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이후 레드 제플린의 사운드는 모두가 추종하는 고전적인 (지금은 대부분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사운드였지만 이들에 근접하는 밴드는 나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2000년대의 감성으로 이들의 음악에 대한 '걸작' 혹은 '역작'이라는 고루한 단어를 '고루'하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모든 앨범이 '록의 걸작'이라는 말은 듣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기대를 오히려 둔감하게 만드는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1980년대의 헤비 메탈 사운드에서 유추하려 한다면, 그리고 그런 뻔한 생각으로 접근을 포기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일렉트로니카로 진행되는 2000년 초봄에도 이미 굳어버린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향한 사람들의 변함없는 우호적 감정이 한낱 지나간 시절들에 대한 실속 없는 애정 때문만은 아닐 테니까. 레드 제플린의 음악에 젊음을 송두리째 빼앗겼던, 이제는 아줌마?아저씨가 된 당시의 하드 록 키드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고 말이다.
레드 제플린은 늘 현재 진행형인 밴드였다. 끊임없는 투어와 투어 중에서도 -당시엔 MTV가 없던 시절, 음악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Only 라이브!- 항상 새로운 곡을 만들고 있었고, 그 품질에 있어서도 늘 최상품 혹은 상품을 생산하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관중이 지루해할 수도 있으니까 팬들이 극성으로 요청하지 않는 한 지난 곡들은 연주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의 적극적인 마인드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이들은 쉬지 않고 투어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곡들을 음반으로 발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소리에 대해서 항상 호기심과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며, 분석한다. 레드 제플린의 사운드는 우주의 모든 음향을 집약한 것이다.” '당돌한' 로버트 플랜트
가장 성공했던 최초의 헤비 메탈 밴드였던 레드 제플린은 단 한번도 TV에서 연주한 기록이 없다. TV의 제한된 화면과 TV스피커의 작음 음량, 그리고 잠깐의 TV출연으로는 자신들의 음악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런 밴드의 태도를 두고 항간에서는 이들이 거드름을 피운다느니 등의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레드 제플린은 연주를 하는 TV출연은 거부하면서, 대담 형식의 TV프로그램들에 출연해서 자신들의 음악을 알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멤버들이 모두 함께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플랜트 아니면 페이지였다.
레드 제플린은 자신들의 인기를 결코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모든 것은 음악에 대한 그만큼의 자신감, 자부심 그리고 '음악은 음악으로서 순수하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밴드의 음악에 대한 마인드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자부심을 이들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제각각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던 뮤지션들이 모인 밴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탁월한 기량을 가진 개개인이 모인다고 해서 가장 훌륭한 밴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기대와 동시에 실망을 안겨주었던 많은 팀들을 보아서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개개인의 역량이 밴드라는 덩어리로 뭉쳤을 때 항상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도 아니거니와 설사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 하더라도 그 고집덩어리들이 하나의 음악으로 조화된 상태를 유지하기란 되도 않는 얼치기들이 모여 음악을 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라는 것도 사실이고.
그것을 10년 넘게 유지한 것과 그들 중 한 명이 사라졌을 때 과감하게 밴드를 놓아버릴 수 있었던 레드 제플린은 여러모로 딱 부러지는 그야말로 '밴드'다운 밴드라고 할 수 있다.
레드 제플린은 그 오랜 기간을 어떻게 멤버 변화 없이, 한번의 커다란 불화 없이 활동할 수 있었을까?
“우리들 레드 제플린의 멤버들은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별난 성격에 제각기 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문제를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레드 제플린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바탕이 되었다.” 존 폴 존스
아닌게 아니라 이들은 정말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밴드에나 프론트 맨은 필요하다. 그것이 묘기대행진을 능가하는 플레이를 구사하는 테크니션이건 보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꽃미남이건, 그것도 아니면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군림하는 군주의 형식이든 간에 말이다.
레드 제플린의 경우 페이지와 플랜트는 무대에서 화려한 액션으로 자기 과시를 하며 앞으로 나서고 싶어했던 반면에 보냄과 존스는 명성이라는 것 자체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만약에 이 4명이 모두 앞에 나서며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과시하려 했다면 레드 제플린이 10년이 넘도록 함께 연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작전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멤버들의 내외적인 조화로 이들은 수퍼 세션에 가까운 라인업을 유지하며 10년이 넘는 동안 퇴색하지 않는 음악적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멤버들의 뒤에는 항상 레드 제플린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피터 그랜트가 있었다. 제 5의 멤버라고 할 정도로 모든 곳에 함께 있던 그랜트는 초기에는 레드 제플린이 유명해질 수 있도록 연료를 공급하며 조종하던 탁월한 두뇌였고, 이들의 듬직한 후견인이었으며, 모든 활동의 총 지휘자였고, 때로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가장 중요했던 건 매니저로서의 오랜 동안의 경험과 그만의 안목으로 팬들의 심리를 훤하게 꿰뚫고 보던, 레드 제플린의 '눈' 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
감각을 리드하는 건 페이지였지만 레드 제플린의 음악의 대부분은 셀프 컨트롤된 파워를 구사하던 존 보냄의 필인들로 점철된 하드 록 사운드였고, 이것은 1980년대의 헤비 메탈이라는 장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운드와 리듬적 기반에 보컬로서 뿐만 아니라 작사가로서 플랜트가 가지고 있던 능력과 모든 것을 하나로 교합하는 데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던 존스의 신중하고 섬세한 편곡 능력이 동시에 존재했기에 이들은 같은 악기를 가지고도 당시의 한정적 음악적 사운드의 한계를 부셔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음악적 사운드의 탐구와 한계를 넘어서는 레드 제플린의 음악에서는 묘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동양적 색채, 때로는 영롱한 포크 스타일, 스트레이트로 일관하지 않는 훵키한 리듬, 존 보냄과 존 폴 존스가 주도하는 임프로바이제이션의 느낌이 살아있는 재즈적인 어프로치까지도 발견된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음악들은 구 시대의 유물로 굳어지지 않은 채 20세기까지 록의 역사에서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할 테고.
이후 등장한 헤비 메탈 중 'Whole lotta love'의 영향을 벗어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있을까? 또 많은 소프트 록은 'Stairway to heaven'의 인트로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Down-yr-aur'의 영롱한 기타 연주는 또 어떻고.
이후의 블루스 록은 'Since I`ve been loving you'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1990년대의 그런지 조차도 'Wearing and tearing'같은 곡이 씨 뿌렸던 곳에서 싹이 텄다고 할 수 있을 수도. 직접 의식을 했건 안 했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