시스가 친구가 된 후 둘의 일상을 보여주고, 터너가 흑인 공동주택에 살던 과거사를 들려주는 장면까지), 'Chan's song(never said)'(터너가 객석에 앉은 프랜시스의 딸에게 바친 곡)가 전부다. 허비 행콕이 쓴 오리지널 스코어로 세 번째 곡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와 공동 작곡했다.
Bérangère's nightmare'(프랜시스가 만취해 차 위에 쓰러져있는 데일 터너를 찾아가는 긴박한 장면)는 펑크(funk) 풍의 신경질적인 사운드가 특징. 손가락으로 튕겨서 내는 더블베이스의 흥분된 사운드, 초조한 트릴(trill) 주법 피아노, 불안한 스네어 드럼 리프, 그리고 끈질기게 맥동하는 전기기타 반주의 합은 영화음악가 랄로 쉬프린(Lalo Schifrin)이 쓴 1960년대 재즈 스타일 스코어와 실험적인 현대음악 양식에 기반했다. 'Still time'은 감상적이며 서정적인 피아노 솔로를 중심으로 덱스터 고든의 가슴 저미는 소프라노 색소폰 솔로가 압권. 'Chan's song(never said)'는 부드럽고 매우 차분한 분위기 속에, 경쾌한 피아노 반주에 실린 로맨스의 감성, 그리고 바비 맥퍼린의 보컬 스타일링에서 프랑스 뉴 웨이브의 터치가 분명히 감지된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과 보컬이 담긴 'Fair weather', 데일 터너가 프랑스로 건너와 블루 노트에서 처음 연주하는 'As time goes by', 프랜시스가 비를 맞으며 듣던 'Society red', 허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건물 뒤편에서 'Autumn in new york', 프랜시스와 같이 파리로 돌아가기로 한 터너가 공항에 오지 않는 장면을 반주하는 'The peacock', 터너가 프랜시스의 집에서 식사 후 산책하는 장면에 쓰인 'Minuit aux champs-elysées' 등도 간과할 수 없는 트랙.
여러 면에서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실린 음악은 '전통적인' 스코어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재즈이기 때문에 전통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절대적으로 훌륭한 재즈 악보가 많이 있었기 때문. 동시에 그 자체로 극의 서사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기존의 오리지널 스코어 양식과 별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주로 블루 노트의 무대에서 극 중 등장인물들이 연주해 나오는 디제시스적 음악이라는 점에서는 내러티브의 구성요소로 감정이나 이야기를 전달하는 극적인 보조로 기능하기 위해 쓰인 외삽적 전통 스코어와는 엄밀히 차이가 있다. 음악은 실제로 극 중 등장인물의 일상생활에 존재하는 내재적 요소다. 듣고 느끼고 라이브 음악으로 일관되게 캐릭터들을 감싼다. 서사구조 내에서 그야말로 순수한 음악 그 자체로 공연을 통해 나오며 관객은 객석의 손님이 되는 것이다. 극의 이야기 구조에 밀착해 연주되는 '재즈 스탠더드'는 행콕이 편곡했으며, 198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재즈 음악가들의 합주로 완성되었다.
영화 < 라운드 미드나잇 >의 감동은 대사나 말이 아닌 음악에서 나온다. 프랑스의 블루 노트라는 공간이 주는 상징성과 거기서 우연히 만난 낯선 팬과의 우정,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재즈를 고스란히 체화해낸 덱스터 고든의 극 중 삶과 연주가 곧 영화의 핵심이며 주인공이다. 라이브로 녹음된 재즈클럽에서의 생생한 공연영상에 담긴 재즈의 모든 것.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재즈를 알려고 할 필요도 없이, 영화는 그 자체로 관객이 알아야 할 재즈를 온전히 전해준다. 아카데미(Academy)와 골든 글로브(Golden Globe)가 허비 행콕과 함께 덱스터 고든을 남우주연상 후보로 지명한 이유, 바로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사운드트랙 음반 수록곡 목록 -
01. Round Midnight 자정 즈음에 (셀로니어스 몽크 Thelonious Monk, 버니 해니건 Bernie Hanighen, 쿠티 윌리엄스 Cootie Williams)
02. Body and Soul 육체와 영혼 (에드워드 헤이먼 Edward Heyman, 로버트 사워 Robert Sour, 프랭크 이튼 Frank Eyton, 자니 그린 Johnny Green)
03. Bérangère's Nightmare 베랑제르의 악몽
04. Fair Weather 맑은 날씨 (케니 도헴 Kenny Dorham)
05. Una Noche Con Francis 프랜시스와 함께 한 밤 (버드 파웰 Bud Powell)
06. The Peacocks 공작 (지미 롤즈 Jimmy Rowles)
07. How Long Has This Been Going On? 얼마나 오래 지속됐어? (아이라 거쉰 Ira Gershwin & 조지 거쉰 George Gershwin)
08. Rhythm-a-Ning 리듬-어-닝 (셀로니어스 몽크 Theolonious Monk)
09. Still Time 변화 없이 조용하고 차분한
10. Minuit aux Champs-Elysées 자정 오 샹젤리제 (앙리 르노 Henri Renaud)
11. Chan's Song (Never Said) 찬의 노래(한번도 말하지 않은) (스티비 원더 Stevie Wonder & 허비 행콕 Herbie Hanc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