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클랩턴이 새 앨범을 낸다는 소식을 접하자 대부분의 음악 관계자들은 신보가 조금은 '쉬운 앨범'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쉬운 앨범이란 대중의 취향에 맞게 만든, 이를테면 듣기에 무난한 앨범을 말한다.

이러한 예측을 하는 근거가 있다. 바로 '한번은 쉽게, 한번은 어렵게'라는 속설 때문이다.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견지하려는 톱가수들 사이에서 이런 경우가 흔하다.

사실 에릭 클랩턴의 3년전 앨범 <요람에서(From The Cradle)>는 정통 블루스 음악을 담은, 조금은 어려운 앨범이었다. 그 이전 너무도 편안한 곡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을 불러 세계적인 언플러그드 열풍을 일으켰던 때와는 크게 달랐다.

관계자들은 따라서 쉬웠다가 어려워졌으니 이번에는 틀림없이 쉽게 갈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새 앨범을 내기 전의 신곡이 다분히 '팝적인' '세상을 바꾼다면(Change the world)'이었던 사실을 전제하면 더욱 그런 예측이 가능하다.

예측은 여지없이 적중했다. 정말 너무나 듣기에 부담 없는 앨범을 냈다. 곧 출시될 에릭 클랩턴의 신보 <순례자(Pilgrim)>는 평소 팝송에 무관심한 사람이 접해도 바로 빨려 들어갈 '이지 리스닝'음악으로 가득하다.

첫 싱글로 정해진 곡 '아버지의 눈(My father`s eyes)'만 해도 그렇다. 마치 '진주 조개잡이'를 연상시키는 익숙하고도 상큼한 도입에서부터 매력적인 선율, 탄탄한 여성 코러스 등 히트의 요건을 모조리 갖추고 있다.

여기에 '기타의 신'이 펼치는 안정된 기타 연주를 더하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 특히 이 노래는 본 고장의 판매 상황과 무관하게 국내에서는 크게 어필할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나열한 요소 말고도 IMF 한파에 고개 숙인 우리 아버지들에게 들려주면 좋을 것 같은 노랫말 때문이다.

'내 영혼을 다시 채우기 위해 빗속에서 열기를 느끼게 해달라 기도하지 / 내가 어째서 이렇게 됐지 / 내가 뭘 해왔지 / 언제 희망이 다시 솟아오를까 / 그걸 어찌 알까 / 그때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면 희망이 빛을 비추지.'

현실의 우산이 되어주는 위대한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그런 노래다. 마치 이땅의 아버지들을 독려하려고 만든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이곡 외에도 감상하기에 좋은 노래는 얼마든지 있다. '상심(Broken hearted)', '서커스(Circus)', '그의 여자가 필요해(Need his woman)'와 밥 딜런 곡을 리메이크한 '본 인 타임(Born in time)' 등 상당수가 한결같은 '호응 폭발의 시한폭탄'이다.

이렇다 보니 무게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아버지의 눈' 다음에 배치한 블루스 곡 '눈물의 강(River of tears)'까지도 쉽게 다가온다.

1996년 발표한 프로젝트 앨범 (TDF)에서 함께 일한 사이먼 클라이미와 공동으로 프로듀스했다. 베이비페이스가 백업 보컬로 가세한 것도 특기 사항.

또한 에릭 클랩턴의 딸 루스 켈리가 마지막곡 '나의 내면(Inside of mine)'에서 음성을 들려줘 관심을 끈다.

굳이 신보의 단점을 들라면 대중성이 지나쳐 상업적인 냄새마저 난다는 것. 하지만 그의 인생을 솔직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것은 아니다. 그의 순례가 보기에 따라 '영리'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진지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수록곡-
1. My Father's Eyes (Clapton)
2. River of Tears (Clapton/Climie)
3. Pilgrim (Clapton/Climie)
4. Broken Hearted (Clapton/Phillinganes)
5. One Chance (Clapton/Climie)
6. Circus (Clapton)
7. Goin' Down Slow (Oden)
8. Fall Like Rain (Clapton)
9. Born in Time (Dylan)
10. Sick & Tired (Clapton/Climie)
11. Needs His Woman (Clapton)
12. She's Gone (Clapton/Climie)
13. You Were There (Clapton)
14. Inside of Me (Clapton/Clim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