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ZM 필자들이 처음 듣자마자 반해버린 곡
운명적인 끌림은 '찰나'에 정해진다. 무릇 인간은 수많은 갈림길 속에서 평생을 고민하며 살아가지만, 대부분의 결정은 처음 마음에 들었던 선택지를 크게 벗어나는 법이 없다. 첫인상은 그만큼 강력하다. 눈 깜짝할 새 스치듯 지나가지만 오랜 시간 기억 한편을 지배하고, 더 나아가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운전대까지 마음대로 조종하는 무서운 힘을 지닌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 있다. 듣자마자 '아, 이 곡이다!' 싶던 순간 말이다. 이는 유년 시절 본인을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곡이 될 수도, 혹은 모든 음악이 지루할 권태기 무렵 선물처럼 내려와 귀를 트이게 한 곡이 될 수도 있겠다. IZM 필자에게 마음을 단번에 훔쳐간 범인들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저마다 씐 콩깍지를 설파하는 멤버들, 그 어느 때보다 리스트업이 빨랐던 특집을 지금 소개한다.
저스티스(Justice) 'Genesis' (2007)
전 세계가 셔플 리듬에 춤을 추던 2010년대 초로 기억한다. 당시 춤에 재능이 전무했던 나는 친구들의 현란한 발놀림을 지켜보며 스스로의 신체 능력을 원망했다. 이렇게 첫 만남은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몇 년 후 접한 'Genesis'는 전자 음악에 대한 내 고정된 시각을 완벽히 전복시켰다. 당장이라도 거대 괴수가 출현할 것 같은 도입부의 웅대한 호른 샘플링부터 압도당했다. 창세기를 열어젖힌 비장한 서막에 탄성을 내지른 것도 잠시, 쫀득한 베이스라인과 오페라-디스코 풍의 성난 음파들이 쉴 새 없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극적인 오프닝, 록의 문법을 차용한 전위적인 사운드, 곡 전개 방식까지 모든 게 혁명이었다. 첫눈에 반하고 그 뒤로 수백 번 다시 꺼내 들었음에도 매번 새롭다. (김성욱)
오마이걸 'Dolphin' (2020)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마음에 물보라가 일어났다. 중독성 있는 리프와 속삭이는 듯한 보컬이 긴장감을 유지하는 연출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만족스러웠던 건 리프와 같은 선율을 간단한 발음으로 반복하는 용기 있는 훅. 여기에 템포를 절반으로 뚝 떨어뜨려 깊은 그루브를 의도하는 후반부 편곡까지 듣고 나니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후크송에 흥미를 붙이지 못하던 내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순간이었다. 오마이걸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담긴 'Dolphin'은 이처럼 종합적인 매력이 근사한 곡이다. 처음부터 반했고, 지금 들어도 좋다. (김호현)
레인보우(Rainbow) 'The temple of the king' (1975)
나에게 이런 멜랑꼴리한 톤의 기타 선율이 지배하는 록 음악은 도저히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이 곡만은 예외다. 초등학생, 중학생,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내내 아빠 차에서 울려 퍼진 이 노래는 곡의 선율을 인지하게 된 그 순간부터 줄곧 내 인생을 지배해왔다. 추운 날 입김처럼 자욱하게 퍼지는 아버지의 담배 연기를 닮은 노래라고 느껴진다. 어딘지 시리고, 어딘지 씁쓸한 분위기가 음악 전체에 녹아있다.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여전히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삶이 참으로 쓸 때 내 옆에 소맥 한잔과 이 곡이 놓인다. (박수진)
이모셔널 오렌지스(Emotional Oranges) 'West coast love' (2019)
종종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검색해보곤 한다. 애써 제목을 찾아도 대부분 금세 잊어버리고 말지만 운이 좋게도 어떤 곡은 며칠간 플레이리스트 상단에 고정해놓을 만큼 내 귀를 사로잡기도 한다. 'West coast love'의 그루브는 그러기에 충분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따뜻한 바다와 인접한 미국 서부지역 특유의 여유로운 리듬감과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멜로디가 나의 취향을 저격했다. 반복적인 구성에 쉽게 물릴 법도 하지만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의 'Can I kick it?'을 오마주한 가사와 지역색을 살리는 곡 끝부분의 지-펑크(G-Funk)스타일 운용 등이 몇 번을 재생해도 질리지 않는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오렌지색이 트렌드를 이끈다는(Orange is the new black) 관용구의 전형인 곡이다. (백종권)
스테이씨(STAYC) 'Young luv' (2022)
우선 멤버들의 외모에 끌려서 스테이씨의 음악을 듣게 되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Beautiful monster', 'Run2u', '색안경' 'ASAP'은 몇 번 듣고 나서 그 매력을 알았지만 'Young luv'는 처음 듣자마자 원석임을 느꼈다. 내 젊은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1990년대 모던 록 스타일의 일렉트릭 기타 아르페지오와 스매싱 펌킨스의 '1979'가 떠오르는 베이스 연주가 친숙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잘게 쪼갠 드럼의 하이해트 연주 위에서 춤추는 시은의 코러스는 장조곡인 'Young luv'에서도 단조의 아련한 감성을 꽃피우게 한다. 이 원석은 이제 보석이 돼야 한다. (소승근)
The 1975 'Sincerity is scary' (2018)
첫눈에 반하는 찰나를 단어로 환산했을 때 기적이란 표현만큼 적합한 단위가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두운 차 안에 번진 'Sincerity is scary'는 무대 위 켜진 핀 조명처럼 나를 물들였고 그렇게 독백 극의 주인공인 듯 숨겨왔던 마음을 꺼내야 했다. 우연같이 다가왔지만 사실 차곡히 쌓은 감정이 포근한 브라스와 코러스 사운드의 파도를 타고 넘쳐버렸다. 잠시 찾지 못했던 것은 날카롭게 깎여버린 기억의 편린이 계속해서 생채기를 냈기에, 작게 난 상처들이 잊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흉터로 남아있다. 다시금 꺼낸 음악은 여전한 미련으로 넘실거리지만 그때의 기분이 너무나 따듯해 영원히 품을 순간으로 간직하려 한다. (손기호)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 'September' (1978)
꽤 많은 이들이 꼽는 첫사랑이 그들의 이상형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September'는 태어날 때부터 조용하고 서정적이었던 내 음악 취향과 기질을 너끈하게 무시하고 훅 밀려들었다. 'Do you remember'하고 당차게 묻는 도입부부터 'Ba-dee-ya'하고 화답하는 후렴구가 머릿속을 훼방 놓자 무아지경으로 고개를 흔들고 따라부르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했다. 짧은 문단을 쓰기 위해 흥겨움의 근거들을 애써 찾다 보니 더 대단하다. 넘치는 흥을 음악으로 재현한 펑크 선율, 신나는 브라스와 안성맞춤인 청량한 보컬과 힘차게 희망적인 내일을 외치는 듯한 가사까지. 이 감탄사에 아무 뜻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허탈한 순간마저 기분 좋은 쾌락의 연속이다. (손민현)
빅 션(Big Sean) 'Bounce back' (2016)
암스테르담의 밤은 환각이었다. 클럽의 불빛이 눈을 찔렀고 새벽 4시까지 음악이 울려 퍼졌다. 혈기 왕성한 청춘들은 드레이크의 'One dance'와 리한나의 'Work' 대디 양키의 'Gasolina'에 맞춰 몸을 흔들어댔다. 2016년 10월 발매로 교환학기와 겹치는 빅 션의 'Bounce back'도 향락의 도시를 떠오르게 한다. 다 같이 즐기는 위의 노래들과 달리 'Bounce back'은 집 근처 암스테르담 아레나를 홀로 걸으며 듣곤 했다. 빅 션의 감각적인 랩에 부담스럽지 않은 비트가 칠(Chill)한 기분을 선사했다. 드레이크 콘서트를 꿈꾸던 수리남계 네덜란드인 친구도 곡이 좋다며 호응했다. (염동교)
시거레츠 애프터 섹스(Cigarettes After Sex) 'Heavenly' (2019)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의외의 부분에서 반하기 마련. 평소 듣지 않던 스타일이나, 음악가에게서도 이런 경험을 가끔 한다. 드림 팝, 슈게이징으로 불리며, 평소에도 전혀 관심 없고, 우울 축축한 이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다. 시거레츠 애프터 섹스의 'Heavenly', 특별한 사연은 없다. 곡의 깊은 마력에 빠져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뿐. 우연인지 커버 사진도 음악 속을 유영하듯 두 사람이 잠수해서 헤엄치는 장면이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신시사이저를 처음 “딱” 듣는 순간 첫 귀에 반해버렸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진심으로 설렜다. 이 노래를 듣고 앨범(< Cry >)을 기대했다가 실망한 것 또한 슬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임동엽)
엠지엠티(MGMT) 'Kids' (2005)
투박하디 투박한 신시사이저가 오르골처럼 흘러나온 순간, 나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소리의 이상향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1분 동안 생성된 시냅스는 나를 한동안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엠지엠티(MGMT) 중독'으로 몰고 가기에 이르렀고, 뒤이어 < Oracular Spectacular >를 교과서처럼 탐닉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일까, 어린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카운트다운과 직관적인 전자음은 그 때의 순수했던 탐구 정신과 일말의 동심을 조건반사처럼 자극하게 만든다. 물론 단번에 매료된 뮤직비디오가 사실 팬 메이드 영상이었다는 것도, 반면 공식 영상은 예상보다 훨씬 징그러웠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이 또한 해프닝으로 여겨질 만큼 이 곡을 좋아한다. 아직도. (장준환)
시그리드(Sigrid) 'Sucker punch' (2019)
도입부부터 날아드는 전자음이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8비트 게임의 칩튠 사운드를 닮은 듯 자글거리고, 힘을 가득 머금은 듯 무거운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슈팅 게임 속으로 이끈다. 타격감 넘치는 비트가 거칠게 튕기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며 소울을 머금은 시그리드의 시원한 보컬이 확실한 기승전결 구조를 타고 해방감을 선사한다. 싱어롱을 유도하는 직관적인 멜로디까지, 특유의 재기발랄함은 만원 지하철에서도 페스티벌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을 안겨준다. 시공간의 제약 없이 비일상적인 틈을 만드는 도피처 같은 곡이다. (정수민)
러블리즈 'Temptation' (2018)
청초함 속에 서려 있는 눈물 한 조각, 상반된 이미지가 뒤섞인 표현으로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걸그룹 러블리즈를 추억한다. 하지만 'Temptation' 하나만큼은 절대 그 범주에 들여놓지 않는다. 뿌연 신시사이저가 코드를 세차게 누르며 둥둥거릴 때부터 예사 곡이 아님을 직감했다. 스타카토로 포인트를 준 멜로디, 신비한 기운을 배가하는 화음, 디스코그래피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감각적인 랩, 전작들을 상기시키는듯한 말미의 피아노 선율까지. 러블리즈에 빠져 지내던 골수팬이기 전에 아이돌 음악을 끼고 살아온 한 명의 리스너로서도 감히 예측조차 어려운,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트랙이었다. 단번에 나를 매혹시키며 내게 새로운 K팝 유전자를 이식한 노래에 남는 아쉬움은 딱 한 가지. 이 고혹적인 퍼포먼스를 콘서트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정다열)
리틀 믹스(Little Mix) 'Power (Feat. Stormzy)' (2017)
때는 2017년 여름, 해외 트렌드를 좀 흡수하고자 BBC 라디오 1채널을 한창 듣던 시기였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Who's got the power?'라는 가사와 함께 신나는 드롭 파트가 DJ의 멘트 사이 계속 나온 적이 있었다. 정체불명의 멜로디에 나는 곧바로 꽂혔고, 그렇게 알게 된 리틀 믹스의 'Power'는 화면이 박살 났던 내 아이팟 터치 보관함에 들어가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힘들었던 2017년이지만 음악만은 참 풍요로웠다. 사실은 노래를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꺼내 보니 탄산이 새지 않은 채 여전히 톡 쏘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거뜬한 유통기한에 새삼 놀랐다. (한성현)
이미지 편집 : 백종권
정리 : 장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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