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한 음악들(윤석진) | 나를 사랑한 음악
음악을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한 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양면성을 가진 '판도라의 상자'라고 표현한 것처럼 음악에 빠지게 되면서 좋은 일만 생긴 것은 아니다. 신만이 향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쁨도 얻었지만 만만치 않은 지출은 물론이고, 현실적인 문제나 이성교제 등 다른 많은 것들이 자리 잡지 못하거나 스쳐지나가 버리는 비극도 따라왔기 때문이다(물론 능력 탓이 크지만). 여기에 소개한 음반들은 개인적으로 너무도 소중하거나 또는 다른 장르의 상자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앨범들이다. 장르 끼리 묶었기 때문에 시간 순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리스트를 작성하며, IZM에서 윤'지킬'박사라는 다분히 부담스런(어쨌든 박사니까)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좋아하는 음악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는 것이 드러나 부끄러울 따름이다. 김 독님의 글을 읽고 제 리스트에 기대하신 분들에게는 미리 사과를 드린다.
1. 송골매 < III >(1982)반골 기질 때문인지 어릴 시절에도 1위를 독식하거나 전형적인 인기 가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필자가 최초로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된 송골매도 주류속의 외인부대 같은 이미지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괴짜 분위기였던 다른 밴드와 달리 밝은 이미지와 그룹음악 특유의 터프한 사운드가 공존했고, 두 리더의 보컬(배철수와 구창모)에 따라 색다르게 표출되는 다양성이 매력적이었다. 본 작은 필자가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산 음반이었고, 모든 노래의 노래가사를 외울 정도로 들었다. 그룹사운드 특유의 리프가 인상적이었던 '처음 본 순간'을 비롯하여, 가요적 선율미를 만끽 할 수 있었던 '아가에게', 와일드한 록 사운드를 느낄 수 있었던 '한줄기 빛'등을 특히 좋아했다. 초등학교 감성에는 아무래도 구창모가 부른 노래들이 취향에 맞았지만, 배철수가 구수한 보컬로 들려주는 '빗물', '약속일랑 하지 말아요'같은 발라드가 주는 모닥불 같은 따스함 역시 잊을 없는 감동이었다. 이로써 프로야구에서 시선을 돌려 처음으로 음악에 관심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2. Duran Duran < Rio >(1982)당시 국내 인기가수가 낸 캐롤 집을 사왔다가 무성의 기획에 실망하여 < 듀란 듀란 / 컬처클럽 >이라는 테이프로 교환해 왔는데, 이것이 내게 매트릭스의 알약이 될 줄은 몰랐다. 사실 'Karma chameleon'으로 유명했던 컬쳐 클럽에 더 기대를 했으나, 정작 듀란 듀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펑키(Funky)하면서도 기계적인 드럼에 외계의 사운드처럼 이질적인 반음계를 섞은 사운드는 이국적인 매력을 선사했다. 'Union of the snake', 'The reflex'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화음,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카리브 해의 정취가 담긴 'Rio' 등에 완전 매료됐다. 이 테이프를 닳아빠지게 들으며 어느 새 팝음악의 세계로 넘어갔다. 이들 음반 중 1집부터 4집까지는 어느 하나 애착이 가지 않는 앨범이 없지만, 지상낙원의 낭만이 담긴 < Rio >를 가장 애청했다. 타이틀곡과 'Hungry like a wolf'등의 히트 곡은 물론이고, 'My own way', 'Save a prayer', 'Hold back the rain' 같은 사이드 트랙들도 메아리처럼 더빙 처리된 보컬과 기계적이지만 로맨틱한 사운드로 뉴 웨이브의 파라다이스를 제시했다. (사실 그 테이프의 수록 곡을 완전히 흡수한 < Greatest >를 꼽을까 생각 했으나, 원곡의 아이덴티티를 얄팍한 편집으로 깎아먹은 듯한 'The reflex'의 리믹스 버전을 참을 수 없었다. 물론 입문하기에 최강의 앨범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보너스로 당시엔 꿈도 못 꾸던 이들의 뮤직비디오 까지 DVD로 들어있으니@.@)
3. Iron Maiden < Piece Of Mind >(1984)개인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을 좋아한다. 그런 점에서 '에디(Eddie The Head)'라는 섬뜩하지만 어딘지 귀여운(?) 마스코트를 주인공으로 상상력 넘치는 아트워크를 꾸민 이들이 헤비메탈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하나의 필연이었던 셈이다. 최초로 헤비메탈이 악마의 음악이 아닌 웅장하고 건강한 대중음악 이라는 것을 알려준 그룹은 본 조비 였지만, 헤비메탈에 대한 진수는 이들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3연음 베이스와 효율적인 트윈 기타솔로(거의 잉베이를 뺨치는 속주감을 느끼게 하는)로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Flight of icarus'는 물론이고 에디가 칼을 들고 귀신과 혈투를 벌이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리게 되는 'The Trooper', 코러스의 중독성 없이 7분여 동안 드라마틱한 변주(스페인 작곡가 알베니스(Isaac Albeniz)의 'Asturias'를 편곡한 부분도 발견되는)만으로도 꼼짝 못하게 하는 'To tame a land'등은 헤비메탈이 주는 미학이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 무려 4곡이나 난도질 된 라이센스 음반 보다는 세운상가에서 발견하고 반가워 기절할 뻔 했던 빽 판으로 이 앨범을 접했지만, '금지곡의 시대'에 이들의 음악을 발매하기 위한 담당자의 눈물겨운 노력을 알 수 있었던 라이센스 음반의 감동의 해설지도 잊을 수 없다.
4. Megadeth < So Far, So Good...So What? >(1988)머틀리 크루(Motley Crue), 레인보우(Rainbow) 등 각종 헤비메탈에 심취하던 내게 통과의례처럼 1988년에는 스래쉬 메탈이 관심권에 포착됐다. 때마침 빽판으로 접하게 된 메탈리카의 < Master Of Puppets >는 이 장르를 Trash가 아닌 Thrash로 알게 해 줬다. 그럼에도 메가데스의 본 작이 보다 각별한 것은 파격적인 곡 구성을 전해 준 데 있다. 처음에는 판 던지기 놀이용으로 분류할까 싶을 정도로 싫었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들의 사운드와 곡 구조를 인정하게 되면서 1순위 음반이 됐고, 향후에 다른 음악 장르를 포용하는 데에도 상당히 도움이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타 리프와 솔로가 같이 움직이며 탐사하듯 펼쳐지는 'In to the lungs of hell', 흐르는 데로 전개되는 듯한 'Set The World'등이 전달하는 아노미적 무자비함, ABCCCA식의 독특한 곡 구성 속에 면도날처럼 예리한 기타 리프와 선동적인 가사가 인상적인 'Hook in mouth'가 신선한 파격이었다.
5. Pink Floyd < The Wall >(1979)내일 외계로 귀환하라고 하면서 판을 세장만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면 이들의 앨범 중에는 < Wish You Were Here >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 The Wall >은 내겐 프로그레시브 록의 진면목을 알게 해준 소중한 앨범이다. 한 친구가 '헤비메탈 보다 수준 높은 음악'이라며 자신 있게 들려준 르네상스(Renaissance)의 곡을 듣고, '클래식을 팝 음악화 시킨 형식적인 장르'라는 고정관념이 박혀, 프로그레시브 록을 의도적으로 배척했던 필자에게 충격을 준 작품. 미친 사람이 쓴 것 같은 내지의 가사, 각종 상상력을 자극하는 배경음과 다채로운 음악소스, 정신분열자가 마구 내 뱉는 듯하다가도 때로는 눈물이 날정도로 따스한 로저 워터스(Roger Waters)의 보컬은 편견의 벽을 깬 정도가 아니라 아예 폭파시켰다. 각종 굉음과 파괴력으로 무장한 'In the fresh?'와 충격의 3부작 'Another brick in the wall'을 비롯하여, 'Nobody home'의 소외감어린 따스함이라든지 냉소적인 메시지가 그로테스크한 드라마로 구현된 'Trial'등 충격적인 영상이 쉴 새 없이 머리 속에 투사됐다. 특수 효과를 듣고 순전 감성만으로 나만의 영상을 완성했다가 뒤늦게 알란 파커(Alan Parker) 감독의 영화를 보고 실망한 기억도 난다. (물론 이 영화도 10번을 볼 정도로 좋아하게 됐지만.) 준라이센스(컬러 빽판)으로 보유하고 있다가 나중에 한 달 동안 조금 씩 모아 원판을 샀을 때의 행복했던 기분도 잊지 못한다.
6. Atoll < L'Araignee-Mal >(1975)핑크 플로이드의 충격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의 세계에 진입했지만 넘어야 할 장벽들은 너무도 많았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4강국을 형성하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저마다 고유의 민족 색채와 각기 다른 장르라고 할 만큼 상이한 미학체계를 갖춘 경우가 많았다. 언어도 그랬는데, 록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프랑스어를 고집한 프렌치 아트록에 대한 거부감은 특히 강했다. 아똘의 본 작은 이런 프랑스 아트록의 매력이 무엇인지 느끼게 한 앨범이었다. 광기와 섬세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담은 'Le photographe exorciste'라든지, 다이나믹한 전개속에 서정적 낭만주의와 전위적인 느낌이 공존하는 'Le voleur d'extase'가 즉각적인 애청곡이 돼는 한편, 'Cazotte no.1'은 재즈 록의 미학을 흡수하고 있어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을 위시한 재즈 록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데에도 교량역할을 했다. 이 앨범과 모나 리자(Mona Lisa)의 < Le petit Violon de Mr. Gregoire >등은 너무도 감동적인 경험이어서, 이후 프랑스 아트 록을 비롯한 다른 언어권 음악을 접해야 할 필요성도 일깨워줬다.
7. King Crimson < Red >(1974)데이스(Deyss), 오메가(Omega), 자도즈(Zardoz) 같은 제3세계 아트 록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제법 레퍼토리를 넓혔다고 생각될 때쯤에도 소위 프로그레시브 록의 군주로 평가되던 킹 크림슨 만큼은 귀에 잘 안 들어왔다. 불후의 명곡으로 회자되던 'Epitaph' 역시 필자에겐 지루한 곡이었을 뿐이다. 코드가 안 맞는 다고 표현해야 할까? 때때로 헤비메탈보다 더 정제되지 않은 거친 연주, 기승전결이 불분명한 기이한 음악성을 가진 밴드라는 이미지였다. 그러나 대학시절 아브락싸스(Abraxas)라는 음악 감상 동아리에 들어오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전문 음악 감상 동아리였던 이 모임에서 대부분의 멤버들이 공통으로 좋아하던 그룹이 킹 크림슨이었고, 주제곡처럼 틀어대던 곡이 'Starless'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아리 설립때부터 있었던 전통이었다.) 자연히 이들의 음악을 큰 볼륨으로 감상할 기회가 자주 있었고, 이들의 음악회도 가지면서 킹 크림슨과 본작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Starless'라는 암흑의 교향곡은 부담스러운 곡 임에도 고통을 무한대로 증폭하여 해소시켜주는 쾌감 때문에 자주 듣는 곡이 됐다.
8. Pat Metheny & Lyle Mays (1981)팻 메스니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퓨젼 기타리스트인 동시에 필자에게 처음으로 재즈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한 뮤지션이다. 그의 세련된 사운드와 아트 록을 방불케 하는 상상력 넘치는 음악 세계가 인도자 역할을 했다. 물론 그가 펼치는 음악스타일의 대부분은 오리지널 재즈에서 꽤 벗어났지만, 프리 재즈의 창시자 오네트 콜먼(Ornette Coleman)이라든지 잭 디조넷(Jack DeJohnette) 데이브 홀랜드(Dave Holland)등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다채로운 음악세계를 선보인 그의 음반을 섭렵하는 사이 재즈와 가까워진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필생의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라일 메이스와 투톱으로 완성한 본작은 음악으로 채색된 한편의 수채화처럼 상상력과 아름다움이 풍만하다. 어느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것이 없으나 'September fifteenth'를 특히 좋아한다. 이곡을 듣노라면 투명한 가을 호수 속에 청색 하늘과 단풍이 젖어든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9. Miles Davis < In A Silent Way >(1969)재즈의 아이콘으로 추앙되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다가가기가 만만치 않았고 들을 기회도 별로 없었다. 아마도 제대로 처음 접한 것은 동아리의 MT 음악회 때 한 회원이 소개한 'Bitches brew'였을 것이다. 한 없이 길었지만 영혼이 분리되어 표류하듯이 전개되는 음악에 마음이 흔들렸었다.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같은 같은 서클에서 연 < 마일스 데이비스 음악회 >를 통해서였다. 이를 준비하면서 필수 음반이 부족할 경우 앨범을 분담해서 샀는데, 필자가 산 것이 본 작 이었다. 단 두곡이 한 면에 수록되어 있는 대곡지향 이었지만, 특별히 사로잡는 멜로디 없이도 참 감동적인 음악이었다. 불을 끄고 감상하면 음의 영혼들이 살아나와 공기를 타고 비행하는 것이 연상될 정도. 이 후 퓨전 재즈와 블루노트 계열 하드 밥, 약간의 아방가르드와 스윙 재즈를 듣는 선에 그치고 있긴 하지만, 이 앨범은 재즈를 듣는 거부감을 소거 해준 소중한 음반이다.
10. Quicksilver Messenger Service < Anthology >(1971)너바나(Nirvana)가 방향성을 잃은 불량 메틀 군단에 테러를 가했을 땐 나 역시 통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1990년 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자기복제로 일그러지기 시작한 그런지(그래도 음악적인 소스라도 풍성한 상태에서 배아 복제했던 헤비메탈에 비해서도 얼마나 초라했는지)를 비롯해서 록이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면서,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의 록음악에 침잠하게 됐다. 이때 동아리 방에서 발견한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의 테이프는 하나의 오아시스 같았다. 특히 환각적인 연주가 12분간 방랑하듯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펼쳐지는 'The Fool', 새벽공기 처럼 신선한 'Spindrifter', 선술집이 연상되는 'Bears' 같은 곡은 감탄을 절로 유발시켰다. 이들의 전성기를 담은 베스트 앨범 < Anthology >는 짧지 않은 진품들을 덩어리 채 넣고, 짧은 소품들이 즐거움을 더하는 사이키 델릭의 보석함이다. 물론, 불후의 환각 열차인 < Happy Trails >는 컨셉트 앨범인 만큼 정규앨범으로 들어야 하지만.
11. 베이비복스 < Special Album >(2002)이것을 선정하면서 무슨 반응이 나올지 대략 짐작을 해봤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아마도 '내가 좋아할만한 스타일의 음악과는 반대편에 서있는 스타일이라 의외'라는 것일 듯싶다. 사실 그랬다. 서양 음악 위주로 현실세계 보다는 환상을 찾다보니, 몸은 한국에 있었지만 음악 감성은 화성쯤에 존재해 있었다고나 할까. 특히, 기획사 위주로 편성된 인스턴트 적 뮤지션들에 대한 거부감은 적잖이 견고했었다. WAS팀에 와서 특히 좋았던 점은 현 세대들이 듣는 음악에 대한 것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스터디 그룹에서 분석적인 자세로 접한 기획사 뮤지션 대표주자 격인 H.O.T.의 음악들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마침 이 때 필자는 한 음악 사이트의 컨텐츠 담당이었기 때문에 10대들이 좋아하는 음악주류에 레이더를 켜놓고 있어야 했는 데(이때 필자가 가입한 쥬얼리, 신화 등 수 십 개의 팬 카페에 아직까지 회원으로 있을 것이다. 정리되지 않았다면), 그 때 마침 '우연'이라는 리메이크 곡이 포함된 베스트 앨범을 공개해 '우연히' 연구대상(?)이 된 것이 이들이다. 한류 돌풍의 원조이기도 했고 톱 기획사가 아닌 탓에 실패와 성공을 반복했던 눈물겨운 역사가 감동적인 점도 있었다. 무려 3장으로 구성된 본작의 CD 1,2에는, 생존을 위해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이 걸 그룹의 굴곡 있는 역사를 논스톱 댄스 리믹스로 흥겹게 엿볼 수 있고, CD 3에는 이지 리스닝 멜로디 팝으로는 그만인 부드러운 발라드가 배치되어 있다. 특히 발라드 모음은 부담이 없어 작업할 때 많이 걸어놨었던 것 같다. 그럴싸하게 당위성을 설명했지만 결국 '미녀 5명에 현혹된 것이 아니냐?' 또는, '마음속에 내재된 야수성의 발로가 아니냐?'는 질문 또한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12. Gustav Holst < The Planets >피아노 교사를 하셨던 어머니 덕에 클래식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접해왔고, 클래식 명곡들을 댄스 비트와 절묘하게 결합한 < Hooked On Classic > 같은 음반은 애청음반이었다. 그러나 막상 제대로 접하려면 장대한 구성에 지치는 경우가 많았고, '양식에만 치우친' 음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학시절 < 서양음악의 이해 >라는 교양과목을 통해 반 강제로 구매 하게 된 음반 중 하나였던, 영국 작곡가 홀스트의 관현악 집< The Planets >를 플레이어에 올려 논 순간 그때까지의 판단은 폐기 처분 됐다. 진격하듯 덮쳐오는 1악장(화성)의 공격성이라든지, 눈부신 금 빛 영상을 제공하는 2악장(금성), 스펙터클하고 다채로운 4악장(목성),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감상에 사로잡히는 7악장(해왕성)등은 프로그레시브 록에서도 적수가 흔치 않을 정도로 환상적이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들이었다. 이후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을 비롯, 프레빈(Andre Previn),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 등 여러 종류의 음반을 갖추게 됐고, 각기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판은 아무래도 적절한 템포, 시원스런 연주가 중용적인 제임스 레바인(James Levine) 버전이다. 이때부터 집에 노란 색(그라모폰)과 빨간(EMI 클래식스)라벨의 음반들이 본격적으로 장식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13. Gustav Mahler < Symphony No. 2 'Resurrection' >글램 록을 조망한 영화 < 벨벳 골드마인 (Velvet Goldmine) >의 장면 중, 데이비드 보위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주인공이 동경하던 글램 록의 거물이 등장할 때, 잔잔한 관현악곡이 흘러 나왔다. 짧은 부분 이었지만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다. 아름다운데 어딘지 기묘하고, 매력적이나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그것이 말러의 6번 교향곡(3악장)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관심만 가지고 다가가진 못하다가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거치는 동안 말러음악에 빠져들게 됐다. 현재는 말러의 전 교향곡을 각각 수 십장씩 보유하게 됐고 어느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저리는 감동을 받았던 것은 부활(Resurrection)이라는 부제로 유명한 2번 교향곡이 아닐까 한다. 부활이라고 하면 흔히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나 톨스토이가 연상되지만, 말러는 자신에게 평생 쫓아다닌 죽음에 대한 승리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나는 살기 위해 죽으리라"는 텍스트에 이 모든 것이 응축돼있다.) 기본적으로 교향곡 양식이지만 가곡을 비롯하여 오라토리오와 레퀴엠적인 요소를 도입한 종합 음악.
마니아와 입문자를 동시에 만족시킬 이상적인 연주로 주빈 메타(Zubin Mehta / 비엔나 필, 1975)을 꼽을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사이먼 래틀(Simon Rattle / 버밍엄 심포니, 1987)를 자주 찾는다.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를 활용하여 괴이하고 정신분열적인 인상을 주는 등 1악장은 좀 지나치게 개성적이지만,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영성 가득한 합창에 두터운 오르간이 들어서는 5악장의 종반부는 심장이 멎을 듯한 감동을 전달한다. 작곡가를 목표로 삼았지만 지휘자(생존을 위해 선택한)로 평가받았고, 본 작을 포함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당대의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당했던 그의 교향곡이 부활하여 들려주는 희망의 메시지는 세기를 뛰어넘어 감동을 준다.
14. Rush < Farewell To Kings >(1977) / U. K < Night After Night >(1979)끝으로 개인적으로 주제곡 같이 애청하는 두장을 묶어서 소개한다. 캐나다의 슈퍼트리오 러시는 절친하던 중학교 때 한 친구가 내게 붙여준 별명이었기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그룹이다. 꽤 멋지고 공격적인 별명 같지만 내막은 다분히 민망하다. '석'자는 돌석자이건 아니건 '돌'로 치환되기 쉬운 단어였고, 그렇게 바꿔 부른 '돌진'을 영어로 바꾼 정도 수준이다. (당시 중학생이다. 무얼 더 바라겠는가?) 어쨌든 이들의 앨범< Farewell To Kings >는 프로그레시브 메탈 앨범으로 애호가들에게 명망이 대단했었는데, 뒤늦게 1988년 쯤 라이센스화 됐다. 군부의 향수가 남아 있던 시절이라 통치자인 왕이 꼭두각시로 표현된 것이 문제였는지 왕에게 연결된 줄이 생략된 채로. 입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Xanadu'와 'Cygnus X-1'은 올 타임 애청곡이 됐다. 특히 블랙홀로 추정되는 'Cygnus x-1'의 논리적이다가도 뫼비우스의 띄 처럼 기묘하게 이지러지는 연주, 게다가 헤비메탈 특유의 맛깔 스런 헤비 사운드까지 생생한 균형감에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독님이 애청 음반으로 소개한 < Danger Money >를 가장 좋아하지만,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U.K의 모든 음반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사랑하는 앨범들이다. 음악 카페라도 가면 U.K 곡을 항상 신청할 정도. 일본 실황음반인 본 작은 마지막 작품인 것이 아쉬워서 더 소중한데, 뉴 웨이브와 프로그레시브 록을 합금한 것 같은 신곡을 두곡이나 선보여 더욱 그렇다. 특히 타이틀곡인 'Night after night'에서 에디 좁슨(Eddie Jobson)의 환각적인 선법의 건반 간주를 듣노라면, < Theme Of Secrets >(1985) 이후 프로듀싱활동에만 전념하는 이 대중음악계의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가 야속할 뿐이다. 알란 홀스워스(Alan Holdsworth)의 기타가 빠진 'In the dead of night'(1집 수록곡이고 이후 기타리스트 자리는 공석이 됐음)는 앙꼬없는 찐빵이 돼야 정상이나 에디 좁슨의 키보드 솜씨로 잘 메워져 색다른 멋이 들어섰다.(물론 약간은 아쉽다.) 하이라이트인 'Caesar's palace blues'는 존 웨튼(John Wetton)의 단단한 베이스와 보컬, 테리 보치오(Terry Bozzio)의 폭풍우 같은 드럼, 에디 좁슨의 스튜디오 보다도 더욱 자유분방한 보잉으로 펼치는 바이올린 솔로로 간담을 서늘케 한다. 그자리에 있던 행운아들이 부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