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은 대중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196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확산한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은 베트남전에 반한 평화주의, 자유연애, 반소비주의를 주제로 한 사회 현상이었다. 히피를 중심으로 십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한데 모였고 음악은 그들의 사상과 감정을 실어 나르는 매개체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피어오르던 사이키델릭 뮤직은 사랑의 여름과 맞물려 봉오리를 피웠고 음악 스타일, 페스티벌 등의 측면에서 대중음악사에 존재를 각인했다. 사랑의 여름의 55주년을 맞아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대중음악사의 1967년'을 살펴본다.
뮤직 페스티벌
팬데믹의 종언이 다가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뮤직 페스티벌이 부활하고 있다. 생동감과 화합이란 측면에서 음악과 페스티벌은 불가분 관계며 1960년대 말의 음악 축제들은 히피의 결집 장소였다. 1967년 1월 14일에 열린 휴먼 비인 페스티벌(Human Be-In)은 사랑의 여름의 전조(前兆)였고 권리 신장과 문화 정치의 분권화, 공동생활을 주장했다. 적극적으로 권했던 심리학자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와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가 선동을 자처했고 애시드 록의 진수를 보여준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Quicksilver Messenger Service), 초기 헤비메탈의 권위자였던 트리오 블루 치어(Blue Cheer) 등이 퍼포먼스를 펼쳤다.
1967년 6월 10일~11일 양일간 약 4만 명의 관객이 다녀간 것으로 기록된 판타지 페어 앤 매직 마운틴 뮤직 페스티벌(Fantasy Fair and Magic Mountain Music Festival)는 대규모 야외 음악 페스티벌의 시초다. 샌프란시스코의 라디오 방송국인 610 KFRC의 프로그래머 톰 라운즈(Tom Rounds)는 디온 워윅(소울), 캔드 히트(블루스 록), 최근 웹드라마 < 파친코 >에 삽입된 'Live for today'의 더 그래스 룻츠(포크 록) 등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을 섭외했고'Light my fire'로 인기를 끌던 도어즈가 관객을 홀렸다.
2년 후에 열린 우드스탁(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축제가 바로 1967년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열린 몬터레이 페스티벌(Monterey International Pop Festival) 이다. 사랑의 여름의 시작점이었던 이 페스티벌은 우드스탁과 더불어 초고밀도 라인업을 자랑했다. 첫날 금요일엔 사이먼 앤 가펑클과 에릭 버든이 이끌었던 애니멀스, 토요일엔 재니스 조플린이 프런트 우먼으로 있었던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와 포크 록 전설 더 버즈, '소울의 왕'이라고 불린 오티스 레딩이 공연했다. 노라 존스의 아버지이자 인도 음악의 성인(聖人) 라비 샹카와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Californina dreamin'의 마마스 앤 파파스와 'San Francico' 의 주인공 스콧 메켄지가 마지막 날을 장식했다.
비록 연례행사가 되진 못했으나 2017년에 50주년을 기념 페스티벌이 열렸고 노라 존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헤드라이너를 장식했다. 1960년대 대중 음악의 지형도를 그리는 출연진과 히피 문화와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로 몬터레이 팝 페스티벌은 가장 역사적인 음악 축제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명반 퍼레이드
대중음악사 최고의 해를 꼽을 때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1967년은 강력한 후보다. 영국과 미국의 밴드들은 서로 질세라 걸작을 쏟아냈고 역사에 남을 데뷔작들이 탄생했다. 1966년 같은 해에 나온 비틀스의 < Revolver >와 비치 보이스의 < Pet Sounds >로 고점에 다다른 록 음악의 실험성과 예술성은 히피와 만나 사이키델릭 록의 전성기를 열었다.
기존의 밴드들도 사이키델릭 록에 경도되었다. 비틀스는 절대 명반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를 'A day in the life',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같은 몽환적인 트랙으로 채웠고 롤링 스톤스도 바로크 팝을 차용한 < Between The Buttons >와 'She's a rainbow'가 수록된 < Satanic Majesty >로 맞대응했다.
< Pet Sounds >로 금자탑을 세웠던 비치 보이스는 < Smiley Smile >과 < Wild Honey >로 로파이와 사이키델릭을 결합했다고 흑인 싱어송라이터 아서 리(Arthur Lee)가 이끌었던 밴드 러브(Love)는 죽음을 주제로 한 컬트 명작 < Forever Changes >를 남겼다. 바다 건너 영국에선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의 슈퍼 트리오 크림이 'Sunshine of your love', 'Strange brew'가 담긴 걸작 < Disraeli Gears >로 블루스와 사이키델릭 록을 교배했다.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루 리드와 존 케일의 쌍두마차를 앞세운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앤디 워홀의 바나나 그림이 그려진 <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로 뉴욕 언더그라운드 록의 정수를 드러냈고 후대의 얼터너티브 록에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자유로운 영혼 짐 모리슨이 프론트맨으로 있던 도어즈가 'Light my fire'와 'The end'를 수록한 데뷔작 < The Doors >를 발표했고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 Are You Experienced >와 핑크 플로이드의 <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도 첫 번째 정규 앨범부터 믿기 힘든 음악성을 선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사운드
샌프란시스코엔 머리에 꽃을 꽂고 가세요(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라는 가사처럼 히피를 상징하는 도시다. 히피의 집결지 헤이트 애시베리(Haight-Ashbury) 구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밴드들의 음악적 공통분모를 샌프란시스코 사운드라고 불렀다.
일렉트릭 베이스가 일렉트릭 기타의 지위에 도전했다. 제퍼슨 에어플레인과 핫 튜나의 베이스 연주자 잭 캐시지는 기타의 뒤를 받쳐주는 관습에서 벗어나 멜로디 연주에 집중했고 그레이트풀 데드의 필 레시(Phil Lesh)와 캘리포니아 출신의 초기 사이키델릭 록 밴드 클리어 라이트(Clear Light)와 도어즈의 음반에 참여했던 덕 루반(Doug Lubahn)도 진취적 면모를 보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중반을 관통하는 로큰롤에 작별을 고했다. 비틀즈, 더 후의 브리티시 인 베이던 뿐만 아니라 시카고 일렉트릭 블루스, 멤피스와 디트로이트의 소울, 재즈에서까지 양분을 얻었던 샌프란시스코 사운드는 자유로운 코드 진행과 악기 사용의 다양화로 로큰롤의 단순한 외피에서 벗어났다.
록의 두 여제는 변화의 모태였다. 재니스 조플린과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목소리 그레이스 슬릭은 'Piece of my heart', 'Ball and chain', 'Summertime'(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과 'White rabbit', 'Somebody to love' (제퍼슨 에어플레인) 같은 블루스/사이키델릭 명작들로 록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고 후대의 많은 여성 록커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영적 체험을 고대하며 헤이트 애시베리에 갔던 조지 해리슨은 실상을 보고 크게 실망한 채 영국으로 돌아갔다. 약에 취한 사람들은 예술 활동은 커녕 몸 가누기에도 힘들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학업과 구인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며 사랑의 여름도 막을 내렸으나 히피 정신은 2년 후 우드스탁으로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매스미디어나 몇몇 사가(史家)들에 의해 부각된 긍정적 요소 이면에 여러 문제점이 있었지만 사랑의 여름이 미술과 시 등 문화 예술에 미친 영향력은 명징해 더욱 많은 예술가들의 정신 세계를 탐험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부흥한 사이키델릭 뮤직은 현재까지도 여러 장르의 밑바탕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메인 이미지: 정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