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올해의 가요 앨범
분야별로 존재감이 뚜렷한 한해였다. 원로부터 중진, 신흥 세력까지 고개를 내보인 힙합은 올 한해 수작의 풍년, 언어의 힘이 드러난 인디 계열이나 작품성에 초점을 맞춘 K팝 음반도 선택에 숙고를 거쳐야만 했다. 순수한 창작열로 담금질한 결과물 모두 다음 단계로 발돋움하고 있는 한국음악을 조명하기에 충분한 작품성을 지닌 덕분. 그렇게 최종 공론장에 도달한 수십 장 중 단 열 장만이 2023년의 명단에 올랐으니, 언제나 그렇듯 순서와 순위는 관계없다.
알엠(RM) < Indigo >
예술성과 대중성 가운데의 조율은 쉬운 듯 쉽지 않다. 솔로 음반 < Indigo >가 나왔을 때 대중과 평단이 모두 즉각 반응한 것은 그 어려운 걸 RM이 아주 매끄럽고 완숙하게 해냈기 때문이다. 평소 알려져 있듯 그림과 문화를 사랑하는 취향을 드러내고 그사이 소담한 일상의 풍경과 아티스트로서 겪는 외로움, 불안함을 가감 없이 털어내는 적극성은 음악 앞에 한 아티스트가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 수많은 시선이 본인에게 쏠려 있는 것을 알면서도 타인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제멋대로 써냈다.
이 '제멋'은 그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목소리의 배합을 끌어냈다는 데에서도 기인한다. 한 작품에 에리카 바두, 앤더슨 팩 등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알앤비 뮤지션부터 김사월, 체리필터의 보컬 조유진 등 인디 음악가를 적소에 소환해 내 이야기를 한다. 'Yun', '건망증', '들꽃놀이' 같은 싱글이 꼭 그랬다. 복잡한 내면의 나를 여러 소스를 통해 쉽고 대중적으로 전달했다. 종횡무진 앨범을 누비는 이 주도력과 당돌함은 근 몇 년간 찾아볼 수 없던 부류의 것이다. 팝스타 너머 인간 김남준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펼쳐낸 수작. 음악성과, 대중성이 번뜩거린다. (박수진)
강허달림 < Love >
어느덧 결혼이란 터닝 포인트를 꽤 지나쳐 온 음악 마라토너 강허달림. 가파르고 굴곡진 10여 년의 구간을 버텨 그가 도달한 오늘날의 이름은 < Love >, 바로 사랑이다. 처음 겪어보는 혼란에 뜨거운 눈물방울을 수없이 떨구긴 했지만 이는 오히려 후련히 무게를 덜어내는 결과를 이끌었고, 가뿐해진 몸놀림의 러브 블루스는 우울이 아닌 행복의 리듬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발자국 하나하나 역시 또렷하다. 희망찬 토닥임을 건네는 베테랑 뮤지션의 응원 '괜찮아요 Blues'와 '그러면 돼!', 배우자에게 따스한 감사를 표하는 아내의 고백 '그대는 내 사랑', 그리고 딸아이가 흥얼거린 멜로디와 낱말을 고이 간직한 엄마의 노래 'Love'까지 '사랑'과 '가족'이란 불가항력의 기운이 곳곳에 만연하다. 잠시 속도를 늦추고 소중한 존재들을 되돌아본 회고와 위로의 숨 고르기, 강허달림 그리고 우리의 레이스에 다시금 추진력을 불어넣는다. (정다열)
빈지노 < Nowitzki >
빈지노의 귀환은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베테랑이라는 칭호는 어떻게 쟁취하는지, 진정한 '힙'은 무엇인지, 그들이 추구한 '진짜'란 어디 있는지, 그리고 왜 오랜 역사에 걸쳐 앨범이라는 방식이 뮤지션의 역량을 증명하는 기초 수단으로 자리 잡았는지에 대해 말이다. 양질의 음악은 곧 선순환을 가져왔다. 잠잠하던 힙합 커뮤니티를 순식간에 담론의 장으로 뜨겁게 달군 것은 물론, 스트리밍 시장과 판매량에서도 가시적 성과를 거두며 대중 역시 새로운 감각 체험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무엇보다 아티스트의 아티스트라는 수식어답게 후배들이 추종할 이상향을 다시 한 번 기록했다는 의미가 유효하다. 세련된 감각과 노련함의 집대성. 남의 멋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멋을 발굴하려는 자세. 어쩌면 < Nowitzki >의 진가는 지금이 아닌, 앞으로 수년 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계속해서 스코어보드 숫자를 갱신하는 그의 행보에서 영향 받은'빈지노 키즈'가 태어나 신을 이끌어갈 미래를 떠올려 본다. 흐릿한 잔상 속에서 댈러스의 전설 노비츠키 선수처럼, 힙합 신에 기록된 빈지노라는 영구결번이 반짝일 모습이 스친다. (장준환)
유라 <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 >
어떤 음악은 그저 '감각'했을 때 비로소 의미가 다가온다. 유라의 < 꽤 많은 수의 촉수 돌기 >는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음반 명만큼이나 모든 것을 이해하지 않고 되려 느끼려 했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다. 대중적으로 사랑받았던 알앤비 뮤지션 유라의 스타일이 아닌 재즈적 터치를 적극 가미한 이 앨범은 시종일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읊조리는 데 꿈인 듯 몽롱하고, 비현실인 듯 아슴아슴한 분위기에 따라 몸을 뒤흔들다 보면 어느새 어떤 것들이 선명해짐을 느낄 수 있다.
해석하자면 작품은 경계와 비경계 사이 무언가를 붙잡는다. 쉬이 멜로디를 따라가기 어려운 곡들이 이어지는 와중 비로소 6번째 수록곡 '동물원'에 와서야 후킹하고 선명한 선율이 들려온다. 이때 번쩍하며 감정의 파고가 든다. 이 앨범이 듣는 이를 사로잡는 방법이다. 자유롭게 방향을 정하지 않고 흘러가다 툭, 어느 지점에서 곁을 울린다. 이 비정형적이고 비선형적인 너울거림은 올 한해 쉽게 만나볼 수 없던 종류의 것이다. 선연하지 않으며 포착하는 내면의 호흡. 각자의 서사를 덧댈 수 있게 빈틈이 넓고, 그래서 굉장히 자유로운, 인상적인 음반. (박수진)
이설아 < 작은 마을 >
복작복작한 세상에서 한 발 비켜 서 있는 듯 소담하다. 그럼에도 모두의 발치에 닿을 만큼 가까이 머무는 < 작은 마을 >이다. <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 > 금상이나 < K팝 스타 시즌 4 > 출연 같은 반짝이는 조각들로 현혹하는 대신 뮤지션의 초라한 감정을 꾹꾹 눌러쓴 가사와 소박한 선율로 담담하게 손 내민다. '샤워'와 같이 일상과 맞닿아있을 때도, '면역'에서 연애사를 털어놓을 때도 거침없지만 조야하지는 않다.
김사월과 함께한 '친구야'의 복고적인 사운드와 꿈의 감각을 그린 듯 몽롱한 드럼 소리의 '꿈에', 위기감 가득한 현악기가 몰아치는 '면역' 등 모두 맑은 목소리와 어우러져 흡인력을 발휘한다. 이슬아의 색채가 오롯하되 외따로 떨어지지 않고 세상과 맞닿아 있는 선율이다. 개인적이고도 보편적인 음악은 너른 품으로 우리를 둘러 안는다. 닳고 닳은 감정들이 찾는 발길로 오랜 시간 녹슬지 않을 앨범이다. (정수민)
이센스 < 저금통 >
이전처럼 촘촘한 유기성이나 확실한 주제 의식은 없다. 감동을 유발하는 자기 서사도, 삶을 돌아보게 하는 철학적인 언어도 양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이센스는 여느 때보다 여유롭게 또다시 한번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큼직한 발자국을 남긴다. 랩. 오로지 래퍼의 혓바닥 하나로 '역대급' 퍼포먼스를 완성한 < 저금통 >이다.
'저금통'이라는 제목처럼 여전히 돈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그에 대한 자신의 변함없는 태도를 유지하는 가운데 약간의 유머와 재치를 더했다. '겐세이 넣지마 XX놈아', '이센스 그래서 박재범보다 잘 범?' 등 유행어가 될 법한 킬링 라인들이 통렬함을 안기고 생동감 넘치는 한국어 가사와 직설적인 화법이 선사하는 감상은 마치 그와 술자리에서 직접 대화를 나누는듯한 착각이 들 만큼 싱싱하다. 앨범의 비트 위에 이보다 나은 한국어 랩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 이 끊임없이 발전하는 거장의 역량이 올 한 해 힙합 팬들을 행복하게 했다. (이홍현)
이승윤 < 꿈의 거처 >
이승윤은 증명(證明)의 가수다. 꿈을 품고 노력하면 궤도에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을 증명했고, 진심이 팬들의 마음에 가닿음을 증명했다. 그에게 모멘텀이 된 < 싱어게인 - 무명가수전 >에서 그는 “틀을 깨는 음악인이라는 틀에 갇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승윤의 정규 2집 < 꿈의 거처 >는 틀을 뒤집는 혁명성 대신 틀 안에서의 완성도를 추구했고, 얼핏 익숙해보이는 그 틀은 시대적 맥락에 따라 귀중성이 높아지곤 한다.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부피감 키운 '영웅수집가'와 잠비나이 이일우의 태평소를 첨가한 '야생마', 1970~80년대 요소를 이승윤의 용광로에 녹여낸 '말로장생'의 흡인력과 보편적 매력은 어느새 잊고 있던 보편적 팝록의 매력을 일깨운다. 풍성한 사운드스케이프가 “소리의 완성도”란 지향성을 입증하고, 메타포와 상징을 두른 노랫말은 1989년생 젊은 음악가의 성찰가적 풍모를 드러낸다. < 꿈의 거처 > 속 열 두 트랙에 알알이 새긴 작은 꿈들은 대중은 환호로 화답했다. 이승윤에게 최고의 한 해가 아닐 수 없다. (염동교)
저드(jerd) < Bomm >
자기 연민과 자기애 사이 작은 틈새를 파고든 저드는 가장 내밀한 지점을 탐험한다. 뒤이어 심연 속에 숨어있던 '우울'로 치장하고 전자음악, 알앤비, 힙합 장신구를 덧댄다. 그 자신에게 고백, 원망, 꿈, 위로 등을 쏟아내는 고독한 언어의 혈투를 벌이면서다. 그렇게 집필된 철저하게 사적인 회고록은 '나'의 감정에 문 닫았던 이들의 공감을 얻고 그들 역시 머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모든 이의 울적한 마음이 내려앉을 거처, 두렵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당당해지기 위한 안내서 < Bomm >의 탄생 비화다.
감상적인 부분을 덜어내도 여러 흐름과 의의도 표상하는 음반이다. 프랭크 오션의 주황빛 열풍이 촉발한 한국 알앤비의 질적 성장, 하이라이트 레코드 등의 레이블 세대를 이은 힙합 키드의 약진. 'X됐어'와 'Blondie'를 필두로 한 저온의 트랙들에는 국내 흑인음악 신의 장점과 포용력이 촉촉하게 스며들었고, 주제와 장르 간의 결합도 탄탄하다. 내밀한 감정을 창작의 원료 삼은 얼터너티브 알앤비로 이번 봄을 추억할 이유를 오롯이 빚어냈다. (손민현)
키드 밀리(Kid Milli) < Beige >
탄생 50주년.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힙합은 무수한 실험과 변형, 결합을 통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고 중심엔 랩과 비트가 주는 청각적 쾌감이 자리하고 있다. 언어의 한계를 딛고 자생(自生) 환경을 마련한 국내 역시 마찬가지였고 번뜩이는 순간 중 키드밀리의 등장은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독보적인 스타일로 데뷔 이래 증명을 거듭한 래퍼는 훗날 당대의 트렌드를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정표를 본인의 총집합으로써 제시하며 현세대가 곧 '나'란 자신감을 내비쳤다. 의심할 여지 없는 앨범 < Beige >로.
힙합의 과거와 현재, 미래란 주제 아래 펼쳐지는 극(劇)은 냉정히 말하면 일련의 서사와 유기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명백히 존재하는 약점을 흐릿하게 만드는 것은 프로덕션을 지배하는 아티스트의 실력. 인터루드로 구분 지은 항목을 넘나드는 키드밀리의 섬세한 퍼포먼스가 마치 변검처럼 이지리스닝, 레이지 등 극단적 변화를 매끄럽게 다듬어 간다. 이에 청자는 깨닫는다. 귓가를 자극하는 사운드란 랩 게임의 본질을. 반세기가 막 지난 장르의 역사적 지점을 자신의 피부색으로 물들인 것만으로 올해를 대표할 자격은 충분하다. (손기호)
키스 오브 라이프 < Kiss Of Life >
이 문장을 올해도 쓰게 될 줄이야. 바야흐로, 바야흐로 걸그룹 전성시대다. 작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뉴진스를 포함, 르세라핌, 아이브까지의 삼두(三頭) 정치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 폭정을 이어갔고, 잠시 주춤했던 에스파까지 재차 선두 싸움에 합류하며 '역대급' 걸그룹 르네상스는 2023년 올해 다시 한번 역대급을 갱신하게 됐다.
작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피프티 피프티부터 트리플에스까지,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걸그룹들의 약진이 빛을 발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이 흐름의 중심을 차지한 키스 오브 라이프의 데뷔 EP < Kiss Of Life >는 그 견고한 완성도와 과감한 구성, 분명한 장르적 색채라는 작품 본연의 위력으로 승부를 본다는 점에서 특히 괄목할 만하다. 거대한 자본력 없이도 수준급의 제작이 가능해졌음을 입증하며 K팝의 보편적 완성을 선언한 상징적 한 장. 앞에서 끄는 힘으로 일관하던 K팝에도 이제 뒤에서 미는 힘이 생겼다. (이승원)
이미지 편집: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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