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로비의 커피숍에 앉아서 음악계 지인들과 손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평론가임을 실감했다. “요새 들어 못생겼다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다”며 특유의 자학적인 유머를 보이기도 했는데, 완전히 익숙해진 여유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는 '인터뷰'라는 상황이 결코 낯설지 않은 것 같았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드러머 전태관씨가 매니저와 함께 도착했다. 차분한 악수를 주고받은 뒤 곧바로 테이블에 둘러앉았고, 근래의 경제적 형편에 대한 유머 섞인 담소가 짧게 이어졌다. 인터뷰는 최근의 음악적 근황과 취향에 관한 물음으로 시작했다.
진모 : 최근 즐겨 듣는 음악과 드러머로써 존경하는 뮤지션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태관 : 글쎄요, 요새는 그다지 와 닿는 건 없구요, 주로 듣는 건 오프스프링(Offspring) 정도요. 드럼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존 보냄(John Bonham)이죠. 그런 소리와 파워는 지금도 찾기 힘들어요.
진모 : 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할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시죠.
태관 : 결성 이전에도 약간의 교류는 있었어요. 당시에 현식이형은 김현식과 돌개바람이라는 밴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나이트에서 한창 잘 나가던 때였죠. 그 때는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종진이도 군대를 막 제대했었는데 무언가 막 해보려고 마음먹었을 때, 현식이형이 밴드 제의를 해왔어요. “니들, 형하고 한 번 안 해볼래?” 하고 물어오는데, 겉으로는 “생각해 보겠다”며 건방을 떨었지만, 속으로는 정말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종진, 저, 빛과 소금의 장기호, 유재하 까지 이렇게 네 명이 뭉쳐지게 된 겁니다.
진모 : 유재하가 원년 멤버였나요? 의외의 사실인데요.
태관 : 사실 유재하는 저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동창이에요.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사이였죠. (그러면 왜 팀을 나가게 되었냐고 묻자) 앨범 준비를 한창 할 때였는데, 현식이형이 각자 자신의 곡을 한번 가져와보라고 했어요. 그 때 재하가 스스로 비장의 곡이라고 생각한 5곡 정도를 내놓았는데, 현식이형은 그 중에서 딱 한 곡('가리워진 길')만을 채택했어요. 아마도 그 때 상심이 컸던 모양이에요. 그 해 8월에 밴드를 나갔고, 2달 뒤에 스스로 데뷔 앨범을 냈죠.
진모 : 그렇다면 종진씨와 태관씨가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태관 : 82년 정원영씨를 통해서였어요.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였는데, 방배동에서 정원영씨의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알게 되었죠. 당시에는 퓨전 음악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음악 취향이 비슷했고, 그런 면에서 교감이 이뤄진 것 같아요.
이 때, 조금 늦게 도착한 김종진씨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가죽바지와 뒤로 메는 가방을 들고 있었고, 43살이라는 나이가 실감되질 않았다. 한 손에는 미리 가져온 커피를 들고 있었는데, 마실 것을 권하자 “늦게 온 주제에 뭘요.” 라며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결코 지루해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넉넉한 예의와 웃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종진 : 퓨전 음악이요 ? 국내에는 잘 소개되지도 않았지만 저희 말고도 듣는 사람은 꽤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직접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들 '귀 명창'들 뿐이었죠. 그래서 우리는 그걸 정말로 구현해보고 싶었어요. 아니 막말로, “양놈들은 다 하는데 우린 왜 못해 ?” 라는 문화적인 자존심이 일었던 거죠. 그 때의 서구 음악은 정말 확실히 달랐어요. 하물며 LP의 비닐 껍질과 재킷 그림도 달랐죠.
진모 : 정말 그랬죠. 저도 비틀스(Beatles)의
종진 : 정말로 우리라고 못할 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단 고음질에 대한 갈증이 심했죠. 조용필 선배가 외국 세션과 작업한 작품(88년 앨범 <서울, 서울, 서울>)들을 듣고 우리도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해서 3집 <농담, 거짓말, 그리고 진실>은 외국 세션들과의 작업을 했고 또한 마스터링에만 5천불을 썼던 걸로 기억해요.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마돈나(Madonna) 등의 마스터링을 직접 맡았던 사람한테요. 4집은 음반 디자인을 미국 사람에게 맡겼고요.
진모 : 가장 히트작이었던 91년 라이브 앨범도 같은 맥락이겠네요.
종진 : 그렇죠. 하지만 당시로써는 국내에 라이브 공연을 녹음할 만한 장비가 전혀 없었어요. 경험 있는 엔지니어는 더더욱 없었죠. 당시 소속사 사장님은 “1억을 지원해주지만 국내 실정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녹음 장비를 공연 녹음에 맞게 개조해서 사용했어요. 물론 결과물은 양질이 아니었어요. 그 때 이후로 한번도 그 앨범을 듣지를 않았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 때는 한국 최초의 라이브 앨범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얘기 도중에 “해가 지기 전에 사진을 찍는 것이 좋겠다.”는 촬영담당자의 제안에 의해서, 로비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아침 방송의 배경으로 자주 사용되던 조그만 연못가였다. 촬영하는 동안 그들은 “저희가 좋아하는 포즈가 있거든요?” 하면서 재치 있고, 활기찬 모습으로 기자의 요구에 응했다.
이동하는 동안 봄여름가을겨울의 걸음걸이가 눈길을 끌었다. 큰 체구 임에도 걸음은 어느 정도 운을 띄우고 있었고, 옷걸이와 워킹이 수려해보였다. 이에 대해 임진모씨는 “한 때는 김종진씨랑 전태관씨가 남성복 모델을 해도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건네자 그들은 “그래요?”라며 피식 웃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임진모씨와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김종진씨는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대중들에게 평론이 잘 먹혀 들어가질 않는다.”고 하자, 임진모씨는 “평론가는 역시 말보다는 주로 글을 쓰는데, 언론이나 매체 등에서 독립된 영역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며 현실적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김종진씨는 “그것에 대해선 정말로 언론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걱정 섞인 격려를 보냈다. 돌아와 자리에 앉았을 때, 시간은 이미 많이 지나가 있었고, 본격적으로 심도 있는 질문이 오가기 시작했다.
진모 : 92년 서태지의 등장으로 음악계가 완전히 소비적인 댄스 음악으로 바뀌었는데, 음악적인 고참으로써, 당시의 그런 분위기에 대한 소외감은 없었나요 ?
종진 :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사람들의 근본적인 것들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다만 문화의 중심에 있는 소비 세대가 서서히 바뀌어가는 거죠. 시대가 변하고 그것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음악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는 당시에 대단한 변화를 시도했어요. '캡틴 퓨쳐' 라는 컴퓨터 음악을 시도했었는데, 런 디엠씨(Run D.M.C) 같은 거요. 일종의 힙합이었죠. 드럼을 찍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태관이와 밴드의 정체성에 대한 얘기까지 오고갔지만, 정말 확실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앞섰어요. 결국은 드럼소리 하나하나를 실제로 쳐서 절합 하는 방식을 썼죠. 밤을 새서라도요.
진모 : 4집 < I Photograph To Remember >는 처음으로 히트 곡이 나오지 않았는데, 흥행 실패에 대한 심정은 어땠나요.
태관 : 솔직히 담담했어요. 우리는 원래 외부 상황에 대한 체감이 둔하거든요. 사실 달라질게 별로 없잖아요. 방송에 한창 많이 나갔던 것도 아니고, 밤무대에 나가지도 않았구요. 뭔가 출연 제의가 확 줄어들거나 그러질 않았으니까 항상 비슷비슷했죠. 사실 2집 때도 크게 체감하지 못했어요. 공연장에 줄이 길게 서 있는걸 보면서 “야..!! 이제 이 정도는 기본으로 오는구나(웃음)”하면서 자기만족 하는 정도였죠.
진모 : 시기적으로 봤을 때 4집 까지가 펑키(Funky)함이었다면, 5집부터는 록(Rock)인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록 담론이 일기 시작했던 상황이었고, 더구나 5집은 신중현의 '미인'을 리메이크 버전을 발표하면서 록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왜 그랬나요 ?
종진 : 4집이 판매가 잘 안되면서 여러 가지를 느꼈어요. “아.. 사람들이 잘 못 알아 듣는구나” “우리가 교만했구나” “너무 테크닉만 강조했구나” 하는 생각들이요. 그래서 정말 '소중한' 음악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즐겨듣고 좋아했던 그런 음악이요. 저희도 처음엔 딥 퍼플(Deep Purple)이나 레드 제플린 같은 하드 록을 연주하던 밴드였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 들었던 선배님들의 음악을 재해석하고, 복고 성향으로 가지 않았나 싶어요.
진모 : 96년 발표한 6집 <바나나 쉐이크>는 음악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혼돈을 겪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종진 : (태관을 쳐다보며) “우리가 혼돈을 겪었었나?(웃음)”. 그렇지 않았어요. 서태지 이후로 완전히 음악 판도가 바뀌었지만, 혼돈을 겪거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더욱 자신을 찾고 싶었죠. 그래서 당시의 음악 풍토를 비껴간다는 생각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물론 상업적인 흥행에는 실패했죠. 하지만 저희가 생각하기엔 가장 뛰어난 앨범이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나오지 못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이 정도면 됐다”라고 느꼈으니까요. 하지만 그 순간부터 음악이 고갈되기 시작하더라구요.
진모 : 'Bravo! my life' 는 대중적인 친화력으로 재기에 성공한 노래이지만 동시에 종진씨 보컬의 단점이 드러나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그러니까 혀 짧은 소리 같은 것 말이죠.
종진 : 우리 내부에서는 “보컬이 무르익었다(큰 웃음)”고 했어요. 그런 얘기는 정말로 처음 들어봐요. 다만 저도 듣기 싫은 부분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모 : 종진씨의 가사는 키워드가 '외로움' 같아요. 굉장히 처연한 곡들이 많은데, 뭐가 그렇게 외로운 겁니까?
종진 : 사실 외로움은 김종진의 경쟁력의 요체예요(웃음).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때 5번 전학했던 경험이 있어요. 전 항상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었죠. “안녕하세요, 김종진입니다” 하고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속으로는 “아... 조금 있으면 헤어질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런 상처가 반복되었던 것이 지금의 외로움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진모 : 그럼 전태관씨는 반대로 약간 긍정적이신데, 이를 커버해 주시거나 하지는 않나요 ?
태관 : 인간적인 위로는 물론 해주죠. 종진이는 별 것 아닌 일을 가지고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저는 반대로 심각한 걸 가볍게 생각하곤 할 때가 있구요.
종진 : 태관이의 “괜찮아! 걱정하지 마!” 하는 위로가 정말 큰 힘이 되요.
진모 : 마지막으로 태관씨에게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일단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 감독은 김종진씨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다면 태관씨는 팀 내에서 자신이 가진 확실한 위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태관 : 처음엔 자꾸만 부딪혔어요. 그러다가 음악적인 면에서는 결국 종진이 말이 맞더라구요. 저보다 좀 낫다고 생각했죠. 서로가 모두 자기 것을 주장하다보면 팀이 깨지는 결과만 낳게 되잖아요. 그래서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최대한 서포트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이것이 봄여름가을겨울이 더욱 아름다워진 이유라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휴대폰을 꺼내보던 임진모씨는 “정말 중요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하면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아쉬워했다. 스타라고 생각하기엔 과도할 정도의 친절한 인사와 악수를 주고받고는 인터뷰를 마쳤고, 봄여름가을겨울은 라디오 생방송을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그만큼 시간이 꽤 많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동안 임진모씨는 계속해서 “물어볼게 너무 많았다” “2시간은 더 하고 싶었다.”며 시간 제약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고, 방송국 앞을 벗어나는 동안에도 줄 곧 못 다한 질문에 대한 나의 소견을 물었다.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도 계속해서 발걸음은 이어졌고, 어느새 KBS 건물은 한참 뒤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