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올해의 가요 싱글
걸그룹 강세, 세계 시장에서의 성과 등 작년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지만, 그 형태는 살짝 달랐다. '중소돌의 기적'이라는 이름 아래 신생팀들이 기세를 떨쳤고 BTS의 빈자리는 막내 정국이 채웠다. '중꺾마'를 외치며 희망이 넘치던 작년과 달리 음악계에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졌고, 대중음악계 굴지의 라이브 플랫폼 온스테이지는 13년 만에 막을 내렸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공존했다. 그럼에도 언제나처럼 양질의 음악들이 기개를 펼친 한해였다. 여기 소개하는 10곡의 순서는 순위와 상관없이 모두 올해를 빛낸 노래들이다.
다이나믹 듀오(Dynamicduo) & 이영지 'Smoke'
< 스트릿 우먼 파이터 >의 큰 성공 이후 잇따른 댄스 오디션 프로그램이 계속되어 싫증이 느껴질 즈음 'Smoke'가 구원자처럼 등장했다. 아마 한국 힙합계에서 엮일 수 있는 만남 중 가장 대중적인 조합일 이영지와 다이나믹 듀오의 앙상블은 '언니들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웅변하듯 한 발의 강력한 총알을 날리며 시리즈의 생명력을 연장했다. 쉴 틈이 없이 달리기만 하는 현대 사회를 떠올리게 하는 가사는 패자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이 각박한 만큼 파괴적이다.
곡의 백미는 역시 개코의 탁월한 훅. 댄스를 즐기는 이들이나 방송의 팬들은 물론이고, 길거리를 거닐며 흘러나오는 음악을 가볍게 듣는 이들까지 단번에 음악에 몰입하게 만드는 대단한 실력이다. 이 파트에 이바다 창작의 파워풀한 안무를 얹어 숏폼 콘텐츠 바이럴을 의도하는 챌린지는 2023년 현시점 한국의 대중음악을 규정한다. 좀처럼 흥이 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노래와 춤은 뚝심 있게 대중의 마음을 관통했다. (김호현)
라이즈(RIIZE) 'Get a guitar'
1956년 'Heartbreak hotel'로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 시대를 개막한 이래 대중의 곁엔 늘 기타가 자리했다. 값이 싸고 혼자서 연주할 수 있다는 일반론적 이유와 별개로 수많은 스타가 많은 이를 견인할 악기로 기타를 선택한 것은 현(絃)을 튕기면 울리는 통의 주파수가 인생과 맞닿았기 때문이었다. 구슬프게 사연을 털어놓기도 때로는 춤을 추기도 용이한 선율에 모두가 흔들렸고, 그렇게 라이즈의 'Get a guitar'가 진동했다.
스스로 대중성을 삭제한 K팝 보이그룹이 밴드 스타일을 찾은 것이 타개의 일환이었다면, 더욱더 직관적인 라이즈가 독보적이다. 짧은 도입부와 플레이 타임이란 현재 트렌드를 챙기면서 필수 불가결이었던 랩과 퍼포먼스 파트를 과감히 제거.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와 펑키(Funky) 리듬에 맞춰 포개지는 단순한 사운드를 세심하게 다듬었고 나아가 기타 솔로까지. 복잡한 서사와 구조란 장르의 진입장벽을 부숴 버리며 순수성을 되찾고자 하는 선언문과도 같다. 이렇게 불순물이 섞이지 않아 투명한 형태를 갖춘 음악은 고민 없이 스며들어 말 그대로 2023년의 마음을 거머쥐었다. (손기호)
박재정 '헤어지자 말해요'
큰 열풍을 겪은 만큼 발라드의 인기는 빠르게 식고 말았다. 술과 사랑 타령, 그리고 여러 사재기 논란에 신물 난 사람들이 힙합이나 K팝 아이돌을 찾으면서 꽤 오래갈 듯 보였던 침체기. 봄부터 여름 거쳐 겨울까지 올 한해 꾸준한 인기를 구가한 박재정의 '헤어지자 말해요'는 잠시 이별을 선언한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을 돌린, 발라드 진영의 성공적인 사랑 고백이자 괄목할 만한 재부흥 신호탄이다.
거창한 표현으로 꾸미지 않은 가사는 연애마저 손익계산의 영역으로 편입해버린 이 시대 대중을 자극했고, 쉽지 않은 가창 난이도는 유튜브 커버 문화와 성공적으로 결합했다. 알고리즘과 챌린지를 겨냥해야 하는 머리 아픈 시대에 발라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역시나 탄탄한 기초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곡. 어제의 정(正)이 오늘의 반(反)이 되고 내일은 합(合)을 도모하는 숨가쁜 가요계를 상징하면서도, 꾸준히 노력하는 자에게 결국 행운은 찾아온다는 희망을 품게 해준 싱글이다. (한성현)
실리카겔(Silica Gel) 'Tik tak tok (Feat. So!YoON!)'
다양한 사운드로 여러 갈래의 길을 탐색해 온 실리카겔의 확실한 이정표가 'No pain'과 < Machine Boy >라면, 'Tik tak tok'은 그 앞에 펼쳐진 활주로다. 6분대의 긴 러닝타임에도 늘어지는 부분 없이 세션의 탄탄한 합과 다채로운 구성으로 힘차게 전진한다. 인트로부터 확실하게 꽂아 넣는 강렬한 기타 리프와 중독성 강한 코러스 파트는 뻔하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이다. 육중한 베이스와 드럼은 매끄러운 중춧돌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황소윤의 허스키하고 몽환적인 보컬은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외침처럼 들려 몰입감을 준다.
어쿠스틱 기타와 합창으로 잠시 분위기를 가라앉힌 후, 무려 3분이 넘도록 질주하는 김춘추의 격정적인 기타 솔로는 감탄을 넘어서 충격이다. 단순한 리프 반복이 아닌 뚜렷한 기승전결 구조 안에서 고조될수록 접신의 경지에 이르는 현란한 퍼포먼스에 김건재의 광적인 드럼 속주까지 융합되니 넋을 잃고 들을 수밖에 없다. 연주 자체의 짜릿한 쾌감은 실리카겔의 당초 강점이긴 했지만, 'Tik tak tok'은 그 점을 극한까지 밀어 붙이며 그들을 대체 불가 밴드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김태훈)
악뮤(AKMU) '후라이의 꿈'
데뷔 초기 악뮤와 닮아 있는 재기발랄한 작법으로 이 시대 청춘의 마음을 그린 동화, '후라이의 꿈'은 2000년대 플래시 애니메이션 '감자도리'처럼 무거울 수 있는 인생관 이야기를 발랄하고 부드럽게 풀어낸다. '꾸물꾸물 말고 꿈을 찾으래'와 같은 재치 있는 구절은 < Play > 시절의 향수를 되살린다. 꿈을 다룬 기성곡 '거위의 꿈', '달팽이', '고래의 꿈', '네모의 꿈'을 가사에 녹여내고 이들을 주인공 후라이와 대조하는 센스도 돋보인다.
닭이든 후라이든, 껍질을 깨고 나온 이 삶은 그 자체로도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가. '후라이의 꿈'에 내포된 의식은 번아웃이 빈번한 현대의 삶에 울림을 준다. 심지어 10대 후반을 지나고 있던 이찬혁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곡이 약 10년이 지난 뒤에야 발매된 것임에도,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유효하다. 오빠와는 다른 자신만의 고민과 시행착오를 겪었을 이수현의 독창이라는 점 또한 의미가 있다. 과거로의 여행이자 성장의 기록, 그리고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남매의 러블리한 이야기다. (김태훈)
윤석철 & 세진 '칵테일 파라다이스'
다른 맛의 재료가 섞여 새로운 맛을 내는 칵테일처럼, 세진의 톡 쏘는 '청량함'과 윤석철의 크리미한 '부드러움'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졌다. '피나콜라다 모히또, 아이리쉬 커피, 올드패션 맨하탄 블루하와이' 같은 이국적인 단어는 독특한 어감을 만들고, “한 잔 더” 하며 반복되는 후크도 알싸하고 시원하다. 마시고 마시다 보면 즐겁게 업되다가 끝내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몽환적인 그 순간, 흔들리고 뒤엉키는 '취기'까지도 완벽하게 재현한다.
히든카드는 피아니스트 윤석철의 보컬. 피아노처럼 맑고 투명한 목소리에 음정을 손가락으로 짚어나가듯 유려하게 한 음 한 음 오르내린다. 무엇이든 '적당히'가 가장 어려운 법인데, 리듬과 멜로디는 물론 가사에 보컬까지 어디 하나 어설프거나 어색함이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완숙한 두 사람이 유쾌한 블렌딩으로 가장 최신의 보사노바이자, 웰메이드 팝을 주조했다. (김반야)
정국 'Seven (Feat. Latto)'
부드러운 스트링과 경량의 투스텝 리듬, 그 위로 요일을 차분히 읊으며 산뜻하게 내려앉는 보컬까지. 'Seven'이 더운 여름철의 열기를 뚫고 빌보드 차트 정상에 안착할 수 있던 비결은 다름 아닌 '순백함' 덕분이었다. 작년 해리 스타일스와 스티비 레이시가 주도한 바이브(vibe) 계열의 음악 흐름을 이어 받아, 하루 종일 재생해도 물리지 않을 첨단의 무가당 사운드를 선보인 것이다.
일주일 내내 사랑을 나누겠다는 관능적인 노랫말과 '빅 에너지'를 가진 라토(Latto)의 지원 사격조차 건실한 청년의 고백처럼 들릴 만큼 대중적 무해함이 곡 전반에 자리한다. 흥얼거림을 유발하는 명료한 선율과 절제된 퍼포먼스 역시 박차를 가하는 요소. 정통의 팝을 원하는 이라면 반드시 참고해야 할 교보재가 또 하나 추가됐다. (장준환)
트리플에스(tripleS) 'Rising'
사람들은 대개 결과만을 바라본다. 그저 누가 누가 더 높이 올라가는 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상이다. 트리플에스의 'Rising'은 이처럼 각박한 현대사회 속에서 과정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곡이다. 계속해서 새 유닛을 만드는 시스템, 큰 무대 위에서의 환상을 보는 뮤직비디오처럼 가사의 당당한 태도는 어제의 성취가 아닌 오늘의 도전 정신에 기반한다. “One day 이루리라/Today 다르리라/나만 믿으리란 다짐” 가진 것을 과시하기 바쁜 요즘의 문화에서 벗어나 현재의 부족을 인정하고 채워가려는 순수한 열정과 욕망을 볼 수 있다.
뛰어난 프로듀싱은 어린 소녀들의 비장한 언어가 단순 허세가 되지 않도록 한다. 탄탄한 선율 전개와 깔끔하면서도 속을 꽉 채워 중심을 잘 지킨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조화롭게 뭉쳤다. 여기서 끝난다면 그저 멋진 곡이겠지만, 노래 전반을 관통하는 “랄랄라”의 반복은 대중음악으로서 불특정 다수에게 닿을 수 있는 친근함의 미덕까지 보충한다. K팝의 대외 홍보용 간판을 다는 것은 대형 기획사의 몫일지 몰라도, 시장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이렇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언더독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올해의 “잘 만든” “아이돌” “음악”. (한성현)
피프티 피프티(FIFTY FIFTY) 'Cupid'
서서히 잠겨오는 'K팝의 위기 속에서' 중소돌은 원초적 매력을 부각하며 기적을 산출했다. 요란한 퍼포먼스와 비주얼이라는 다원적 상징을 도식화해 동류만을 양산하는 K팝의 현 지평을 떠나 오히려 역사가 검증한 감성 팝의 친밀함을 입힌 결과였다. 차라리 그건 '아메리칸 팝'이었고 동시에 음악의 승리이기도 했다. 거대 기획사와 슈퍼 아이돌도 못해낸 빌보드 싱글 25주 연속 차트인, 연말 44위가 웅변한다. 10년 K팝의 범(凡)불안을 해소할 항체로서의 기능가동과 새로운 패턴의 가능성을 목전에 둔 쾌속항진이 한동안 펼쳐졌다.
'재난의 서사 속에서' 수작이 갖는 면모를 지킨 건 더 놀라웠다. 차트 승승장구 얼마 후 우리가 접한 것은 전속계약분쟁, 사문서위조, 쌍방 고소고발, 법리다툼 등 전부 음악 아닌 법의 언어들이었다. 분쟁 당사자 어트랙트와 더기버스는 루비콘 강을 건넜고 승패가 거의 갈린 상황인데도 슬로건인 50대50의 균형과 합은 부재했다. 예측된 패망선고에서 '중소돌의 기적'이 숨 멎지 않은 게 진짜 기적. 이걸로 올해의 모든 음악타이틀 소유는 정당화된다. 확실히 상승과 몰락, 일몰과 일출은 한 쌍의 메커니즘! 폐허는 재건을 부른다. (임진모)
하이키(H1-KEY)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3년, 4년, 6년 반, 9년. 하이키 멤버들이 연습생으로 보낸 기간이다. 결국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는 자신들의 이야기고 그들의 서사다. 가사처럼 네 명은 고개를 들고 악착같이 버텼으며 어렵게 세상에 나왔다.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 가사는 힘든 삶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우리를 위로했고 희망과 인내를 수혈했다.
하이키 음악은 록과 멀지 않다. 이전에 발표한 'Heartlight', 'Run'처럼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도 록적이며 데이식스 영케이의 가사는 그 큰 그림의 밑바탕이다. 카랑카랑한 휘서의 선창부터 비장미를 착장한 노래는 후반부의 합창 코러스로 웅대한 마침표를 찍었다. 록과 팝, 댄스, 트랩 비트, 브릿지에 등장하는 경건한 하몬드 오르간 연주 그리고 민중가요의 스토리라인까지 결합된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는 2023년에 나온 노래들 중에서 가장 선하고 아름답다. (소승근)
이미지 편집: 김태훈
[2023 올해의 팝 싱글]
[2023 올해의 가요 앨범]
[2023 올해의 팝 앨범]
♬플레이리스트 감상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