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버 이세준과 함께 운명공동체로 결속한 시간은 무려 26년. 그리고 출범부터 오늘날까지도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CBS의 대표 장수 라디오 프로그램 < 박승화의 가요속으로 >는 어느덧 11주년을 맞이하기 전이다. 롱런의 대표 아이콘 박승화와 만나 재치 넘치는 에피소드와 깊은 음악 이야기를 고루 나눴다. 연차에서 우러나오는 차분하고도 편안한 화법 덕분일까. 현장에 있던 필자들은 모두 인터뷰 내내 마치 라디오 청취자가 된 기분이었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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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디제이'로서의 박승화
< 박승화의 가요 속으로 >가 작년 10주년을 맞이했다. 소감이 어땠는지.
늘 방송국을 오고 갈 때마다 벽에 걸려 있는 선배 디제이의 골든 마우스를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꾸준히 10년, 20년 동안 할 수 있을까 깜짝 놀라곤 했다. 10년 넘게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사실 지금도 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예전보다 소통하는데 좀 더 편안해졌을 뿐이다.
그래도 잘하지 않았다면 이토록 오래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 박승화의 가요 속으로 >는 처음부터 반응이 무척 좋았다.
요즘 젊은 친구들 말로 '이불킥'을 날린다는 표현이 있지 않나. 우스운 소리지만, 첫 1년 동안은 집에 갈 때마다 오늘 라디오에서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그런 얘기를 도대체 왜 했을까 후회하고, 나를 막 꼬집고 싶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그때부터 이 디제이라는 분야를 좀 더 공부해서 제대로 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떤 노력이 있었을까.
목소리 톤도 조금 낮춰보고 쓰는 단어도 바꿨던 것 같다. 프로그램에 처음 투입되었을 때가 마흔두 살이었는데, 당시 청취자 연령대는 5~60세 이상이었으니 아무래도 디제이라기보다는 '막내' 같은 느낌이 강했다. 어린 친구가 괜히 잘난 척하고 아는 척하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배가 높은 디제이는 물론 아이돌 그룹이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전부 찾아 들으면서 멘트를 연구했다. 며칠을 내리 듣다 보니 가장 먼저 '내 얘기를 많이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더라. 청취자는 이 타이밍에 내 사연과 신청곡이 나오지 않을까 귀 기울여 듣는 게 아닌가. 내 수다는 조금 자제하고 대신 한 사람이라도 더 소개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렇다면 인기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음, 숨소리? (웃음) 사실 목소리 톤을 바꾸기로 했을 때 녹음해서 목소리 모니터링을 자주 했다. 처음에는 얇았다고나 할까. 가볍게 보이지 않기 위해 방법을 찾다가, 마이크에 가까이 대어 나지막하게 내는 방식으로 바꾸게 되었다. 훨씬 더 잘 전달되고 가까이서 소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 그게 매력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디제이를 시작하면 뮤지션 활동과 병행하기 힘들지 않나. 그 고민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오히려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신청곡을 받으면서 알지 못했던 노래들도 알게 되고 폭넓게 듣다 보니 음악에 대한 창작열이 높아진 셈이다. 물론 스케줄 문제는 있다. 방송을 제쳐두고 녹음과 공연만 다닐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해외에 나갈 때 직업란에는 어떤 것을 쓸 것인가.
디제이 겸 가수로 쓰이길 바라는데, 너무 욕심일까. (웃음) 그래도 과거에는 '유리상자'로만 불렸다면 지금은 디제이라는 명함으로 많이 불린다. 가끔 가수가 아닌 MC로 섭외되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에게 '디제이 박승화'라는 이름을 뇌리에 꽂는 데 성공한 셈이다.
사실 라디오가 과거만큼 영향력이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마니아층이 아직 있다. 라디오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불특정 다수와의 소통'이 아닐까. 나는 '소통'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좋아한다. 라디오를 진행하다 보면 많은 사연을 매일 보고 들으며 세상 돌아가는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을 알게 되고, 후배에게는 유행어를 알게 되고. 바깥을 볼 수 있는 창문인 셈이다.
선곡은 신청곡을 중심으로 움직일 텐데, 어떤 때는 본인이 듣고 싶은 노래가 있기도 하지 않나.
최대한 취향을 반영하고 싶지만, 나와 가까운 노래를 틀게 되면 청취자는 반대로 멀어진다.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는 디제이도 처음 듣는 노래나 듣고 싶지 않은 노래는 분명히 있다. 다행히도 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자제'다. 그런 면에서는 프로그램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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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유리상자'로서의 박승화
신청곡 중 유리상자의 곡은 어떤 곡이 가장 많이 들어오나.
아무래도 '사랑해도 될까요'다. 물론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보니 유리상자 노래를 많이 트는 건 반칙처럼 보여서 잘 틀지는 못한다. 솔직히 신곡이 나오면 홍보하고 싶지 않겠나. 그래도 이 또한 자제하는 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유리상자를 떠올리는 키워드는 아무래도 '축가'가 아닌가.
맞다. 사실 유리상자의 음악은 모두 축가로 써도 된다. (웃음)
박승화가 뽑는 유리상자의 축가 베스트는.
1위는 '신부에게', 2위는 '사랑해도 될까요', 3위는 < 왕가네 식구들 >에서 OST로 혼자 부른 '사랑인가 봅니다'. 결혼식장에서 다른 노래는 잘 안 불러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부르고 싶은 곡을 더 뽑는다면 2006년 발매된 9집 수록곡 '표현'이 있다. 가사가 축가 분위기와 잘 어울리고 개인적으로도 좋아한다. 그전에는 (한)동준이 형의 '너를 사랑해'나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을 많이 불렀다.
그 두 곡도 축가의 헤게모니가 아닌가. 다만 '신부에게'가 등장하면서 이전되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탄생하게 된 곡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축가 요청은 많이 받았지만 우리만의 축가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앨범에 자리도 하나 남는데 우리 축가를 만들어 넣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게 '신부에게'였다.
제작 비화가 더 있을까.
당시 앨범 녹음 중에 시인과 촌장의 함춘호 선배가 기타 연주를 도와주러 왔는데, 옆에서 계속 귀찮게 말을 걸었더니 절로 좀 가라는 눈치를 주더라. (웃음) 그렇게 자리를 떠 돌아다니다 피아노가 있는 빈 녹음실 방에 들어갔다. 마침 심심하기도 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멜로디를 몇 개 섞어 가며 편하게 치기 시작했는데, 그 자리에서 '신부에게'가 만들어졌다.
멜로디를 녹음해 들려주자 세준이도 좋다면서 바로 가사를 써서 녹음 기간이 끝나기 전에 빠르게 완성했다. 더 재미있는 건 이 노래를 녹음할 때 박학기 선배가 음료수를 사 들고 잠깐 놀러 왔는데, 타이틀 곡도 아닌 데다 우리만의 상징적인 노래를 만드는 과정이니 선배도 들어와서 노래 한 구절 불러달라 요청했고 흔쾌히 찬성을 받았다. 그 부분이 1절 후렴이다.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파트에서 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얇게 나오냐고 많이 물어본다.
또 다른 히트곡인 '사랑해도 될까요'의 경우에는 드라마 < 파리의 연인 >에 삽입되어 인기를 끌지 않았나.
심지어 그 때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처음 네 마디가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우리 노래일지 생각 못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이길래 굉장히 익숙한 곡이라고만 여긴거다. (웃음) 우리 곡인걸 알고나서 바로 세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다음 날부터 난리가 났다.
나중에 들은 사실인데, 원래 작중에서 부르는 곡이 팝송 'Moon river'였다고 한다. 촬영 들어가기 전 박신양 배우가 작가에게 가요를 부르면 안 되겠냐고 제안해서 직접 고른 곡이 '사랑해도 될까요'였다. 물론 방송 나오기 전에 그 곡이 차트 상위권에 오르기도 했지만 히트 자체는 그 드라마 덕분인거다. 이 이야기가 어떤 매체에서 어느 형태로 나오게 되면 늘 항상 박신양 씨에게 감사를 표한다.
지금까지 낸 유리상자의 앨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앨범이 있다면.
'순애보'가 들어 있는 1집이다. 세준이나 나나 둘 다 열의가 불 타오를 때라 녹음실에 있던 모든 날들이 축제 같았다. '순애보'는 김형석이 편곡한 버전이었는데 지금 유리상자 스타일과는 좀 많이 다르게 조금은 슬픈 분위기다.
다른 슬픈 노래는 없었나.
슬픈 사랑을 주제로 한 곡은 늘 만들고도, 부르고도 싶다. 한번 '여전히'라는 슬픈 곡을 7집의 타이틀로 걸어본 적이 있는데, 반응이 완전히 없었다. 소위 말해 '뽕 발라드'라고 불리는 마이너 풍의 곡이었는데, '왜 너희가 이런 음악을 부르냐'는 식이었다. 그때 절실히 느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겠구나. 물론 해소는 해야 하니까 공연 때는 가끔 부르곤 한다. 그 곳에는 이쁘게 봐주는 팬들이 가득 있으니 '너희가 이런 것도 하네' 하면서 봐주지 않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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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음악인'으로서의 박승화
가수 활동의 시작을 동아기획에서 했는데.
맞다. 유리상자로 시작하기 훨씬 전인 1993년도에 군대를 제대하고 김영 사장을 만나 운 좋게 동아기획에 혼자 입단하게 되었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 당시 동아기획이면 지금의 SM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 유명한 동아기획에서 앨범을 냈는데도 생각보다 인기가 없는거다. (웃음) 힘든 시기였다. 반응이 없다보니 계속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원래 태권도 사범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체육관 관장님을 찾아갈까 많이 갈등했던 것 같다.
내가 가수를 계속 할 수 있던 두 가지 모멘트가 있다. 첫 째는 박학기 선배와의 만남. 나에게는 친형 같은 분이다. 형은 대학로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었고 나를 항상 세션맨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공연에 투입시켰다. 통기타를 들고 나타난 나를 직계 후배처럼 느꼈나 보다. 공연 중에도 관객들에게 항상 '우리 기획사에 막내로 들어온 가수입니다' 하며 소개도 해주고, 꼭 내가 노래를 하는 시간을 마련해줬다. 용돈도 정말 많이 챙겨줬다.
또 하나는 음반 작업의 코러스를 맡게 된 거였다. 현철이의 소개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처음 맡은 곡이 이소라의 '난 행복해'다. 하다보니 잘 맞기도 하고 무엇보다 목으로 소리를 풍성하게 쌓아간다는 게 재밌기도 하고 해서 많은 곡에 코러스로 참여하며 전문 세션맨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윤도현의 '사랑 Two', 박상민의 '무기여 잘 있거라' 등등.
이세준과의 인연은 어떻게 닿았나.
1994년 포항에 갔을 때 MBC 라디오 < 별이 빛나는 밤에 > 공개 방송에서 지역 가수였던 세준이가 오프닝 무대를 하는 모습을 우연히 봤다. 기타 치면서 노래를 너무 잘하길래 연락처는 따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다시 돌아와 세션맨과 코러스 활동을 겸하다가, 2집을 마지막으로 정말 음악을 그만두려는 생각에 김평이 매니저에게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다.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에서 이틀만 공연을 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예전 박학기 선배와 함께 다녔던 것처럼 한 명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같이 공연에 설 수 있는지 제안했다. 세준이도 마침 군대를 전역한 상황이었다.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치자 이를 본 음악 매니저들이 듀엣을 권유했지만, 그 당시에는 둘다 시큰둥했다. 세준이는 혼자 노래하고 싶은 꿈이 있었고, 나는 음악을 거의 그만두려고 한 상황이었으니. 그러다 사무실에 둘이서만 같이 있게 된 적이 있었다. 세준이는 앉아서 악보집을 보며 기타를 치고 있었고, 나는 심심하니까 옆으로 가서 약속도 없이 화음을 넣기 시작했다. 얘도 날 슥 보더니 말 없이 맞추기 시작하더라. 근데 너무 잘 어울리는거다. 그 때 합을 맞춘 것이 결성의 시작이었다.
어느덧 가수 경력이 30년이 넘었다. 지금 글로벌 시장에서 활약 중인 케이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음,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케이팝이 잘 되는건 정말 좋은 현상이지만, 어떤게 잘 된다고 다들 그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지는 않았으면 한다. 자신의 영역을 꾸준히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결국 유행은 돌고 도니까. 자기를 대표하는 음악을 버리거나 함부로 시장의 대세에 합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걸 따라간다고 해서 다 잘되는건 아니더라.
요즘은 또 트로트 열풍이지 않나.
맞다. 라디오를 하면 또 가장 빠르게 느끼는게 유행이다. 시대 별 신청곡이 다르니까. 게다가 임영웅과 김호중의 곡을 틀게 되면 팬덤이 몰리기 때문에 프로그램에도 효과적이다. 그러다보니 제작진 측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거다.
박승화를 음악인으로 만든 가수가 있다면.
어릴 때 팝송, 가요 편식 없이 이것저것 들은 편이지만 전영록 형을 너무 좋아했다. 어떻게 보면 영록이 형 덕에 음악 쪽에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제일 좋아하는 곡은 '이 말을 하고 싶어요'다. 우선 형은 음악을 정말 많이 안다. 많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공부가 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다. 가수가 되어 제일 좋았던 순간을 꼽자면, 영록이 형과 같은 공연에 출연해 내 무대가 끝나고 내려가면서 같이 인사를 하게 됐던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명반은 무엇인가.
마이클 볼튼의 'Georgia on my mind'와 '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가 들어 있는 < Soul Provider >. 군대 있을 때 마이마이로 매일 들었던 앨범이다. 뭐라 그럴까, 창법 면에서도 알게 모르게 습득이 된 면도 있다. 이 앨범을 들으면 군대 있을 때 내무반 모포를 덮고 들었던 순간의 기억, 냄새, 심상까지 다 떠오른다.
유리상자의 음악을 정의하자면 무엇일까.
음, '베개' 같은 음악이 아닐까. 늘 항상 가까이 있고, 베면 편하고, 잠잘 때 꼭 필요하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디제이도 디제이지만, 유리상자라는 팀을 하면서 얻은게 정말 많다. 사실 그동안 우리보다 음악 잘하는 뮤지션은 많지 않았나. 그래도 정말 자랑하고 싶은건 처음 만들어진 그 멤버로 별 다툼 없이 27년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그 어떤 음악적인 것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 뿐이다.
인터뷰 : 임진모, 염동교, 임동엽, 장준환, 정다열
정리 : 장준환
사진 :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