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rvana vs Pearl Jam | 라이벌 열전

by 임진모

1999.08.01

그런지를 사수한 그룹과 대중 친화력이 강한 그룹의 대결

지금은 두 그룹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세기말의 상반기 내내 적어도 록 밴드라면 너바나와 펄 잼의 ‘얼터너티브 정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의식하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에 대한 원심력과 구심력을 철저히 경험해야 했다.

사운드가든(Soundgarden)의 크리스 코넬은 1994년 다소 성가신 듯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펄 잼이 우리와 같은 음악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Jeremy’는 우리의 어떤 것과도 비슷한 게 없다. 그들은 우리가 너바나와 다른 것처럼 사운드가든과 다르다."

<서커스>지는 ‘베이비 그런지 밴드’ 실버체어(Silverchair)가 선풍을 일으켰을 때 그들이 펄 잼의 곡 쓰기와 너바나의 라이브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너바나와 사운드의 유사성이 짙게 나타난 것에 애초 실버체어는 펄 잼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했지만 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선 극구 레드 제플린을 가장 좋아했던 밴드라고 강조했다. 두 그룹과의 상투적 비교에서 벗어나고자 한 귀여운 제스처였다.

사운드가든은 이후 해산했고 실버체어의 소식은 이제 더 이상 토픽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물론 얼마 전 새 앨범 <Neon Ballroom>을 내기는 했지만 차트 50위까지밖에 오르지 못했고 세인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그런지 대중화의 견인차인 너바나와 펄 잼에게 결국은 역사의 화환이 주어지는 증거일 것이다. 얼터너티브 록의 포효 속에 우후죽순 등장했던 밴드들이 한 때는 두 그룹에 맞먹는 다량의 앨범을 팔았지만 지금은 정체성의 혼돈 속에 대부분 현실의 장으로부터 퇴각했다.

사운드가든이나 실버체어보다 스톤 템플 파이러츠(Stone Temple Pilots)는 가장 확실한 몰락의 예가 될 것이다. 한때 너바나와 펄 잼의 인기를 능가했던 이 그룹은 1999년 수년의 공백을 깨고 새 출발했지만 앨범은 완전히 세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런지와 얼터너티브 록을 이식한 양웅

그럼 너바나와 펄 잼 두 양웅(兩雄)도 그런지 침공의 전위(前衛)와 관련하여 과연 서로간 평등한 위치에 서 있는가. 두 그룹이 다 선두였는가 말이다. 평행선을 사이좋게 달려간 것 같지만 너바나의 등장 시점이 조금 빠르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하늘도 안다.

역사는 에디 베더마저 걸러내고 커트 코베인 한 사람만을 새로운 록 세대의 출현을 이끈 인물로 기록한다. <롤링스톤>은 1999년 3월 커트 코베인을 ‘1990년대의 아티스트’로 선정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라도 예견한 일이었다. 이 잡지 편집진이 연말에 선정한 ‘금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 톱10’에서도 너바나는 비틀스, 롤링 스톤스에 이어 3위를 기록했지만 펄 잼은 등수에 들지 못했다.

펄 잼이 그런데도 너바나와 늘 함께 고리가 엮였던 이유가 있다. 바로 음악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인 앨범 판매량이 더 우위였기 때문이었다. 너바나의 <Nevermind>가 1996년까지 700만 장이 팔렸을 때 펄 잼의 <Ten>은 90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지금도 이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커트 코베인이 깃대를 꽂았다면 에디 베더는 그 위에 깃발을 펄럭인 것이었다.

왜 펄 잼의 음악이 더 많이 팔렸을까. 일각의 음악 마니아들은 ‘너바나가 펑크 록이라면 펄 잼은 헤비 메탈의 요소가 좀더 발견된다’고 전제하고 "펄 잼이 이전의 압도적인 주류 음악경향인 메탈을 보유해 수요자들에게 준 생경함이 덜했기 때문에 너바나 보다 대중적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어쨌든 앨범이 더 팔렸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적 소구력에 있어서 펄 잼이 너바나에 대해 우위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상기한 <롤링스톤>지의 1999년 연말 조사에서 편집진과 달리 독자들은 최우수 록밴드 부문에 펄 잼을 7위에 올려놓았지만 너바나는 톱10에 포함시키지 않았다(1위와 2위 역시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금세기 최우수앨범’ 부문에서도 펄 잼 <Ten>이 9위에 올라 10위 너바나의 <Nevermind>에 간발의 차이긴 하지만 앞섰다.

다시 199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서 펄 잼의 드높은 인기는 순식간에 너바나 독주체제에서 두 그룹의 경쟁체제로 판을 새롭게 짜버렸다. 음악 잡지들과 록 마니아들은 한 그룹의 무한질주가 아닌 두 그룹간의 아슬아슬한 상호경쟁을 더 즐겼고 반가워했다.

두 그룹의 음악을 비교하며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하곤 했다. 너바나의 시그니처 송 ‘Smells like teen spirit’과 펄 잼의 표제 곡 ‘Alive’는 똑같이 ‘X세대의 송가’로 취급되었다.

시작은 너바나의 영예, 앨범 판매량은 펄 잼이 우위

1994년 초<롤링스톤>의 설문조사에서 독자들과 비평가들 모두로부터 펄 잼이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되었다. 독자들은 그들을 ‘최우수 밴드’로도 표를 몰아주었다. 이 때 너바나는 비평가 선정 ‘최우수 밴드’였으며 앨범 <In Utero>는 ‘최우수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스핀>지의 독자 설문에서도 비등한 결과가 나왔다. 최우수 아티스트로는 커트 코베인(트렌트 레즈너와 함께)이 뽑혔고 최우수 밴드에는 펄 잼이 올랐다.

이런 용호(龍虎)의 결투에 당시 <타임>지가 커트 코베인과 에디 베더를 함께 표지 인물로 내세울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이것은 결코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 기획은 반드시 성사됐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확실히 대중에 대한 친화력은 펄 잼이 강했다. 그들이 2집 앨범 <Vs>를 발표했던 1993년 당시 <뉴스위크>지의 기사가 이를 말해준다. 거기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일찍부터 어떤 사람들은 펄 잼이 시애틀 그런지 침공의 ‘위생적인’ 그리고 ‘사용자가 편리한’ 측면을 대변하는 그룹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비틀스요, 너바나는 롤링 스톤스인 것이다. 그들은 어떤 밴드보다도 접근하기가 쉽다."(그럼 너바나는 위생적이지 못하며 사용자가 불편한 음악?)

펄 잼은 비틀스, 너바나는 롤링 스톤스?

이 시사주간지는 심지어 말미에 ‘지금은 1993년. 비틀즈를 만나세요(Meet the Beatles)’란 표현까지 썼다. 펄 잼이 그만큼 앨범 판매량이 우월했던 데서 나온 얘기들이다.

애초 커트는 펄 잼이 적어도 시장에서 자신들을 앞지르면서 ‘넥스트 빅 시애틀 사운드’로 주의를 끌게 되자 꽤 비위가 상했던 것 같다. 후려갈기는 심정으로 펄 잼에게 한 방을 먹였다.

"그들은 시애틀의 젊은 뮤지션들이 일구어낸 얼터너티브 록 열차에 무임 승차한 얌체족들이다!"

커트는 심지어 펄 잼을 ‘반동의 로커’(retrorockers) 그리고 ‘표절꾼’(copycats)이라고 깎아 내렸다. 이런 힐난에 펄 잼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이것은 망언이다. 커트 코베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그룹에 대한 단순한 시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디 베더는 1993년 10월에도 이렇게 말했다. "난 나 자신의 트립(trip)을 한다. 설령 커트 코베인의 트립이 훔치기(따라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라 해도 난 결코 그의 트립을 훔친 적이 없다."

설전으로 한동안 불편한 관계

한동안 두 그룹의 사이는 불편했다. 그러나 이렇게 성공의 순수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성공을 배격하는 그런지 록의 캐치프레이즈와 상충되는 것을 알고 두 그룹은 이내 설전을 중단하고 현명하게 화해 국면을 연출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대전제 때문에도 있을 것 같지 않던 두 밴드간의 설전과 명백한 라이벌의식이 돌출했다는 사실은 누가 들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지의 동지로서 힘을 합쳐도 ‘제도권 흔들기’가 벅찬 마당에 서로 눈을 흘긴다는 것은 내홍(內訌)이요, 내란(內亂)일 수밖에 없었다. 언론은 호재를 만났다는 듯 쌍웅의 관계를 반목 그리고 적의로 불려나갔다.
이 문제와 관련해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기 3개월 전인 1994년 1월에 <롤링스톤>지와 가진 인터뷰를 들어본다.

‘펄 잼에 대해 현재 어떤 입장인가?’
"다시 그 얘긴 하고 싶지 않다. 내가 배운 것은 남의 꼬투리를 잡는 것이 나한테도 전혀 유익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펄 잼과 너바나의 반목이 오랫동안 지속돼 유감이었지만 이젠 잘 정리됐다."

‘그런데 반목이 왜 생겼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이유는 없었다. 난 그 밴드가 싫어서 꼬투리를 잡았던 것뿐이다. 난 그 때 에디를 만나보지도 못했다. 나의 잘못이었다. 난 펄 잼이 아니라 레코드사를 비난했어야 했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마케팅되고 있었다. 그러나 펄 잼은 자신들이 그런지에 편승해 휩쓸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1994년 커트 코베인의 자살 이후에도 경쟁은 계속

관심이 집중된 두 밴드의 경쟁과 갈등이 아직 불씨를 남긴 상황에서 갑자기 커트는 1994년 4월 자살로 도발의 드라마를 마감했다. 펄 잼을 남긴 채, 그들에게 모든 도발을 맡긴 채 그는 신화 속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펄 잼의 그리움, 회한 그리고 그런지 전사(戰士)로서의 부담감은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에디 베더는 커트가 떠나고 나서 7개월간 입에 자크를 채워버렸다. 아마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사후(死後) 언론과 팬들이 부지런히 펄 잼에게서 커트 코베인을 찾아내고자 하는 통에 그의 불편함과 부담은 더했다. 신보 <Vitalogy>를 냈을 때야 비로소 <LA 타임스>의 로버트 힐번과 인터뷰를 가졌다(이외의 인터뷰는 없었다).

힐번은 새 앨범이 커트의 죽음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요지의 질문을 던졌다(당시 누구라도 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Pearl Jam의 에디 베더"물론 커트의 죽음이 우리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항상 긴장감을 가지고 사는 유명인들이 겪을 수 있는 부담감을 담은 것이다. 커트의 죽음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 매스컴이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들춰내는데 신물이 난다. 이건 횡포다."

여기서도 결코 커트의 죽음에서 해방되지 못한 심적 공황의 편린이 나타난다. 그가 얼마 후<스핀>지에 털어놓은 당시의 심경을 들어보자.

"난 철저히 이해한다. 그것(커트의 자살)이 일어났을 때 난 호텔 방에 있었고 누군가가 내게 그 소식을 전해주었다. 난 그가 그것을 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그가 그런 극단을 취했을까. 그것이 잘못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아직도 난 믿을 수가 없다. 난 그 일 이후 (이미 없는)그에게 편지를 써서 물었다. ‘무엇이 딴 쪽이냐? 거기에 내게 남은 방은 없는가?’"

너바나는 죽음의 미덕, 펄 잼은 삶의 고통

커트를 향한 에디의 절절한 그리움과 후회는 다음의 술회에서 극을 달린다.

"때때로... 커트와 내가 함께 지하실에서 며칠 밤을 보내면서 멍청한 곡을 연주하고 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서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도 혼자가 아니고 나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펄 잼은 남은 자의 슬픔이 아닌 ‘남은 자의 의무’를 다했다. 부당하게 티켓 요금을 올린 것에 대항, 티켓 기업인 티켓마스터(Ticketmaster)와 법정싸움을 벌여 음악계의 왜곡에 덤벼든 것을 비롯해 소외된 계층의 자선을 위한 것이라면 모든 이벤트와 공연에 손을 보탰다. 1999년 초반 차트에 펄 잼이 부른 코소보 사태 난민을 위한 자선 곡 ‘Last kiss’는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올라 그들의 성공적 반(反)주류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이제 펄 잼은 얼터너티브 투사가 아니라 사뭇 대중적인 록 그룹으로의 진보와 성장에 성공했다. 1998년 앨범 <Yield>에 대해 평자들은 "더 이상 그들이 세대의 대변인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들은 보다 날카로운 곡을 쓸 수 있는, 보다 자유롭고 활기찬 밴드로 성장했음을 말해준 작품"으로 평했다. 이 말은 그들이 그런지의 속박, 커트 코베인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시사한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너바나와 커트는 살아있는 펄 잼과 에디로 하여금 뒤돌아볼 수 없는 숨가쁜 행로로 내몰았다. 너바나는 ‘죽음의 미덕’을 누리고 펄 잼은 ‘삶의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사람들 눈에 펄 잼은 끊임없이 머리 속에서 너바나를 지우려는 것처럼 비춰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펄 잼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너바나가 있다. 펄 잼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임진모(jjinmo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