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올해의 팝 싱글
빌보드의 수치적 지표 이외에도 다양한 스타일의 곡들이 각기 개성을 드러내며 균형감을 맞춘 한 해였다. Z세대와 틱톡 기반의 감각적이고 통통 튀는 곡들 사이로 담백한 컨트리 팝이 우직하게 중심을 지켰고 독특한 만듦새의 DIY(Do It Yourself) 형 인디 팝도 고개를 내밀었다. 2023년 팝 음악계의 지형도를 그린 10곡을 소개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비틀스(The Beatles) 'Now and then'
대중음악에 다시 없을 미완성 교향곡에 종지부가 찍혔다. 그 주인공은 1977년경 존 레논이 작업했던 'Now and then'의 데모 버전. 곡이 부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올해 가장 화두였던 '인공지능'의 도움이 컸다. 메타버스, 버추얼 가수, AI 작곡 등 음악을 향한 기술의 침투가 이뤄지고 있던 와중에 발 빠르게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완성도로만 따진다면 존 레논의 보컬은 어색하고 노래는 단순하지만, 비틀스라는 거대한 서사가 주는 감동은 끝없는 여운을 남긴다.
비틀스라는 영화의 엔딩이 이렇게 슬플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밴드의 역사를 아는 자에게는 큰 흡인력을 발휘하겠으나, 생각해 보면 음악 애호가 중에서 이들을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지 않을까. 최고의 노래는 아니어도 최고의 순간임은 틀림없다. 우리의 시대에도 비틀스의 신곡을 들을 수 있다는 것과 내년 브리티시 인베이전 60주년을 위안 삼을 싱글이 나온 것에 대해 감사를 보낸다. 영원을 얻은 밴드의 작별을 고하는 마지막 인사가 아름답다. (임동엽)
보이지니어스(boygenius) 'Not strong enough'
내적 고뇌와 투쟁의 흔적이 짙은 'Not strong enough'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이다. 동시에 정규 1집 < The Record >를 차분한 절정으로 인도하고, 감정의 연대와 치유, 기성 체제를 향한 나직한 저항을 상징하는 보이지니어스의 간판 역할까지 도맡았다. 팀의 단단한 심지와 폭발적인 창작력이 아름답게 융화된 결과가 곡 하나로 귀결되니 음악적으로도, 그리고 철학적으로도 올해의 큰 성과다.
자기 고민에서 비롯된 사색에 따라 넘나드는 가사들을 따라 반주도 유영한다. 포근한 기타가 인도하는 전반부 피비 브리저스의 포크, 분위기를 환기하며 등장하는 줄리언 베이커의 보컬과 신시사이저의 난입은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다채로운 조각들, 책임감이나 불편한 감정들을 상징한다. 사상의 표현과 그 발산을 돕는 음악 모두 제 임무를 다했다. 'always an angel, never a god'를 반복하는,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결론에 이르면 깊은 상념에 빠지는 걸 막을 수 없다. 밀려드는 낯선 고양감에 걱정은 접어두자, 이처럼 감미로운 사색은 또 없을 테니. (손민현)
도자 캣(Doja Cat) 'Paint the town red'
'Say so'와 'Kiss me more'의 히트로 형성한 독보적인 정체성이 도자 캣 본인에게는 족쇄에 가까웠다. 힙합이 아니라 팝 뮤지션이라는 안티 팬들의 공격을 참지 못한 그는 삭발과 악마 분장을 감행하며 새로운 자아 '스칼렛(Scarlet)'의 탄생을 선포했다. 과격한 행보에 많은 이들이 실패와 몰락을 점쳤으나 이번에도 승리는 그의 것. 자신을 향한 비난에 코웃음 치듯 'Paint the town red'로 미국과 영국 차트 모두 정상을 기록하며 도자 캣은 2020년대 여성 힙합 뮤지션의 전쟁터에서 유유히 왕좌에 올랐다.
작년 'Vegas'의 방법론을 계승한 디온 워윅 원곡 'Walk on by'의 절묘한 샘플 사용은 늘 그의 지지기반이었던 틱톡 세대를 확실한 아군으로 포섭했고, 쿨하게 내뱉는 직설적 가사는 스마트폰 화면 뒤에 숨은 키보드 전사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산뜻했던 핑크빛 세계를 덮은 새빨간 물감의 재료가 다름 아닌 적의 선혈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능글맞은 태도를 유지하는 도자 캣은 무참한 살육의 현장을 마치 산책하듯 유유히 걸어다닌다. 이 피비린내 나는 레드 카펫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자신의 '스타' 칭호 앞에 '힙합'을 큰 글씨로 새겨 넣은 그는 원하던 업적을 달성한 채 미소짓고 있다. (한성현)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 'A&W'
라나 델 레이의 정신감정을 해봐야 할 정도로 관능을 넘어서는 퇴폐와 외설이 곡 전체를 감싼다. 음침하고 축축한 공기 속에서 그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금기를 부정하며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 종착점은 카타르시스, 이 감정정화를 통해 지지층으로부터 음악의 순수와 순결을 확약 받는다.
그는 안티 팬들한테 보내는 자기 파괴적인 답가 'A&W'를 발렌타인데이에 공개해 진정성을 증명하고자 했고 악기와 소리를 최소화시켜 가사를 집중하게 했다. 구렁이가 먹잇감에 다가가듯 느린 이 곡은 우리의 감정과 감각을 서서히 잠식하며 4분 10초부터 등장하는 808 드럼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난잡하지만 올곧고, 나른하면서도 정갈한 'A&W'는 올해의 중독이다. (소승근)
마일리 사이러스(Miley Cyrus) 'Flowers'
이별한 이에게 노래가 갖는 의미는 크다. 사생활이 공개된 아티스트가 사랑하던 이와 헤어졌을 때 잔인하게도 그가 발매할 노래에 관심이 집중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팝 스타 마일리 사이러스는 이혼이 불러온 내밀한 맥락을 공개적으로 용기 있게 풀어내며 감정적인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그는 충분히 낙담하지만, 아픔을 거부하지도, 기약 없는 우울함에 빠지지도 않는다. 보다 성숙한 태도로 정당한 슬픔을 느낀 후 자신에게 꽃을 건네며 주체적으로 일어선다.
느린 템포와도 호응하는 서정적인 선율과 댄스플로어를 떠올리게 하는 그루비한 비트의 묘한 앙상블이 마일리 사이러스의 복잡한 심경을 적확하게 담아낸다. 1980년대의 디스코를 겨냥한 과거 지향 사운드는 가사에서 묻어나는 아련함에 밀도를 더한다. '자신을 사랑하자'는 기치가 이젠 창의적이거나 새롭진 않다. 하지만 뮤직비디오를 오롯이 홀로 다 채우는 가수의 명확한 의지와 'Flower'의 세계적인 흥행은 이 진부한 메시지가 2023년에도 매력이 있다는 걸 방증한다. (김호현)
핑크팬서리스(PinkPantheress) & 아이스 스파이스(Ice Spice) 'Boy's a liar Pt.2'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득세, Z세대의 전격 침투, 틱톡 발 저지 클럽의 부흥… 현시대 모든 음악의 흐름이 2001년생의 핑크팬서리스를 향한다. 그의 존재와 팝의 흐름을 동시에 알던 이들 중에, 지금의 이 부상(浮上)을 예상하지 않은 자가 과연 누가 있을까. 브레이크비트(Breakbeat)의 유연화를 몸소 지휘하던 분홍빛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주머니 대탈출, 그 '예견된 비상'이 'Boy's a liar Pt.2'를 통해 비로소 실체화됐다.
'Ditto'와 'OMG', < NewJeans 2nd EP 'Get Up' >의 뉴진스가 전한 충격을 기억하는 우리에게 왜 이 작법이 매력적인지에 대한 설명은 불필요하다. 미니멀한 볼티모어 클럽 비트에 라떼 크림처럼 사뿐히 앉은 멜로디, 그에겐 기존 작법의 반복일 뿐이겠지만 대중의 귀를 관통하기엔 충분하고도 넘친다. 트렌드를 최전선에서 집약하면서도, 거듭된 칼갈이를 통해 그 최상단까지 동시에 겨냥하는 팝의 차세대 거물. 핑크팬서리스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이제 팝에 대한 무지와 가까워졌다. (이승원)
시저(SZA) 'Kill Bill'
예상했던, 그리고 기다렸던 성공이다. 켄드릭 라마의 < Black Panther: The Album >과 도자 캣의 'Kiss me more'에 참여하며 정상 궤도에 오르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2집 < SOS >가 그 시작. 힙합, 알앤비, 록 등 다채로운 스타일이 한데 어우러진 이 앨범은 시저의 음악성에 확실한 근거를 제시한다. 경이롭다. 특히, 'Kill Bill'은 트렌드와 개성을 동시에 잡으며 컨트리의 연속 질주를 잠시나마 잠재웠다.
멜로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멜로디와 분위기는 전 남자 친구를 살해하고 싶다는 잔인한 내용과 맞물리며 묘한 흥미를 유발한다. 이런 대담한 가사는 2023년의 주요 키워드이기도 하다. 자신의 색깔을 찾기 위해 변신한 도자 캣, 솔직한 고백으로 자기 주도성을 확립한 마일리 사이러스 등이 그 예다. 가감 없는 본인의 모습을 예술로 승화하며 음악에 있어서 진정성이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단연 올해의 싱글이다. (임동엽)
트로이 시반(Troye Sivan) 'Rush'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난교가 뮤직비디오를 구성한다. 술과 춤에 취한 하우스 파티장 안, 'Rush'는 쾌락을 향한 끝없는 갈증을 폭발시킨다. 그 중심은 성소수자의 연대. 파티와 성소수자 커뮤니티라는 두 축을 연결 지은 트로이 시반은 자신의 성정체성 강조와 댄스 플로어를 동시에 전시하는 데에 성공한다.
호주 멜버른의 게이 클럽에서 즐긴 밤에 영감받은 끈적하고 땀내 나는 분위기와 스포츠 관중 떼창 같은 챈트 코러스가 중독을 유도하고 트로이 시반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농염하게 섹스를 이야기한다. '저는 사람과 커뮤니티 그리고 섹스를 즣아해요'라는 브리티시 지큐 인터뷰에서의 발언처럼 순수한 쾌락 그 자체인 'Rush'는 이 모든 성교 활동을 어떤 성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만들며 2023년 가장 화끈한 하우스 댄스 싱글로 남았다. (이홍현)
자크 브라이언(Zach Bryan) 'I remember everything (Feat. Kacey Musgraves)'
한국 가요계의 2023년 키워드가 J팝의 부흥이라면 미국은 단연 컨트리다. 모건 월렌, 루크 콤즈, 제이슨 알딘, 올리버 앤소니 등 여러 아티스트가 빌보드 차트 상위권을 장식했던 한 해였다. 동시에 보수 백인 중장년층 남성의 음악이라는 유구한 이미지와 맞물려 일련의 정치적인 입김에 의한 흥행이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었던 것이 사실. 등장과 함께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던 'I remember everything'은 컨트리를 둘러싼 여전히 곱지 않은 눈총을 조금이나마 가시게 하는 싱글이다.
두 아웃사이더의 만남이다. 오클라호마 출신의 전직 해병대원 자크 브라이언과 여성 뮤지션으로서 진보적인 성향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의 듀엣은 온정적이면서도 올해 가장 무해한 컨트리 히트곡을 만들었다. 술과 밤, 사랑과 아픔이라는 고전적인 레퍼토리를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둘의 목소리는 도시 생활이 주지 못하는 낭만적인 시골 내음을 선사한다. 상투적인 사랑 이야기에 기반한 덕에 외적 요인에 떠밀려 제대로 즐기기 어려울 수 있었던 컨트리 음악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에도 성공한 고마운 히트곡. 컨트리의 성지 내슈빌(Nashville) 밖에서 뻗어 나와 더 강하게 퍼질 수 있었던 울림이다. (한성현)
100 겍스(100 Gecs) 'Hollywood baby'
장막을 들춰 팝의 미래를 엿봤다는 이유로 두 명의 디제이 듀오 100 겍스에게 넝쿨째 굴러들어 온 컬트적 인기와 메이저 레이블 계약 체결은 곧 후속작에 대한 부담과 슬럼프로 이어졌다. 흔들리는 컨디션 가운데 결국 그들이 선택한 영역은 안전하게 입증된 과거행 열차. 산더미처럼 쌓인 빌보드 차트와 그래미 명단을 차곡히 정리하며 주류와 비주류 모두가 만족할 '가장 이상적인 팝 타임머신'을 꾸려내기 위한 4년의 고된 준비 기간이 흘렀다.
그 결과 시간선이 마구 뒤섞여도 어색하지 않은 혼종이 탄생한다. 기타 디스토션과 날것의 드럼이 과거 팝 펑크의 기조를 충실히 가져오면, 피치를 급격히 올린 로라 레스(Laura Les)의 변조된 전자 음색이 오늘날 하이퍼팝 정신을 주입하며 새로운 수식을 자아낸다. 이 모든 혼란을 상회하고 정돈한 차세대 프로듀서 딜런 브래디(Dylan Brady)의 정교한 팝 감각의 몫도 빼놓을 수 없다. 부족한 능력에도 졸지에 명성을 얻게 된 스스로를 자조한 비유에서 따온 제목 'Hollywood baby'.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이 곡을 통해 의심의 여지가 피어날 싹을 완전히 잘라버린 것만 같다. (장준환)
이미지 편집: 김태훈
[2023 올해의 가요 싱글]
[2023 올해의 가요 앨범]
[2023 올해의 팝 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