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올해의 팝 앨범

by IZM

2023.12.01



공식적인 코로나19 비상사태 해제 선언으로 추동력을 얻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경쟁적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한 해였다. 여성 아티스트들의 진취적인 팝, 오랜 팬들을 흐뭇하게 만드는 중진들의 록, 50주년이란 기념비적인 순간을 맞이한 힙합 등 각자의 서사를 지닌 여러 스타일의 음반들이 2023년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언제나처럼 IZM이 이 중에서 올 한 해 꼭 기억해야 할 10장의 팝 앨범을 선정했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칼리 래 젭슨(Carly Rae Jepsen) < The Loveliest Time > 
'헌신적이고', '가장 외롭던' 길을 지나니 가장 사랑스러운 산책로다. 지금까지도 숏폼 콘텐츠에서 수명을 연장 중인 히트곡 'Call me maybe'나 팝 스타로서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 < Emotion >의 아성과 승급 요구에 대응하는 칼리 래 젭슨의 고고한 우회는 사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원히트원더'라는 좁은 정상에 머물기보다 그는 더 광활한 음악의 대지로 나아간 것이다. 상업성의 금자탑에 가파르게 등정한 만큼 길고도 긴 하산을 시작한 그는 마침내 < The Loveliest Time >에 이르러서야 편안한 발걸음을 옮긴다.

내리막길이 아닌 아티스트로서 음악적 DNA의 발현 과정. 오래도록 주입한 1980년대 유전자로 스텝을 밟고 가끔씩 기분 전환형 팝이나 다른 장르로 어깨춤을 들썩이면서, '나, 칼리 래 젭슨은 이런 음악을 한다'고 스스로 되새기고 공표한다. 균형과 색채를 모두 쟁취한 팝 트랙 'Psychedelic switch'나 황량한 드럼 앤 베이스 전장 'Put it to rest'에서 뛰노는 그를 보라. 무성한 디스코와 펑크, 신스팝 복각의 산림 속 고고한 자태, 우후죽순 등장한 신시사이저 선율 중 단연 으뜸이다. 팝 스타의 완전한 예술적 탈태,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시간인가. (손민현)



캐롤라인 폴라첵(Caroline Polachek) < Desire, I Want To Turn Into You > 
2008년 신스팝 듀오 체어리프트(Chairlift)의 데뷔작 < Does You Inspire You > 로 발걸음을 내딛은 캐롤라인 폴라첵은 15년 흐른 지금 당대의 작가주의를 대변하는 아티스트로 올라섰다. 행위 예술 같은 퍼포먼스는 페스티벌에서 빛났고, 골방의 개인적 감상도 황홀경으로 이어졌다. 2019년 작 < Pang >도 훌륭했지만 < Desire, I Want To Turn Into You >의 성취는 궤를 달리했다. 빌보드 200 87위에 그친 이 음반은 수많은 담론을 양산하며 2023년 매니아들의 화두가 되었다.

음악적 체험 혹은 여정으로 인도하는 사운드스케이프다. 도입곡 'Welcome to my island'의 자연주의 유토피아는 쫀득한 그루브의 'Bunny is a rider'에서 세포 모양의 미래 공간으로 변모한다. 거를 트랙이 없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백파이프로 민속적 분위기를 드리운 'Blood and butter'와 라틴풍의 'Sunset'의 자유로운 지향성은 전자음악의 통제 아래 절제의 미를 거둬낸다. 앨범 커버의 도발적 초대처럼 < Desire, I Want To Turn Into You >를 통해 뮤지션과 리스너는 합일에 이른다. (염동교)



푸 파이터스(Foo Fighters) < But Here We Are > 
커트 코베인을 열반으로 떠나보낸 데이브 그롤은 푸 파이터스를 결성해 죽음의 불가피성을 담담히 받아들인 뒤 모두의 영웅이 되어 현재의 삶을 독려했다. 슬픔 앞에 무너지기보다 딛고 나아가길 택한 것이다. 그로부터 28년 후 애석하게도 같은 시련이 찾아왔다. < But Here We Are >은 지난해 사별한 팀의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와 어머니 버지니아 그롤에게 바치는 추도사. 또 한 번 가족을 잃은 그는 한동안 내려놓았던 드럼 스틱을 다시 손에 쥐고 '그럼에도 우리는 여기 있어'라며 돌파 의지를 천명한다.

음반을 관통하는 주제는 상실과 극복이다. 허나 모든 걸 덮어두고 일단 헤쳐 나가자는 맹목적 낙관주의와는 거리를 둔다. 받아들이기 힘든 동료의 죽음에 절규하고, “가끔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라며 솔직하게 허무를 고백하는 식이다. 있는 그대로의 심정을 토해내며 행한 치유 의식이 베테랑 로커들의 견고한 사운드메이킹을 타고 때론 소란하게, 때론 고요하게 청자의 내면을 파고들어 거대한 울림을 선사한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인 감정과 만나는 순간. 고된 역경에도 불구하고 푸 파이터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스스로 날아오르는 법을 터득했다. (김성욱)




히로미(Hiromi) < Blue Giant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
문화세대, 음악세대라고 하지만 보편화는 감각을 향하지, 감동으로 가지 않는다. 궁극은 산업일뿐, 예술은 행선지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재즈 애니메이션 < 블루 자이언트 >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둔, 미련, 열정, 집착 등 비정상과 비현실을 음악 혼과 열정으로 돌려세우며 색소폰 드럼 피아노의 휘몰아치는 재즈 3중주를 감동 예술로 그려냈다. 그러면서 애니메이션에서 신화, 농구, 공주와 왕자가 아닌 음악에의 혼신이란 흥행성 부족의 스토리텔링에 주목하게 하는 예외를 선사한다.

음악이 들린다는 연재만화를 영화로 옮기는 것의 주(主)는 말할 것도 없이 음악의 질이다. 그래미상 수상자인 피아니스트 우에하라 히로미의 음악은 철저히 영화 스펙트럼에 맞춰 재즈의 입체성을 극대화했다. 고저, 장단, 강약을 유려하게 구사해 극중 유닛 자스(JASS)의 삼위일체 미학을 살려내고 있다. 만화원작을 조금 비튼 마지막 연주 'First note'는 가히 일급. 실사 < 위플래시 >의 흡수력을 넘어선다. 살 떨림의 음악황홀경을 전달해 우리 마음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감동을 길어 올린, 2023 최고의 라이브 공연! 애니메이션에 음악인격이 부여되었다. (임진모) 



제시 웨어(Jessie Ware) < That! Feels Good! >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코로나 시기 발매된 < What's Your Pleasure? >가 내던진 궁극적 고찰은 디스코 리바이벌의 필요성과 함께 본격적인 댄스 복원 사업의 장을 열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제시 웨어는 그가 뿌린 씨앗이 개화하는 순간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상실감을 회복하자 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춤추며 진정한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시대를 맞이했다. < That! Feels Good! >이 만족스러운 감탄사로 시작하는 이유다. 

전작이 정교한 복각과 해석 사이 고찰을 요했다면, 이제는 어린이도 이해할 만큼 더 쉽고 직관적으로 변한 선율과 박자 감각이 여기저기서 폭죽처럼 울려 퍼진다. 복용법도 쉽다. 그저 우리는 'Free yourself'의 도발적인 피아노 리드가 등장하면 모아뒀던 탄성을 내지르면 되고, 반대로 'Pearls'에서 보컬 이펙트가 영롱하게 반짝이며 회전할 때엔 황홀경에 말을 잃으면 된다. 애초에 이렇게 제멋대로 감상을 주무르며 청자를 연주하는 앨범도 정말 오랜만이다. 우리는 그저 편안하게 탑승만 하면 될 뿐. (장준환)



릴 야티(Lil Yachty) < Let's Start Here >
투팍(2pac)과 비기(Notorious B.I.G.)가 과대평가됐다는 발언으로 세간의 뭇매를 맞던 한 젊은 래퍼가 흑인음악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한다. 믿기 어려운 문장이겠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다. 장르와 장르가 서로의 몸을 뒤섞고 소리가 스스로의 살점을 도려내는 작금의 정통성 소멸 시대, 전통도 근본도 명분도 모두 죽고 청각적 쾌감이라는 목적만이 남은 지금, < Let's Start Here >는 2023년 최초의 걸작으로 등극함으로써 음악계 전반에 대단히 시의적절한 울림을 선사한다.

과연 당돌한 청년. 릴 야티(Lil Yachty)는 흑인음악을 덜어낸 자리에 백인음악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사이키델릭 록을 퍼붓는 파격을 감행한다. 핑크 플로이드와 펑카델릭(Funkadelic)부터 테임 임팔라와 엠지엠티(MGMT), 이브스 튜머(Yves Tumor)까지, 클래식부터 네오-클래식까지 모조리 끌어안는 그 포용력에 투팍과 비기도 끝내 박수를 보내지 않을까. 한 음악가의 경이로운 예술적 도약임과 동시에 올해 가장 흥미로운 융합. 스스로의 무(無)근본을 새로운 차원의 근본으로 재정의하며 힙합 신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릴 야티에게 만장일치의 결과로 올해의 기량발전상을 수여한다. (이승원)



파라모어(Paramore) < This Is Why >
팝 펑크가 다시 떠오르자, 헤일리 윌리엄스를 롤 모델로 삼은 후배들이 등장했고, 본인의 창작욕구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던 만큼 초기 파라모어의 음악을 다시 불러오기에는 좋은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 This Is Why >는 과거로 돌아갔다. 그것도 펑크(Punk) 자체의 과거다. 1980년대의 토킹 헤즈, 후배 밴드 포올스의 감성이 융합되니 2000년대의 블록 파티가 보인다. 다소 침잠된 사운드, 직선적인 기타 리프, 'Liar'로 대표되는 서정성의 강화 등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파라모어의 형태를 빚었다. 과감하고도 노련하다.

밝고 대중적인 < Paramore >나 청량한 신스 팝 앨범 < After Laughter >와 같은 이미 경험한 길을 다시 안전하게 걸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선택은 또 한 번의 새로움이었다. 2000년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로의 복귀라는 확고한 레퍼런스가 있음에도 헤일리 윌리엄스만이 가진 특유의 목소리와 감성 덕분에 단순한 아류, 모방이 아닌 온전히 파라모어의 음악으로 다가온다. 이모 펑크와 같은 감성에 직선적인 구성과 시크함이 더해진 'The news'와 거기에 비장하기까지 한 'You first'는 특히 탁월하며, 'C'est comme ça'의 그루브는 그 시절 포스트 펑크의 댄서블한 감각을 살려내는 등 대부분의 트랙이 신선하면서도 익숙한 맛을 지닌다. 고유의 목소리로 과거 회귀와 미래 개척을 고루 섞으니, 펑크의 새로운 현재가 생겨났다. (김태훈)



스크릴렉스(Skrillex) < Quest For Fire > 
덥스텝의 기를 앞세우고 새로운 불을 찾아 떠난 지 9년, 드디어 그가 돌아왔다. 길었던 여정만큼 할 얘기가 많았는지 정규 2집을 발매한 다음 날 연이어 세 번째 앨범을 공개했다. 전자(前者)에서는 전자 음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개성을 뽐냈다면, 후자에서는 힙합을 가미해 좀 더 팝적인 느낌을 살렸다. 올해의 승기는 일렉트로닉 뮤직 사운드에 대한 원초적 연구가 풍성한 < Quest For Fire >가 잡았다.  

이럴 줄은 몰랐다. 이렇게 오래 걸린 점도, 그리고 스크릴렉스의 분신과도 같은 덥스텝이 옅어진 부분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음악 하나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된다.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그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고민과 소포모어 징크스를 앞두고 쏟아진 부담을 동시에 극복해 낸 진정한 음악적 자기 객관화의 승리! 그렇다. 그는 불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불 피우는 방법을 습득해 온 것이다. (임동엽)



수프얀 스티븐스(Sufjan Stevens) < Javelin >
연과 연이 뭉쳐 있는 타래로 인간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와 비례하여 얽히고설킨 실을 끊어내기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할까? 순간을 잊고자 대체할 수 없는 부재(不在)를 채워 넣기 위해 우악스럽게 기억을 쏟아버린다. 형벌과도 같은 이 소모적 행위는 군상과 상관하지 않고 서로 공감할 수 없는 편파적인 감정을 보편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이를 말미암아 상처받은 모든 존재를 품에 안게 하는 기적이다.

스스로를 철저히 파헤치며 드러낸 < Javelin >은 그렇기에 슬프지 않다. 상실에 대한 절망과 고뇌, 사랑을 담은 생경한 토로는 아티스트의 인생을 요약하듯 잔잔히 시작하여 날카로운 전자음과 풍부한 화성, 오케스트라 등으로 환희와 격정을 맞이하고 이내 고요하게 갈무리된다. 마치 자체가 거대한 메시지인 것처럼, 특별한 이해를 구하지 않고 흘러가는 이별일지를 매개로 마음이 마음을 관통한다. 비극적 결말의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그 끝에 기다리는 건 다시 찾아올 희망이다. 위로할 수 있음에 우리의 삶은 찬란하다고. 수프얀 스티븐스의 조용한 고백이 기적처럼 새겨진다. (손기호)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 < Utopia >
힙합을 들으며 척박한 삶의 터전을 딛고 생동하는 약자의 문화를 느끼는 건 이젠 아련한 경험이다. 자본의 힘을 입어 음악적 경계는 아득히 넓어졌고, 그렇게 영역을 확장하다 다른 유형의 음악과 닿고 나면 힙합은 힘을 자랑하듯 스타일을 집어삼키며 더욱 거대해졌다. 트래비스 스캇의 < Utopia >는 이렇게 덩치가 커진 장르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음반이다. 힙합 50주년, 소수자의 하위문화는 어느새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그의 유토피아는 개인적인 기호를 맘껏 충족하는 어떤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취향이 강하게 묻어난다. 악장을 나눠야 할 정도의 다채로운 형식의 변화로 복잡성을 확보하면서도 맥시멀리즘은 거부하는 편곡이 앨범 전반에 흐른다. 카니예 웨스트 등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준 동료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구성은 화려한 참여진에게서 재능을 빌려와 가수의 입맛을 섬세하게 반영한 결과다. 트래비스 스캇의 블록버스터는 가장 사적이면서도 가장 산업적인 모습으로 그가 활동하는 업계의 정확한 현주소를 보여준다. (김호현) 

이미지 편집: 김태훈

[2023 올해의 가요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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