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ZM 필자가 사랑하는 뮤직비디오 (해외편)
온종일 뮤직비디오만 송출하는 채널 MTV의 개막과 그 서곡 '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대중가수와 음악의 개념을 새로이 정립했다. 이제 뮤지션은 노래와 연주뿐만 아니라 비주얼과 영상에도 총력을 다해야 했고, 결국 듣는 음악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 물론 최근에는 개인 미디어와 숏폼 콘텐츠의 강세로 그 기세가 잠시 꺾인 모습이지만, 섣부른 상심은 접어두길. 21세기에도 사장되지 않고 생동하는 라디오처럼 뮤직비디오 역시 청각과 시각을 융합한 총체적 표현 도구로서 오래도록 기능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고 1981년 8월 1일 MTV 개국을 기념하고자 이즘에서는 각 필자의 애정이 깃든 뮤직비디오를 선정했다. 주로 각자의 음악적 주관에 기댔던 이전과는 미묘하게 분위기가 다른 이번 리스트. 필자들은 하나의 영상을 두고 각자 경험한 사랑의 이유를 늘어놓는가 하면, 선율에 녹아든 그림같은 아름다움을 설파하고, 영상에 담긴 의미와 매력을 집어내기도 한다. 지금부터 몇 분간은 마음에 드는 비디오를 깊게 감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IZM 필자가 사랑하는 뮤직비디오' 해외 편부터 시작한다. (손민현)
팻보이 슬림(Fatboy Slim) - 'Weapon of choice' (2001)
< 007 뷰 투 어 킬 >의 미치광이 빌런을 연기한 크리스토퍼 워컨, 기이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 존 말코비치 되기 >의 감독 스파이크 존즈, 펑카델릭의 베이시스트 부치 콜린스, 그리고 빅 비트의 시대를 주도한 팻보이 슬림의 앙상블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중하고도 자유로운 뮤직비디오를 탄생시켰다. 정장 차림의 크리스토퍼는 적막과 공허함이 감도는 호텔 로비에 멍하니 앉아 있다. 이윽고 'Weapon of choice'의 비트가 울려퍼지자, 호텔은 댄스플로어가 된다. 3분 40초간 리듬을 타고, 움직이고, 점프하고, 회전하고, 날아오르면서 가사처럼 이렇게도 저렇게도 마음껏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삭막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일탈이다. 2001년, 그렇게 팻보이 슬림은 수많은 샐러리맨 겸 내적 댄서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김태훈)
푸 파이터스(Foo Fighters) - 'The pretender' (2007)
파괴는 순간이다. 푸 파이터스의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The pretender'의 뮤직비디오에 복잡한 서사가 등장하지 않는 건 이때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상징하는 바를 해석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직관적인 대립 구도, 저항 정신을 밀도 있게 표현한 음악의 색채, 비트와 밀접하게 닿아 있어 타격감이 넘치는 장면전환 등 영상의 모든 요소가 펑크(Punk) 그 자체다. 이 세상 모든 위선자를 부숴버리는 푸 파이터스의 카운터 펀치가 4분 30초간 신나게 작렬한다. (김호현)
패닉 앳 더 디스코(Panic! At The Disco) - 'Girls/girls/boys (Director's cut)' (2013)
원 테이크의 아슬함을 즐긴다. 수백 번의 리허설을 거친다 해도 기어코 발생하고야 마는 돌발 상황, 그 무한한 변수를 극복한 필름이 포착해 낸 귀한 찰나를 좋아한다. 이 곡 또한 단 한 번의 촬영으로 기세를 이어 나간 원 샷(one-shot) 뮤직비디오다. 이십여 년 전 제작된 미국의 알앤비 가수 디안젤로의 아이코닉한 뮤비 'Untitled'를 그대로 리메이크했다. 알몸의 남성 뮤지션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열창하는 와중, 그 신체를 샅샅이 핥아 내리는 카메라가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가다 장골 근처, 기막힌 타이밍에 시선을 거둔다. 간단한 촬영 기법만으로도 재치와 긴장감을 더한 것은 물론 주인공의 연기도 강렬하다. 사랑의 애환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프론트맨 브랜든 유리가 피사체의 힘만으로 끌고 가야 하는 원 샷 필름의 약점을 온몸으로 보완했다. 바이섹슈얼을 암시한 가사에 맞춰 디렉터스 컷 클라이맥스에 삽입된 약간의 반전이 곡을 독특한 방식으로 시각화했다. (박태임)
레이디 가가(Lady Gaga) - 'Born this way' (2011)
사랑하는 것을 떠나 충격과 깨달음을 안겨준 뮤직비디오다. 다소 기괴하고 충격적인 어쩌면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출산을 묘사한 도입부로 인해 눈을 깜빡이게 하는 시작을 지나면 이후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강력 메시지의 집합체다. 속옷 정도만 입고 'Don't be a drag, just be a queen' 그러니까 '행세하지 말고, 그냥 네가 돼라'는 간단하고 위대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밀어붙인다. 시선을 뗄 수 없는 영상 속 캐릭터 및 시각 효과도 출중하다. 유니콘을 타고 내려온 레이디 가가가 제목 그대로 '태어난 대로 살자'며 전 세계 많이 어른이들의 “마더 몬스터(Mother monster)”가 된 작품. 이 뮤직비디오가 마음에 들었다면 2011년 53번째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가 펼친 공연도 추천한다. (박수진)
시저(SZA) - 'Doves in the wind' (2017)
화려한 비주얼이나 파격적인 연출로 시선을 끄는 뮤직비디오가 있는가 하면 시각적 쾌감이 부족해도 코믹하고 컨셉츄얼한 시도로 재미를 주는 영상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최고의 알앤비 앨범으로 손꼽힌다고해도 손색이 없을 시저의 < Ctrl >에 수록한 'Doves in the wind'가 그렇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가사와 켄드릭 라마의 컨셔스랩, 서정적인 얼터너티브 알앤비 사운드까지. 음악만들어서는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상상하기 힘들다. 무림고수들의 대결이라는 스토리를 짧고 전형적인 연출과 빈티지 질감의 대사, 어설픈 와이어 액션으로 담은 영상은1980년대 무협영화를 고증한다.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이 시저와 켄드릭 라마의 유쾌한 면모에 집중하자. (백종권)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 - 'Star guitar' (2002)
사람들은 30초 정도 지났을 때 이 뮤직비디오의 패턴을 눈치 챘겠지만 그 시간이 되기 전까지 대부분은 예측 불가능한 시각적인 충격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유는 감독이 미셸 공드리이기 때문. 가사 없는 차갑고 날카로운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와 건조한 영상이 만나 제3의 공간을 창조한 이 명작은 돈이 아닌 아이디어의 승리이자 영광이다. 때로는 'Star guitar'처럼 음악과 화면이 어울리지 않는 뮤직비디오가 충격과 감탄을 선사한다. (소승근)
맥 밀러(Mac Miller) - 'Good news' (2020)
'Good news' 뮤직비디오의 맥 밀러는 초연했다.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된 < Swimming >에서 비극적 고통을 토해낸 젊은 아티스트에겐 '삶'에 대한 미련은 사라졌고, 고민이 떠난 자리엔 < Circles >란 텅 빈 허무가 머물러있다. 타인을 향해 미소 짓던 그였지만 당장 자신의 내일은 캄캄했고 이는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형태로 변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혼란을 뒤로하고 도달한 곳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 맞이한 순간이 위안이었을까? 확신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가 마련한 무(無)의 공간에서 단지 유영할 뿐이었다. 6분 30여 초. 한 사람의 생을 판단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시간. 다만 여과되지 않은 고뇌와 해방의 과정이 세상에 묵직이 내려앉았다. 맥 밀러가 견딘 무게가 큰 만큼 모두의 상처도 깊게 파였지만, 그가 느낀 우울의 끝엔 남은 이들을 위해 심은 위로가 작게 싹트고 있었다. (손기호)
에미넴(Eminem) - 'Stan' (2000)
누군가의 사랑은 잔인하고 강렬하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Stan'은 뮤지션과 그에게 집착하는 팬의 시선을 빌려 비극적인 이야기로 엮었다. 1인 2역을 소화한 에미넴의 랩이 먼저 애증의 분노를 토해내고, 노랫말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광적인 스토킹 현장이나 강물에 차가 들이받는 컷이 차례로 입혀지면 이 서사는 곧 생동감 넘치는 현실로 다가온다. 비극으로 치닫는 이 울적한 영상은 감상자들에게 시커멓게 타버린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을 뇌리에 강하게 남겨버린다. 참, 이왕 'Stan'을 챙긴 김에 뮤직비디오 디렉팅을 닥터 드레가 맡았다는 사실과 2001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엘튼 존과 함께 한 라이브 버전도 잊지 말길. (손민현)
자넬 모네(Janelle Monae) - 'Dirty computer' (2018)
자넬 모네의 4집 < Dirty Computer >와 함께 제작된 동명의 장편 SF 필름은 규범에 맞지 않는 소수자들을 '오염된 컴퓨터'로 간주하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제인 57821'로 분한 자넬 모네 역시 강제로 기억을 삭제 당할 위기에 놓이지만 그의 기억은 오히려 시스템을 교란하는 저항의 도구로 작용한다. 그것이 기억과 꿈, 환상의 경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며 형식적으로는 다름 아닌 뮤직비디오였기 때문이다. 내러티브 필름과 뮤직비디오의 절묘한 결합, 정점에 오른 모네의 음악적 성취,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메시지까지. 시학, 미학, 주제 모든 면이 군더더기 없이 완벽하다. (신하영)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 - 'Sledgehammer' (1986)
정신 착란적이고 기괴하지만 놀랍고 감탄스럽다. 프레임 단위로 촬영물을 연결해 움직임을 구현하는 픽셀레이션과 점토를 이용한 클레이메이션 등 다양한 기법을 동원한 'Sledgehammer'는 가브리엘이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네시스 시절부터 제공한 시각적 충격파의 연장선상이며, 아하 'Take on me'와 더불어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 영상이다. 아르침볼도의 환상화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개구진 동심(머리둘레를 횡단하는 기차)과 고약한 장난(치킨 댄스)이 뒤섞인 유미주의 종합선물 세트는 가브리엘 뇌 속 상상계의 출력물. 곡의 펑키(Funky) 리듬을 살린 스티븐 R. 존슨의 연출력은 < So >의 수록곡 'Big time'에서도 이어진다. (염동교)
케로 케로 보니토(Kero Kero Bonito) - 'Break' (2016)
음악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음악에는 시공간 이상의 힘이 있다. 평범한 일상의 순간도 음악과 함께 종종 특별한 경험으로 완성되곤 하니 말이다. 케로 케로 보니토의 프론트우먼, 사라 보니토는 과연 음악의 이런 마법같은 힘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하트 모양 선글라스, 정체 모를 음료 한 잔과 함께 런던 곳곳에 걸터앉은 뮤직비디오 속 사라는 그 존재만으로 주위를 휴양의 한복판으로 바꿔 버리며 이 흥미로운 현상을 몸소 시각화해 보인다. 바쁜 일상 속 찰나의 휴식이 필요하다면,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Break'를 재생해 보자. 그곳이 어디든 친절한 가이드 사라 보니토가 당신을 달콤한 휴양지로 안내할 것이다. (이승원)
마이 케미컬 로맨스(My Chemical Romance) - 'Welcome to the black parade' (2006)
죽어가는 남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감성적인 피아노 선율. 단숨에 이목을 잡아끄는 오프닝이다. 거기에 아버지에 대한 가사의 언급과 화려한 사후세계가 등장하면 이 뮤직비디오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병원에서 숨을 거둔 환자가 저승으로 연결되어 자신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이들을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죽음이 삶과 별개가 아닌 또 하나의 연장이라는, 노래의 가사 'Carry on'의 의미가 가슴에 꽂힌다. 저승의 악단 '블랙 퍼레이드'로 분한 멤버들의 격정적인 연기, 돈 냄새 나는 세트와 각종 효과 장치, 배경을 가득 메운 엑스트라 귀신들이 완성한 시각적 아름다움도 압도적인데, 무엇보다 그러한 삶과 죽음을 어루만지는 메시지가 따뜻하다. 마이 케이멀 로맨스의 'Bohemian Rhapsody'? 아니, 구태여 어떤 곡과 비교할 필요 없는 2000년대 최고의 록 명곡. (이홍현)
오케이 고(OK Go) - 'Here it goes again' (2009)
뮤직보다 뮤비! 음악보다 영상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오케이 고 덕에 뮤직비디오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무표정으로 진지댄스를 춘 'A million ways', 타임랩스를 이용한 'End love', 그리고 화룡점정 러닝머신 퍼포먼스를 보여준 'Here it goes again'을 대표로 밴드는 지금까지도 기발한 작품을 찍어오고 있다. 뮤직비디오에 정성을 다하는 이미지 탓에 라이브를 못 할 것이라는 편견도 있었지만, 몇 년 전 국내 록 페스티벌에서 본 그들의 실력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오해는 풀렸고, 오케이 고는 음악을 못하는 게 아니라 영상 제작을 더 잘할 뿐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음악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임동엽)
뱀파이어 위켄드(Vampire Weekend) - 'Cousins' (2009)
기발하다. 뱀파이어 위켄드의 커리어 중 가장 통통 튀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 < Contra >에서도, 그중 가장 복잡하고 급진적인 곡인 'Cousins'의 뮤직비디오는 더할 나위 없이 밴드가 가진 활기와 상상력의 역동성을 내포한다. 골목길 위에 놓인 트레일을 반복 움직이며 간단한 변주를 주는 구조부터 충동적이다.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의 감독 가스 제닝스가 구현한 독창적 프레임 속 원색 그라피티와 접착 테이프, 각종 저예산 소품들, 꽃가루마저 휘날리는 투박한 판타지가 현실과 화려하게 충돌한다. 큰 의도를 찾을 수 없어도 정신없이 빠져든다. '인디'가 가진 불특정 유쾌함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군말없이 이 영상을 보여주지 않을까. (장준환)
차일디쉬 감비노(Childish Gambino) - 'This is America' (2018)
팝과 힙합, 어디에도 접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알고리즘은 이 충격적인 아수라장 한가운데로 나를 안내했다. 합창과 기타 연주가 어우러진 도입부만 들으면 평화로운 찬가에 가깝지만, 주인공이 뒤춤에서 총을 꺼내들어 기타리스트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내 머리도 함께 터졌다. 투신, 총기 난사, 집단 폭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중에도 '이게 미국이야/정신 바짝 차려'라며 뚝심 있게 현장 고발을 이어 간다. 트랩 비트 위에 실제 흑인들이 겪었던 참상을 그린 덕분에 성찰의 탄환 한 발이 즉각 신체를 관통한다.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재차 불을 지폈던 차일디쉬 감비노 조차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종종 드러냈다는 게 아이러니. 분개해선 안 된다. 당장 주변의 약자들만 돌아봐도 달라진 게 없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게 모두의 현실이다. (정다열)
펄프(Pulp) - 'Bad cover version' (2002)
“네가 누굴 만나든 내 아류일 뿐”이라 말하는 프론트맨 자비스 코커의 심보 고약한 가사와 달리 뮤직비디오의 정서는 사뭇 따뜻하다. 유명 뮤지션을 초빙해 녹음 광경을 포착하는 캠페인 송의 형식을 비틀어 진짜 아티스트 대신 그들의 닮은꼴을 초대했고, 심지어 음원에는 이들의 어설픈 노래까지 담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지만 이 우스꽝스러움 속에 공동체의 가치가 피어난다. 사실 우리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 각각 불완전한 엉터리, 가짜일 수는 있어도 한데 모여 화합하는 순간 삶은 어느덧 '진짜'가 되며 형편없는 모창은 사랑스러운 찬가로 바뀐다. “가짜들의 세상”이어도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이다. 마음만 순수하다면. (한성현)
이미지 편집: 백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