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역사를 빛낸 노랫말 명작 1부

by 정수민

2022.04.01


영화 <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의 여주인공 소피는 멜로디가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것이라면 가사는 그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음률은 음악의 첫인상을 결정하고 노랫말은 깊이를 만든다. 그동안 유재하, 토이, 서태지 등 싱어송라이터의 가사는 심도 깊게 알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져 왔지만 타인의 손에서 쓰인 아이돌 음악은 배제되었다. 그럼에도 K팝은 10대의 현실을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했고 그때 만들어진 형식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발매된 K팝 중 우리 기억에 또렷하게 새겨진 노랫말 명작들을 소개한다.




젝스키스 '사나이 가는 길(폼생폼사)'(1997)

폼생폼사, 네 글자가 주는 임팩트 덕분에 부제가 더 기억에 남는다. 강건한 제목과 달리 미련한 가사는 웃음을 자아낸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나인데/이제 와 구차하게 붙잡을 순 없잖아'라고 자신을 위로하다가 다시 마음가짐을 바꿔 복수를 다짐한다. '기가 막혀 홧김에 군대 갈까 했지만/머리 깎기 싫어서 다시 생각 고쳤지'라는 20대 초반의 치기 어린 랩도 킬링 포인트다. 그 모습이 폼 나진 않지만 어쩐지 첫사랑을 실패한 동생 같아서 '사나이다'라고 응원해 주고 싶다.




핑클 '영원한 사랑'(1999)

2021년 말 신인 걸그룹 아이브가 '난 몰랐어 내 맘이 이리 다채로운지'라는 가사로 소녀들의 마음을 대변했지만 본래 우리는 단 하나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그 인식에는 미디어가 주입하는 '첫사랑의 신화'와 함께 핑클의 영향이 남아있다. 새끼손가락을 올리며 부르는 '약속해줘', 양손을 돌리며 노래하는 '항상 나의 곁에 있어줘'를 들으면 그때만큼은 사랑을 맹세할 수밖에 없다. 그 시절의 낭만이 시들어버린 지금은 추억 속 음악 혹은 결혼식 축가로 불리지만 순수했던 마음은 아직 살아있다.




에이치오티 '아이야!'(1999)

에스파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SMP(SM Music Performance)의 시초는 에이치오티였다. 이들은 학교폭력을 비판하는 '전사의 후예', 공부를 강요하는 어른들에게 불만을 터트리는 'We are the future' 등 10대의 대변자로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야' 역시 '피우지도 못한 아이들의 불꽃을 꺼버리게 누가 허락했는가'라고 분개하며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했다. '언제까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반복하고 살 텐가'라며 더 이상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반성을 촉구했지만 2014년 역사는 무자비하게 되풀이되고 말았다.




보아 'Girls on top'(2005)

SM엔터테인먼트의 야심 찬 포부를 안고 출범한 갓 더 비트의 'Step back'은 17년 전 보아의 'Girls on top'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연애지상주의 대한민국에 등장한 이 곡은 사랑이 없더라도 여성이 오롯한 존재일 수 있다고 말한다. 당당하고 주체적인 현대 여성상은 오늘날 걸 크러시 콘셉트의 원형이다. 비록 '나는 나인 걸 누구도 대신하지 말아/내 모습 그대로 당당하고 싶어'라는 가사는 갈 곳을 잃고 '내 남잔 지금 Another level/너 따윈 꿈도 못 꿀 Level'로 뒷걸음질 쳤지만.




FT아일랜드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2007)

긴 제목이 낯선 탓에 속담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나만 모르는 구비 설화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FT 아일랜드의 노래였다. 당시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가져온 듯 나쁜 남자의 첫사랑을 절절하게 그린 가사를 들으면 2000년대가 새록새록하다. 지금 듣기에는 낯간지러워도 어떤 이들에게는 아직까지 공식처럼 여겨지는 제목이다. '사랑의 기준은 언제나 너'였다고 고백하던 아이돌 밴드가 첫사랑의 기준을 다시 세웠다.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2007)

후렴구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을 소녀들의 응원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음악이 지닌 함의가 크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맞이할 때 희생, 폭력, 혁명 같은 단어가 뒤따랐지만 '다시 만난 세계'는 사랑으로 감싸안기를 제안한다. 가사가 담고 있는 신념은 곧 연대의 상징으로 펴졌다. 2016년 이화여대 학생들은 경찰의 과잉진압 앞에서 우리 사회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노래를 불렀다. 10대의 문화를 대표하던 K팝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 태국 반정부 시위까지 퍼져 나가며 동시대 민중가요로 탈바꿈하고 있다.




빅뱅 '거짓말'(2007)

원더걸스의 'Tell me'를 계기로 후크송이 급물살을 탔던 2007년, 빅뱅은 리더 지드래곤이 쓴 서정적인 가사로 승부수를 던졌다. 가장 인기 있던 부분은 탑이 손가락을 빙빙 돌리면서 외치던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접어둔/이별을 향한 쪽지'였다. 당시 재밌게 따라 부르던 노랫말은 지금 돌이켜보면 구겨져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비유한 것 같아 감탄을 낳는다. 가볍게 즐기기 좋지만 마지막까지 거짓말이라고 고백하는 '그 말'은 정작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알쏭달쏭한 추측만 남긴다. 모두가 아는 만큼 감춰둔 의미도 많은 노래다.




샤이니 '누난 너무 예뻐'(2008)

투피엠을 위시한 짐승남이 각광받던 시대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샤이니의 데뷔곡은 제목부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아마 그녀는 어린 내가 부담스러운가봐'나, '누난 너무 예뻐/그 그녀를 보는 나는 미쳐'라는 미숙한 가사는 지금도 연하남의 교과서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이들이 내세웠던 소년의 성장기와 청량함은 엔시티 드림,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등이 여전히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한 편의 노랫말로 출발한 캐릭터의 서사는 후속작 'Love sick'을 지나 'Marry you'에 와서 마침표를 찍었다.




카라 'Step'(2011)

1월 1일 0시, 신년을 맞이하면 매번 스트리밍 사이트의 실시간 순위에 익숙한 곡들이 오른다. 요즘은 한 해의 소망을 다 이룰 것이라는 포부를 담아 우주소녀의 '이루리'를 가장 많이 듣지만 그전에는 카라의 'Step'이 있었다. 하우스 튠과 글리치 효과 사이로 훅이 지나가면 '넘어 지진 않을 거야 슬픔아 안녕/친해지지 않을 거야 눈물아 안녕'이라는 도입부가 시작한다. 'Pretty girl', 'Wanna' 등 미숙한 소녀 같았던 초기 이미지를 뒤엎은 그 자리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여전히 한 단계 도약하고 싶은 이들의 당찬 걸음걸이를 책임지고 있다.




비스트 '비가 오는 날엔'(2011)

봄에 벚꽃 특수가 있듯 여름 장마철마다 유난히 사랑받는 음악이 있다. 헤이즈의 '비도 오고 그래서', 에픽하이의 '우산', 샤이니의 '투명 우산' 등이 있지만, 많은 이들은 비스트의 '비가 오는 날엔'을 떠올린다. 빗방울이 떨어지면 지나간 연인의 잔상을 더듬는다는 현실적인 설정은 감성적이고, 멜로디와 완벽히 일체화한 '비가 오는 날엔 나를 찾아와/밤을 새워 괴롭히다'라는 구절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한다. 지금은 부를 수 없는 비스트라는 이름을 되살리는 마법 같은 곡이다.

정수민(jungsm9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