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앨범이 바로 한국 퓨전 재즈의 대가로 꼽히는 빛과 소금의 데뷔작 < 빛과 소금 Vol.1 >(1990)이다. 많은 이들을 뭉칠 수 있는 단단한 구심점이 필요할 시점에 떠올라, 세월을 초월해 여전히 세련되고 여유로운 멜로디와 작법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공전의 히트곡 '샴푸의 요정'은 이후 수많은 후배 아티스트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그 인기를 입증하기도 했다.
마침내 팬들의 오랜 기다림과 성원에 답하기 위해 빛과 소금이 26년 만에 정규 6집 < Here We Go >로 돌아왔다. 복귀에 앞서 긴 공백기와 새로운 작품에 대해 쌓인 궁금증을 풀기 위해 논현동에 위치한 사운드트리 사무실에서 회동을 가졌다. '빛과 소금을 사랑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하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언급처럼, 짧은 대화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적인 자세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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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이 정규 6집으로 돌아왔다. 1996년에 5집 < 천국으로 >를 발표한 후로, 자그마치 26년 만의 복귀인데.
장기호 : 1996년 < 천국으로 >는 내가 유학을 떠나 버클리 음대에 재학 중일 때 제작된 음반이다. 그 뒤로는 이제 박성식 씨가 2002년에 호서대학교 실용음악 학과의 책임 교수로 취임하게 되고, 나도 2004년부터 서울예술대학의 실용음악 학과 전임 교수로 들어가게 되다 보니 당시에는 같이 음반 작업을 하거나 공연 활동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빛과 소금은 계속 살아있었으니까, 이렇게 또 활동할 수 있지 않나.
박성식 : 조금 더 변명하자면 1998년에 닥친 IMF 사태로 음악계에 초강력 한파가 불어닥친 상황이기도 했다. 앨범을 만드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뮤지션들은 당장 끼니 걱정을 하고 있을 때다. 그런 시기를 보내다 교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학교 일을 하다 보니 장기호 씨와 같이 모여 의견을 논하고 공연을 도모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 시스템에 놓여 있다 보니 2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먼저 팬 분들께 용서를 구하고 싶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났다. 26년 동안 새로운 음악을 들려드리지 못해 참으로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오랜만의 복귀인 만큼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이번 앨범이 원래 빛과 소금 결성 30주년을 맞이한 기념음반으로 알고 있다.
장기호 : 맞다. 사실은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인 2019년도에 3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우정도 기념할 겸 무언가 준비해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있었고, 처음에는 공연을 준비해볼까 하다가, 기록을 남기는 게 낫겠다 싶어 기념 음반을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한 곡씩 제작해 두 곡만 실을 예정이었다. 그때 마침 시티팝 붐이 일면서 빛과 소금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기 시작했고, LP 리이슈와 완판 소식이 점차 들려 오기 시작하니 부랴부랴 앨범으로 준비하게 되었다. (웃음)
박성식 : 20주년 때도 새 앨범은 내지 못했지만 기념 공연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앨범도 빛과 소금을 사랑하고 응원해준 팬들에게 조금이라도 보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기획되었다. 다만 코로나가 문제였다. 이제 교수 생활도 20년 차에 접어들어 시간 조율도 원활해지고 제작비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상황이었는데 팬데믹이 뒷덜미를 잡아챈 셈이다. 그러다 보니 녹음은 작년 여름에 다 끝낸 상황이었지만, 발매 자체는 조금 더 늦어진 2022년이 될 수밖에 되었다. 지금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어 너무 기쁘게 생각한다.
이번 앨범은 전작과 제작 방식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장기호 : 물론 둘이 같이 만든 작품이지만, 공동 프로듀싱을 하던 과거와는 다르게 자기 곡은 자신이 직접 맡았다. 이유는 제작비 때문이었다. 음반 지원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각자 투자를 받아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나름의 자생을 물색했다.
박성식 : 제작비는 각자 부담했지만, 피아노와 보컬 및 코러스, 베이스기타는 서로 품앗이 연주 세션을 해주기도 했으니 여전히 빛과 소금의 작품이기는 하다.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장기호 : 그래서 이전 음반보다도 장기호만의 색깔, 그리고 박성식만의 색깔이 더 부각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1집 < 빛과 소금 Vol.1 >이 시티팝 붐과 LP 시장의 부흥의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박성식 : 아마도 우리가 추구하는 음악의 성격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1986년도에 활동했던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때에도 그랬지만, 빛과 소금이 결성될 시기에는 더욱 새로운 스타일의 가요, 그러니까 다들 한국 대중 음악의 뉴 웨이브(New Wave)를 만들겠다는 열정이 충만한 분위기였다. 퓨전 스타일의 가요를 만들고 연주하는 밴드를 추구했기에 당시에는 우리의 음악이 다소 낯설어 크게 어필하지 못한 것 같은데, 지금에야 오히려 대중들에게 더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너무 앞서간 음악이어서 오늘날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 같다. 너무 감사하다.
장기호 : 사실 '샴푸의 요정'이 처음 나왔을 때 당시 연예계 기자들이 남긴 말을 보면 '빛과 소금이 다 좋은데, 아쉬운 점은 대중성이다'라는 말이 많았다. 그래도 오늘날에 이르러 '샴푸의 요정'을 두고 리메이크가 많이 이뤄지는 걸 보면 '아, 이제는 어렵게 느끼지는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또 어떻게 보면 젊은 친구들이 시티 팝과 함께 디깅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보다 바이닐이 지닌 레트로 감성에 뛰어들면서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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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곡 'Blue sky'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장기호 : 타이틀은 'Blue sky'라는 곡인데, 원래 음원에 넣으려고 한 노래가 아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내용 중에 '선법 작곡법'이라는 파트가 있는데, 서양의 대중 음악에는 모드(Mode) 곡이 굉장히 많다. 그 당시 모달 컴포지션(Modal Composition) 관련된 교재를 만들면서 샘플로 만들어 실은 곡이다. 마침 내 작품이니까 이걸 좀 더 완성해서 앨범에 수록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하게도 한국어와 영어 버전이 구분되어 있다.
장기호 : 처음 작업할 때부터 영어로 만들었던 곡이라서 먼저 써둔 영문 가사를 번역해 우리말로 가져왔다. 영어로 부르는 건 글로벌 친화적인 자세를 취하자는 느낌이었고 한국 사람이니까 우리의 노랫말도 당연히 필요했다. 근데 한편으론 오히려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하는 걸 외국 사람들이 더 매력적으로 느낀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양쪽 모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두 개 언어 모두 채택하게 됐다. 언어가 좀 더 됐으면 일본어도 하고 싶고 중국어도 해보고 싶다.
확실히 대중적인 곡 진행을 따르지는 않는 것 같다.
장기호 : 대중의 취향을 고려하기 전에 '나'의 음악에 중점을 두는 편이다. 내 아이덴티티가 드러나는 음악을 하는 습관이 있고, 이는 빛과 소금의 정체성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 때문에 지금의 빛과 소금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우선 편곡적인 장치가 많이 들어간다. 대위법적인 요소도 들어가고, 리듬도 재미있지만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우리 음악의 특징은 듣고 따라 부르기 쉽지만 반주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항상 공연할 때 연주자를 섭외하기가 까다로운 편이다.
두 번째 트랙 '오늘까지만'은 박성식 씨가 보컬을 맡았다.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알앤비 스타일의 곡인데.
박성식 : 서둘러 떠나려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을 배려해달라는 호소를 담은 곡이다. 그동안 빛과 소금의 곡들은 주로 장기호 씨가 노래를 맡았지만, '오늘까지만'은 내가 맡은 곡인 만큼 메인 보컬을 담당했다. 그리고 젊은 뮤지션들, 프리스타일 래퍼의 일인자인 서출구 씨가 간주와 코러스 파트의 랩을, 재즈피아니스트이자 같은 대학의 최현우 교수가 멋진 피아노 연주를 맡아 이 노래를 빛내주었다.
그 뒤에 나오는 '필라마네'는 상당히 발랄하고 경쾌하다. 어떤 배경이 있는지.
장기호 : 한 7~8년 전 학교 교수로 재직할 당시 방학 기간에 인도로 단기 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한 고아원에 들렀는데 그 친구들이 이제 커서 지금은 뭐 하면서 살고 있을지 회상하는 내용을 담았다. '필라마네'는 밥 먹을 시간이 되면 선생님이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다. 그러면 애들도 필라마네하고 대답한다. 이걸 모티프로 삼아 가사와 멜로디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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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CCM 트랙 '우리 모두에게'와 조용하면서도 유려한 피아노 인스트루멘탈 '비오는 숲'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박성식 : 아시다시피 빛과 소금은 1집부터 가스펠 송을 한 곡씩 꼭 넣어온 크리스천 밴드다. '우리 모두에게'는 지난 30년간 밴드를 인도해주신 하나님과 팬 여러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곡이다. 그래서 팬클럽 회장 두 분과 밴드를 30년간 묵묵히 도와준 디자이너 권성환 작가님, 퍼커셔니스트 정정배 선배님, 그리고 내 곡의 코러스를 맡은 보컬리스트 김정국 씨의 5살 딸아이 김지온 어린이 등 많은 사람을 초청해 자리를 빛내달라고 요청했다. '비오는 숲'은 변화무쌍한 디지털 세상 속 지나간 과거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곡이다. 듣는 이가 지친 마음을 달랬으면 하는 마음에, 고요하고 평온한 숲에 부슬부슬 내리는 향긋한 비를 생각하며 만들었다.
'사랑의 묘약'은 80년대 컨트리 록, 서던 록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박성식 : 지금까지 빛과 소금이 추구하지 않았던 장르다. 중고등학교 때 듣고 열광했던 음악에 대한 향수나, 사랑에 충실했던 순수한 시절을 편안하게 노래하고 싶었다. 그룹 '11월'에서 기타와 보컬을 담당했던 장재환이 메인 보컬로 참여했다.
제작하면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나 아티스트가 있는지.
장기호 : 편곡적인 면에선 가장 깔끔하면서도 지적이고 로맨틱한 사운드를 내는 스틸리 댄(Steely Dan),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이클 프랭크스(Michael Franks)의 발랄하면서도 상큼한 스타일, 그 속에서도 블루지한 맛은 놓치지 않도록 늘 신경을 많이 썼다.
박성식 : 나의 경우에는 특정 아티스트로는 못 꼽을 것 같다. 팝의 황금기라 불리는 1970~1980년대에 청소년기와 이십 대를 보내며 그 당시 들었던 음악들, 그리고 엄청난 업적을 남긴 수많은 뮤지션 모두를 스승 삼았다.
이번 앨범을 두고, 팬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장기호 : 우선 빛과 소금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 너무 음악적인 컬러를 바꾸면 '나이 먹더니 변심했나 봐'하는 얘기도 들을 것 같아서. (웃음) 기존의 성향 그대로 유지하려 했던 것 같고. 빛과 소금의 음악을 알고 있는 분들에게 오랜만에 바치는 선물이라 보면 좋을 것 같다.
박성식 : 그냥 편안하게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20대 후반에 시작했던 빛과 소금과, 환갑이 지난 지금의 빛과 소금 모두 세월만 흘러갔지 달라진 것은 없으니까. 오히려 젊었던 시절보다 훨씬 더 여유 넘치고 자연스러운 여백을 담았기에 자신 있게 들려드릴 수 있다. 6집이라 더 특별한 것은 없다. 편하게 들으시고, '음, 역시 빛과 소금이야'라며 미소 보낸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진행 : 임진모, 장준환
사진 : 사운드트리 제공
정리 : 장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