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기세가 조금씩 저물자 삭막했던 극장가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구촌 곳곳에는 흥미로운 작품 소식들이 당차게 고개를 내미는 추세다. 이러한 스크린 흐름에 발맞춰 IZM이 무비(Movie)와 이즘(IZM)을 합한 특집 '무비즘'을 준비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의 명예를 재건하고 이름을 기억하자는 의의에서 매주 각 필자들이 음악가를 소재로 한 음악 영화를 선정해 소개한다. 세 번째는 슈프림스의 일대기를 각색한 영화 < 드림걸스 >다.
전설의 그룹 슈프림스는 미국 흑인음악의 태동기를 찬란하게 수놓았다. 수십 년 전 브로드웨이는 < 드림걸스 >란 이름의 뮤지컬로 이들을 추억했고, 2007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는 비욘세를 비롯한 출연진이 원작을 실감 나게 재현하며 그 명성을 이어갔다. 이 트리오를 모티브로 한 드림걸스 서사는 드라마틱한 슈프림스의 명암을 저릿하게 비추는 동시에 디트로이트 내전 등 인종차별로 얼룩졌던 당시 미국의 사회상을 치밀하게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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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음악 제국의 발자취를 따라 디트로이트로
슈프림스 1기 멤버 다이애나 로스, 플로렌스 발라드, 메리 윌슨을 각 등장인물에 투영한 드림걸스. 이들 역시 자동차 산업이 발달한 미국 동부의 모터 타운(Motor town) 디트로이트에서 싹을 틔운다. 슬럼가 공연장을 전전하며 가수의 꿈을 키우던 이들은 레코드사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를 모티브로 한 커티스 테일러 주니어의 눈에 들고, 그와 함께 '우리의 아티스트, 돈, 음악으로 백인들에게 먹히는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자!'고 천명하며 대중음악으로의 침입을 시도한다.
장대한 포부와 달리 고난의 행군이 이어진다. 과거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은 '할리우드에서 넌 환영받지 못해'라는 대사로 치환되고, 백인들에게 첫 선을 보인 마이애미 무대에선 '노래도 듣고, 이들이 청소도 하고 갈 테니 일석이조네요!'라는 조롱이 들리기도 한다. 심지어 한 백인 스탠더드 팝 가수가 극 중 유명 흑인 뮤지션인 지미 얼리의 히트곡 'Cadillac car'를 표절하며 인기를 갈취하는 장면도 등장해 당대 흑인음악계의 척박한 현실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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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맞서 정상에 오르기 위해, 치밀한 비즈니스의 양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정정당당한 경쟁은 불가능한 법,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차별에 분개한 커티스는 자신의 제국을 정상에 올려놓기 위해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Fake your way to the top'과 'Step into the bad side'가 암시하듯 도박과 불법 투기장을 통해 자금을 동원하고, 나아가 유명 라디오 디제이들에게 돈을 주고 전파를 따내는 페이올라(Payola)까지 감행한다.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긴 했지만 사업가로서의 수완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주 소비층인 백인들의 니즈를 파악한 커티스는 가벼운 메시지와 대중적인 멜로디로 노선을 우회한다. 유려한 팝을 가미한 새로운 흑인음악 위 경쾌한 사랑의 전도사로서 팀의 정체성을 굳혀간 것. 백업 세션에서 대표 아티스트로 올라선 드림걸스는 단숨에 미국 각지를 휩쓸었고 메인스트림을 향한 이들의 꿈은 점차 현실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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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중음악의 자존심을 수호한 히로인 슈프림스
히트곡 'Dreamgirls'로 정점에 올라선 드림걸스의 모습은 마빈 게이 등 소속사 선배의 백업 코러스로 출발했던 슈프림스와 겹쳐지는 대목이다. 그들도 조연을 벗어나 작곡 트리오 HDH(홀랜드-도지어-홀랜드)가 지어낸 '모타운 사운드'의 뮤즈로 완벽하게 자리하며 미디어와 대중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다이애나 로스가 팀을 떠나며 사실상 해체될 때까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10번 이상 오르며 당대 최고의 그룹으로서 기세를 드높였다.
브리티시 인베이젼을 상징하는 비틀스의 첫 미국 앨범 < Meet The Beatles >가 북아메리카에 상륙한 시점에서 이들과 견줄 수 있었던 아티스트는 슈프림스뿐이었다. 네 영국 신사들이 당도한 1964년, 슈프림스는 'Where did our love go', 'Baby love', 'Come see about me'로 빌보드 정상을 세 번이나 차지하며 농익은 인기를 증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타를 메고 대서양을 건너온 신대륙 점령자들로부터 본토의 자긍심을 지킨 영웅은 멸시받던 흑인 여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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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못했던 슈프림스의 와해, 그리고 드림걸스의 해피엔딩
영예로운 성공의 이면에는 음침한 모략이 드리운다. 프로듀서 커티스는 흑인을 넘어 전 인종을 대상으로 '상품 드림걸스'를 팔고자 했고 빼어난 외모와 유려한 목소리를 갖춘 디나 존스를 그룹의 얼굴로 밀기 시작한다. 결국 소울과 강렬한 애드리브로 초기 리딩 보컬을 담당했던 에피 화이트는 팀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는 솔로 활동으로 재기를 열망하나 커티스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백인들에게 당했던 표절을 모방해 에피의 곡과 인기를 가로채는 비열한 비즈니스로 드림걸스의 명예에 상처를 입힌다.
실존하는 슈프림스의 결말은 영화보다 더 극적으로 치달았다. 고등학교 동창 출신 아마추어 밴드 '프리메츠'부터 함께 해온 세 사람 역시 유사한 이유로 반목을 주고받았다. 모타운 사운드는 기존의 메인보컬 플로렌스 발라드 대신 팝 멜로디에 더 적합한 다이애나 로스를 메인에 내세웠고 심지어 그룹명까지 '다이애나 로스 앤 슈프림스'로 변경했다. 1969년 이들의 히트곡 'Someday we'll be together'와 다르게 세 여인은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 일련의 결과로 팀에서 방출당한 플로렌스는 알코올 중독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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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림걸스 >의 감독 빌 콘돈은 슈프림스가 이루지 못했던 화합의 미래를 스크린 위에 집필하여 그들을 아름답게 추억한다. 'And I am not telling you I'm not going', 'One night only'로 이어지는 에피 화이트의 독백은 플로렌스가 겪었던 처절한 아픔을 대신 어루만지고, 디나 존스는 'Listen'으로 다이애나의 죄책감을 덜어낸다. 엔딩곡 'Dreamgirls finale' 또한 한 자리에 다시 뭉친 세 사람의 하모니로 현실과는 다른, 모두가 염원하던 해피엔딩을 선사한다.
냉혹한 환경을 딛고 써내려간 흑인 음악의 1페이지는 훗날 동족의 전성시대를 여는데 크게 일조했다. 영화처럼 행복한 마무리를 맺지 못한 슈프림스에게 동상이몽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유산을 전해받은 후대들은 고난의 시대에 이뤄낸 눈부신 위업에 존경과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꿈을 노래한 걸그룹'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이 있을까. '드림걸스', 진흙에서 만개한 희망의 꽃 슈프림스를 향한 완벽한 수식어다.
- 영화에 사용된 음악 목록 -
1. Move (Highlights version)
2. Fake your way to the top
3. Cadillac car
4. Steppin' to the bad side (Highlights version)
5. Love you I do
6. I want you baby
7. Family
8. Dreamgirls
9. It's all over (Highlights version)
10. And I am telling you I'm not going
11. When I first saw you
12. Patience
13. I am changing
14. I meant you no harm/Jimmy's rap
15. One night only (Highlights version)
16. One night only (Disco version)
17. Listen
18. Hard to say goodbye
19. Dreamgirls finale (Highlights version)
20. When I first saw you(Du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